박진영 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 후 할머니 손에 맡겨져 자랐다. 당시 할머니 앞으로 나오던 노령연금 10만원으로 한 달을 생활했었고, 노인정에 가야 하루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던 중 턱이 부러지며 병원을 찾게 됐는데 큰 수술비 앞에 절망하게 된다. 자신의 수술비 낼 돈도 없는데 나중엔 어떻게 할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을까 싶어 그 뒤로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막노동을 하고 집에 들어와선 공부를 해 2년 만에 서남대 의대 6년 장학생으로 합격한 그.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박진영 씨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짐을 싸서 할머니가 계신 수원으로 올라왔다. 평소엔 할머니와 수시로 전화를 하고 2주나 3주에 한 번 찾아뵙는 게 전부였다. 올해로 92살 된 할머니는 첫 학기를 마치고 집에 온 손자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며 좋아하신다.
“20일에 시험 끝나서 바로 집으로 왔어요. 할머니가 몸이 약하시다 보니까 여름인데도 감기로 고생하고 계세요. 방학이니까 이제 할머니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참 좋네요. 여름 방학에는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수험생에 관한 책을 쓰게 됐어요. 이번 방학도 바쁘게 보낼 것 같아요.”
편의점, PC방, 고깃집 안 해 본 일 없어
그는 부모님과 살아본 적이 없다. 태어나고 100일쯤 됐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고모 댁에서 자랐다. 너무 어렸을 때라 고모를 엄마라 부르고 자랐으며 9살엔 새엄마 집에 가게 됐다. 그러다 중3 때 새엄마가 갑자기 ‘너를 이젠 못 깨워준다’며 쫓아냈다. 그를 맡아서 키워준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고아원에 보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쓰럽게 생각한 할머니가 나서서 키워준다고 하셨다.
“할머니와 둘이 살게 됐는데 한 달에 할머니 앞으로 나오는 노령연금 10만원으로 생활했습니다. 반찬은 간장이랑 밥밖에 없고 점심은 노인정에서 자주 해결했어요. 그러다 노인정이 공사한다고 문을 닫은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돈이 500원밖에 없는 거예요. 아파트 가면 불우이웃 돕는다고 쌀을 모아둔 데가 있었는데,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쌀을 몰래 훔쳤어요. 집에 와서도 전기가 끊겨서 은행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와서 할머니께 밥을 해드린 적이 있어요. 이러다 정말 굶어 죽겠구나 싶었어요.”
아무 식당에나 가서 일을 달라고 했지만, 미성년자인 그에게 흔쾌히 일을 주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다 한 고깃집 사장님이 일을 하라고 했다. 학교가 끝난 저녁 6시가 되면 밤 12시까지 불판을 닦고 한 달에 40만원을 받았다.
“가장 상처가 됐던 게 고3이 되니 다른 학생들은 야자 끝나면 부모님이 데리러 왔거든요. 근데 전 막차를 떨켜서 항상 5km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어요. 제가 걸음이 빠른 편이라 50분이면 집에 갈 수 있었어요. 책도 사고 싶은데 책 하나 사려면 고민해야 하고 다른 친구들은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것 보고 많이 속상했거든요.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좀 미화되기 마련인데 그건 아직도 좀 속이 상하네요.”
그가 성인이 되니 정부에서 주는 생활비마저 끊기게 됐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찾다 공사장 인부를 떠올렸다. 기술이 없는 그는 잡부 일을 했고, 새벽 5시부터 일을 하다 계단에 걸려 턱이 부러졌다. 병원을 가니 수술비 200만원을 청구했다. 당시 그의 수중엔 50만원밖에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에 누워 생각을 하니까 절로 눈물이 나는 거예요. 할머니께 오히려 내가 짐이 되지 않을까…. 공부로 성공을 하자. 퇴원을 하면 공부를 하자. 처음엔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아 공부를 잘 못 했어요. 그러다 노인정에 자주 오시던 할머님이 계신데 3일 동안 안 나오시는 거예요. 찾아가 보니 어깨가 퉁퉁 부어서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셔서 모시고 병원엘 갔죠. 어깨가 부러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프셨을 텐데 왜 병원에 안 가셨냐고 하니까 전에도 다리가 부러졌는데 수술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노인연금 10달 넘게 모아서 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너무 속이 상해서 어른들 돕는 정형외과 의사가 되자, 의대를 가야겠다 마음먹었어요.”
남은 체력의 30%로 밤늦도록 공부해
2011년 겨울이었다. 새벽 5시에 나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 5시였다. 처음엔 10분 동안 자리에 앉고 싶어도 앉을 힘도 없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응원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평생을 같은 식으로 살기 싫었다. 첫주엔 30분 공부하고, 그 다음 주엔 2시간씩, 두 달 뒤에는 6시간씩 공부할 수 있게 됐다.
“EBS 기초강의, 기출문제 위주로 공부했어요. 수학 기출문제집 2권이 있는데 4000문제가 넘었거든요. 3번씩 풀어서 1만2000번을 풀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이걸 풀 수 있냐 없냐에 따라 제 인생이 판가름날 거라며 이 악물고 공부했어요. 나 같은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는 낮에 공사장에서 일할 때도 전날 풀었던 수학문제를 생각하고 쉬는 시간엔 영어단어를 외웠다.
“저는 그렇게라도 공부해야 시간이 있기 때문에 이 악물고 공부했어요. 다른 학생들은 유복한 부모 밑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강의를 듣지만 전 공부 시간도 부족하고 남들이랑 같은 상황도 아니거든요. 체력의 70%를 다 쏟아 버리고 남은 30%로 공부하는데 그게 정말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막노동을 할수록 그 일을 정말 하기 싫었어요. 경험이라고 생각해서 며칠 하면 모르겠는데 그게 제 생업이 될까 하면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거든요. 막노동이 오히려 자극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서남대 의대 6년 장학생으로 합격
2013년, 그는 의대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서남대 의대 6년 장학생이었다. 2년 전만 해도 의대는커녕 대학도 못 갈 형편이었는데 그는 모든 성취가 꿈만 같다고 말한다. 또한 합격보다는 자신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가장 먼저 할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장하다고 기특하다고 좋아하셨어요. 붙은 건 둘째 치고 저 같은 사람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어요. 솔직히 저 같은 사람이 없었거든요. 합격 수기 보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간 사람은 있지만, 부모님 없이 모셔야 할 할머니만 있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전 늘 자신감이 없었어요.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을까 하루에 몇 번씩 생각했는데….”
그는 지나온 모든 경험이 귀한 재산이라고 말한다. 겨울에 추워서 할머니랑 노인정에서 살았던 일, 밥과 간장만으로 끼니를 때웠던 일, 훔친 쌀로 주린 배를 채웠던 일, 그 일을 계기로 벼랑 끝에 서 있을 누군가를 잡아주고 그들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지나온 날들을 떠올려봤을 때 그를 도운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고2 담임선생님은 그를 따로 불러서 책도 챙겨주고, 식사는 잘하고 있냐며 안부를 물었다. 또한 급식비와 생활비도 지원해줬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음에도 등록금이 없어서 다닐 수 없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학원 선생님은 그에게 공부하라며 한 달에 60만원씩 5개월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는 그들 덕분에 (고1) 내신 9등급이었던 꼴찌가 의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에요. 머리가 좋았다면 25살에 1학년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껏 절 도와준 모든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해 하고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돼서 행복하고 비록 지방에 있는 대학교지만 서울에 있는 어느 학교보다 좋게 느껴져요. 학교 시설도 시설이지만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합니다. 6년 장학생이긴 한데 학비와 생활비는 다르니까 생활비도 벌어야겠죠. 그 일환으로 알바를 하고 있고 책을 쓰는 것도 있어요. 책이 완전히 무수익이 아니라 인세를 받게 돼서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이번 방학에는 책을 쓸 거예요.”
그는 현재 부모님과 연락을 하지 않고 전화번호도 모른다. 친엄마는 그가 태어난 지 100일 되던 날 이혼해 고향으로 가서 얼굴조차 모른다.
“친엄마는 아마 잘 살고 계실 거예요. 항상 그 생각은 해요. 나중에 한 번쯤은 꼭 뵙고 싶다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제가 이룬 게 아무것도 없고 당당한 것도 없어서 나중에 꼭 만나 뵙고 싶어요.”
그의 꿈은 정형외과 의사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감동을 준 건 주지훈 치과의사다. 버스 타고 다니면서 저소득층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이다. 그는 자신도 그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돕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저도 시골에서 학교에 다니다 보니까 어려운 분들을 더 많이 봤어요. 힘들게 사는데 주변에 병원도 없어서 치료를 못 받아요. 저도 주지훈 의사처럼 그런 활동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활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마지막 꿈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려고요. 저 참 고생 많이 했죠? 지금은 힘들게 살아왔을 때보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시니까 이런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안 하는 건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그분들과 저를 위해서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학생이 되고 싶어요.”
“은행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생쌀을 불려 할머니와 함께 먹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요.”
하루에 한 끼, 한 달 수입 10만원, 열네 살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 가족이라고는 병상에 누운 할머니, 이러한 환경에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은 아름다운 청년이 있다. 올해 스물다섯의 늦은 나이로 서남대 의대에 입학한 박진영씨가 그 주인공이다.
진영 씨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생계를 꾸리며 학업을 병행해야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해 왔다. 그의 새로운 출발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다.
1990년 평범한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태어난 지 100일 정도 지났을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고 이후부터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아홉 살 때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 새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의 꿈만 같던 기억이다. 아버지가 불미스러운 일로 교도소에 간 후 새엄마와도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삼촌과 고모가 있었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아 그 누구도 나서서 그를 돌볼 수 없었다. 그 순간 유일하게 진영 씨를 키우겠다고 나선 사람이 할머니였다.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진영 씨는 자연스럽게 가장 아닌 가장이 됐다. 생활비를 보탰던 작은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면서 할머니의 노인연금 월 10만원으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한 달에 10만원으로 생활한다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에요. 하지만 당시 노인정이 있어 점심 한 끼는 해결할 수 있었어요.”
굶는 일은 다반사였고 하루 한 끼 김치에 밥을 먹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고등학교 때 노인정이 공사로 인해 며칠 문을 열지 않았어요. 당연히 할머니와 저는 굶어야 했죠. 하필 그때 할머니가 많이 아팠어요. 먹을 건 없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기도 요금을 못 내 끊겼죠.”
그 시절을 회상하는 진영 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아파트 단지에 있던 불우이웃 쌀통에서 쌀을 구해 근처 은행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그 쌀을 불려서 할머니와 함께 먹었어요. 그 생쌀밥을 먹는데 ‘아, 이러다가 진짜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방과후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고깃집에서 불판을 닦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그는 한 달 40만원의 수입으로 밥 굶는 일은 면했다.
하지만 고3 수험생이 되자 공부와 생계 중 한 가지는 포기해야했다. 당시 기초수급자 제도조차 몰랐던 그는 결국 공부보다는 생활비를 버는 일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이 그의 어려움을 알게 됐고 기초수급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아주대학교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원망하지 않았다. 실패가 아니었고 더욱이 좌절이 아닌 새로운 꿈을 갖기 위해 더욱 강인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 돌보는 정형외과 의사가 될 겁니다”
“당시에 기초수급제도 혜택을 받으며 대학교에 다녔다면 아마 지금보다는 덜 열심히 살았을 거고 비뚤어진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역경이 있었기에 극복하려는 의지를 키웠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그는 기초수급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돼 비교적 보수가 많은 공사장에서 일했다. 딱히 기술이 없는 진영 씨가 공사 현장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건축자재를 옮기거나 폐자재를 정리하는 등의 잡다한 일들. 그러던 중 그는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고를 당한다. 현장에서 일하다가 넘어져 턱을 다치게 된 것. “넘어져서 턱을 다쳤는데 병원비가 200만원인 거예요. 그 당시 수중에 있던 돈을 몽땅 긁어 모아봐야 50만원이었는데, 그때 문득 느꼈어요. ‘아! 이 일을 하면서 평생 할머니를 모시고 살 수는 없겠구나’라고. 그래서 꿈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정형외과 의사의 꿈을 갖게 된 운명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노인정에서 매일 보던 할머니 한 분이 3일이 지나도록 안 보이는 거예요. 혼자 사셨던 할머니인데 걱정되어 댁을 찾아가 보니까 한 쪽 어깨가 정말 심각하게 퉁퉁 부어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굶고 누워만 계신 거예요. 병원비가 없어 그냥 계셨다면서요.”
119를 통해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다 드리면서 그는 “할머니들을 위해 정형외과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물론 일하면서 공부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영 씨는 새벽 5시부터 저녁 5시까지 공사장에서 일하고 나머지 잠자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공부했다. 힘들어 포기하고픈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할머니를 보면서 마음을 다시 잡았다.
처음 하루에 30분씩 공부하기 시작해 일주일 간격으로 공부시간을 30분씩 늘려 나갔다. 학원을 다닐 수 없는 처지였기에 EBS 방송과 교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세 시간만 자는 강행군을 펼쳤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했던 그는 결국 올해 서남대 의대에 합격해 꿈의 첫 단추를 끼웠다.
진영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의대는커녕 대학은 꿈도 못 꾸던 저 자신을 통해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며 “가난하게 태어난 건 죄가 아니에요. 하지만 가난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죄인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죠. 하늘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어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꿈과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하면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어요.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진영 씨는 마지막으로 “치과 전문 버스를 운행하며 의료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치과의사 주지훈 씨가 롤모델”이라며 “새로운 꿈을 향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