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부역자 매국노 김동조(金東祚. 부산 동래. 1918년 8월 14일 - 2004년 12월 9일)
한국인이 일본에 협력한 훨씬 더 대표적인 예는 김동조의 경우로서, 그는 동족인 한국인을 감시하는 경관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한국인이 일본에 협력한 훨씬 더 대표적인 예는 김동조의 경우로서, 그는 동족인 한국인을 감시하는 경관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친일 부역자 김동조라는 사람은 부산 출신이다. 우리가 흔히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알고 있다. 왜 거목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수구언론에서 그렇게 부르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다.
그러나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 해서 무조건 거목이니 뭐니 하고 불러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으며, 살면서 무슨 덕을 쌓았는지 그게 중요한 판단기준이어야지 무조건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 해서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불러주면 어쩌자는 거냐?
한국외교의 산증인이라고 하면 그나마 이해하겠다.
이 사람은 일본 큐슈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후생성과 내무성에서 근무하면서 일제에 충성하는 것으로써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현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인이 일본에 협력한 훨씬 더 대표적인 예는 김동조의 경우로서, 그는 동족인 한국인을 감시하는 경관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한국 사이를 빈번히 오가며 일본에 징용된 수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했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그를 승진시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다른 지급품들을 배급하는 전시 책임자로 삼았다.
1945년 이후 그는 미군정을 위해 역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신설 외무부에 들어가서 차관으로 승진을 했다가 퇴직했다. 그는 1961년 군사 쿠테타 이후 여당과 중앙정보부에 외교고문으로 복귀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기여한 후 그는 첫 주일 한국대사가 되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일본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준 매수꾼으로서 재일한국인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1967년 그는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가 미국의회 방문을 준비하면서 1백 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들로 서류가방을 채우는 것을 본 고용인이 그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빚었다.]
사회가 어수선한 시점에서 체계도 안 잡힌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일제 고급관료 경력으로 들어와 이곳저곳 부처를 넘나들며 일하다가 느닷없이 외무부 정무국장이 되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불과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정통 외교 관료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단순히 일본사람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승승장구한 거 같다.
충격적인 것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수석대표였고, 주일대사였다는 점이다. 미국 중앙정보부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허겁지겁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서둘러 체결한 것은 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일본 기업으로부터 66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받는 등 뒷거래를 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혀낸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이 몸담고 있었던 꼬마민주당에서 96년 총선 당시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단순한 정치적 의혹제기로 폄하됐다. 어쨌든 그 선봉에 김동조가 있었던 것이다.
김동조가 수석대표로 나가서 체결한 한일회담의 성과라는 것은 참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확인된 일제치하 징병, 징용피해자가 총 103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약 8만 명이 사망자이고, 3만 명이 부상자였다. 그 가운데 겨우 8천명의 사망자 유가족에게 쌀 15가마 살 정도의 돈인 30만원씩 나눠주는 정도로 끝났다. 그렇게 형편없는 보상을 해주고도 개인청구권 문제는 흐지부지 처리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명확한 사죄도 문서로 전혀 받지 못했고, 독도 영유권도 확실하게 해 놓지 못했고, 피해자의 생사확인도 안 했고, 피해자 통계도 제대로 안 냈고, 사망자 유해발굴 문제도 논의하지 못했고, 위안부 및 원폭 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안했고, 징용 사할린 동포 처리문제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측의 제공은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 사고를 갖고 있다".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굴욕적인 협정을 돈 몇 푼 받고 체결하는 데 김동조는 앞장섰던 것이다. 과연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장희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일협정은 일본의 전범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이라는 부도덕한 두 세력이 역사의 지배세력으로 등장, 야합하여 만든 합작품이다. 그래서 한일협정은 몇 푼의 돈에 혈안이 되어 일제식민지 과거사 인식을 전면 외면함으로써, 그에 부응한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해 매우 불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어쨌든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마디의 사과도 없는 그런 비정상적인 한일협정을 맺는데 앞장선 공로로 김동조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미국이라면 껌뻑 죽던 시기에 주미대사를 무려 6년이나 하면서 유신정권을 합리화하는 첨병이 되었다.
그리고는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어 2년여간 활동하다가 그 후 박정희의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직을 2년여간 수행하며 반민주적 유신체제 수호의 간성이 된다.
유신 말기 난데없이 한국석유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하다가 박정희정권이 붕괴하고 나서는 관직에서 물러나 느닷없이 변호사 개업을 한다. 김동조의 약력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가 어떤 근거로 왜 변호사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모든 게 어수룩한 시기였다. 어쨌든 이런 대단한 이력을 가지고 김동조는 거대한 혼맥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김동조의 부인은 약사이다. 약사출신인 부인 송두만과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김대영은 그다지 뚜렷한 움직임이 엿보이지 않는다. 차남 김민영은 현재 외국어대 무역학과 교수이다. 김민영의 부인은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인 정다미다.
장녀 김영애는 스스로 거물급 인사다. 모건스탠리 부사장이다. 오히려 김영애의 남편 최융호의 이력이 부인에 비해 밀린다.
차녀 김영숙은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손원일의 장남 손명원과 결혼을 했다. 손원일의 부친이 유명한 손정도 목사다. 손명원은 현대미포 사장과 쌍용자동차 사장을 역임했다. 셋째 딸 김영자는 GS그룹 허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남편이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사장이다.
막내 딸 김영명은 정몽준과 결혼을 했다.
막내 딸 김영명은 정몽준과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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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씨 부인 김영명씨 가족 배경이 대단하네요.
... 조회수 : 3,230
작성일 : 2014-05-28 09:20:30
IP : 113.30.xxx.152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
'14.5.28 9:22 AM (113.30.xxx.152)http://m.bbs2.agora.media.daum.net/gaia/do/mobile/kin/read?bbsId=K162&article...
7막7장 홍정욱, 조선일보, 뭐 안 얽힌 데가 없네요. 결혼으로..2. 여기도 꺼삐딴리
'14.5.28 9:24 AM (203.247.xxx.210)저기도 꺼삐딴리
꺼삐딴리 꺼삐딴리3. 내려오자
'14.5.28 9:26 AM (211.215.xxx.166)창세기에 누가 누구를 낳고
이후로 최고 복잡한듯 하네요.4. 패랭이꽃
'14.5.28 9:35 AM (186.135.xxx.76)정말 짜증나더라고요. 이런 사람이 잘 먹고 잘 산다는게요. 민족정기가 없죠.
누가 국가를 위해, 정의를 위해 헌신하려 하겠어요.
친일파 처단을 잘 했어야만 했는데 말입니다.5. 세상에
'14.5.28 10:10 AM (211.36.xxx.51)뿌리깊은 친일파
친일파 대대손손 번창하니 개탄할노릇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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