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34일만에 박 대통령이 담화문을 낭독했다. 질의응답도 없어 일방적 통보나 다름없는 담화였다.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 분노하는 이유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읽어내려간 내용은
국민의 분노를 정말 잘 알고 있다면 국민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번 사고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모든 잘못을 죄다 외부 탓으로 돌렸다.
먼저 해경을 질타했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실패한 이유로 ‘구조구난 업무 등한시’와 ‘외형적 성장에 집중해온 구조적 문제’를 들었다. 그러면서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선언했다.
안전행정부를 향해서는 “국민안전을 최종 책임져야 하지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며 비난의 날을 세웠다. 또 “해경을 지휘 감독하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해수부를 꾸짖었다.
해경의 해양구조구난과 해양경비 업무, 안전행정부의 안전 업무, 그리고 해수부의 해양교통관제 업무 등을 신설되는 총리실 국가안전처로 넘기겠다고 말했다. 또 안전행정부의 인사·조직 기능을 총리실 행정혁신처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해경-안행부-해수부 비난, 그러면서도 사고 원인은 “선장과 청해진해운”
민관유착이 이번 참사를 불러온 것이라며 논란이 되고 있는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했다. 안전감독과 인허가 규제업무와 직결되는 공직유관단체 기관장과 감사직에는 공무원을 임명하지 않을 것이며, 공직자의 타 기관 취업도 엄격히 제한하고, 민간인 전문가가 공직에 채용될 수 있는 폭을 넓히겠다고 말했다.
과연 대통령은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참사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이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직무유기와 업체의 무리한 증축과 과적 등 비정상적인 사익추구였습니다. 이번에 사고를 일으킨 청해진해운은 지난 1997년에 부도가 난 세모그룹의 한 계열사를 인수하여 해운업계에 진출한 회사입니다.”
참사를 일으킨 주범으로 선장과 일부 승무원, 그리고 청해진해운을 지목한 것이다. 침몰 원인과 ‘0명 구조’를 한묶음으로 포장함으로써 모든 잘못을 ‘배와 선주’에게 돌렸다.
청해진해운만 특검 대상? 가이드라인 제시한 대통령
특검 얘기도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특검을 청해진해운과 관련된 부분으로 국한시키겠다는 투의 표현을 썼다. 특검을 통해 해경, 안행부, 해수부, 청와대에 대한 의혹을 풀어보겠다는 유가족과 국민들의 생각과 크게 동떨어진 발언이다.
“국민들이 청해진해운의 성장과정에서 각종 특혜와 민관 유착이 있었던 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특검을 해서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정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특검 대상에 청와대와 정부가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 발언이다. 구조 회피와 방치의 주범인 해경, 안행부, 해수부에게 청해진해운 못지 않는 책임이 있다고 보는 국민 정서에 역행한다. 유가족들은 주범인 해경이 사고 수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크게 분개한다. 대통령은 이런 유가족의 분노를 외면한 것이다.
특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니 여야가 심하게 다투게 생겼다. 여당은 청와대와 안행부 등을 포함시키지 않는 선을 고집할 테고, 야당은 정부 관련부처와 청와대가 반드시 특검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할 테니 말이다.
'내 탓'은 없고 은근슬쩍 국회와 과거정부 탓도
은근슬쩍 남의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과거 관행과 고질적인 유착을 탓하면서 여기에 국회도 끼워넣었다. 민관 유착고리를 끊는 게 중요하다며 “정부가 제출한 일명 김영란 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금지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번 참사에 국회 탓도 있다는 말로 들린다.
재난통신망 구축이 제대로 안 된 것은 과거정부 탓으로 돌렸다. “11년째 진전이 없는 국가재난안전통신망 구축사업도 조속히 결론을 내 하나의 통신망을 갖추겠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싸잡아 비판한 셈이다.
하지만 자신 탓은 하지 않았다. 무능한 정부와 한없이 무기력했던 청와대를 거느린 대통령이라면 반드시 ‘내 탓’을 언급하며 깊이 사죄해야 마땅하다. 구조할 수 있던 상황에서도 회피한 채 구경만 했던 정부아닌가.
그런데도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라고 주장했다. 선장과 승무원의 행동이 살인행위라면 구조를 회피한 채 골든타임 내내 구경만 한 정부는 뭔가. 이 역시 살인행위에 해당한다.
유가족과 국민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 없어, 해경 해체는 '증거인멸' 행위
자신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는 게 사과다. 그래야 피해자의 분노를 달래고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해경과 안행부, 해수부를 비난하면서 사고의 직접적 원인으로 청해진해운을 지목했다.
특검 가이드라인이라니. 사고 진상규명이라도 제대로 해 죽어간 원혼을 달래겠다는 유가족들의 외침을 외면한 담화문이다. 유가족의 바람이나 심리상태에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은 없고 빠져나갈 궁리에 골몰한 흔적만 역력하다. 주범인 해경을 해체하겠단다. 범죄사실과 증거를 인멸하겠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재난대응을 한곳으로 집중시키지 않고 분산 관리하도록 만들어 화를 키운 건 다름 아닌 박 대통령이다. 그런데도 남 탓만 하다니.
‘이제 세월호 잊어 달라’ 이 건가?
유가족들은 “정부가 우리 아이들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며 분개한다. 또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며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불신하고 있다.
국민들은 구할 수 있는 생명들을 정부가 왜 그대로 바다 속에 방치했는지 크게 의아해 하며 분노한다. 대통령이 정말 국민이 분노를 잘 알고 있다면 이런 담화문을 일방적으로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좌절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통령. 이 말이 ‘지금부터 세월호를 깨끗이 잊어 달라’는 말로 들린다. 참담한 담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