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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통령의 '글 쓰는 법'

AJ23 조회수 : 3,120
작성일 : 2014-05-06 22:59:29
대통령이 강조했던 글쓰기 지침

관저 식탁에서의 2시간 강의
- 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 지침

2003년 3월 중순, 대통령이 4월에 있을 국회 연설문을 준비할 사람을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늘 ‘직접 쓸 사람’을 보자고 했다.
윤태영 연설비서관과 함께 관저로 올라갔다.

김대중 대통령을 모실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과 독대하다시피 하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다니.
이전 대통령은 비서실장 혹은 공보수석과 얘기하고, 그 지시내용을 비서실장이 수석에게, 수석은 비서관에게, 비서관은 행정관에게 줄줄이 내려 보내면, 그 내용을 들은 행정관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를 원했다.
“앞으로 자네와 연설문 작업을 해야 한다 이거지? 당신 고생 좀 하겠네. 연설문에 관한한 내가 좀 눈이 높거든.”
식사까지 하면서 2시간 가까이 ‘연설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특강이 이어졌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열심히 받아쓰기를 했다.
이후에도 연설문 관련 회의 도중에 간간이 글쓰기에 관한 지침을 줬다.

다음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자네 글이 아닌 내 글을 써주게. 나만의 표현방식이 있네. 그걸 존중해주게. 그런 표현방식은 차차 알게 될 걸세.
2. 자신 없고 힘이 빠지는 말투는 싫네.
‘~ 같다’는 표현은 삼가 해주게.
3. ‘부족한 제가’와 같이 형식적이고 과도한 겸양도 예의가 아니네.
4. 굳이 다 말하려고 할 필요 없네. 경우에 따라서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도 연설문이 될 수 있네.
5. 비유는 너무 많아도 좋지 않네.
6. 쉽고 친근하게 쓰게.
7.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고 쓰게. 설득인지, 설명인지, 반박인지, 감동인지
8. 연설문에는 ‘~등’이란 표현은 쓰지 말게. 연설의 힘을 떨어뜨리네.
9. 때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방법이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킹 목사의 연설처럼.
10.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글쓰기의 최대 적이네.
11. 수식어는 최대한 줄이게. 진정성을 해칠 수 있네.
12. 기왕이면 스케일 크게 그리게.
13. 일반론은 싫네. 누구나 하는 얘기 말고 내 얘기를 하고 싶네.
14. 추켜세울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추켜세우게. 돈 드는 거 아니네.
15. 문장은 자를 수 있으면 최대한 잘라서 단문으로 써주게.
탁탁 치고 가야 힘이 있네.
16. 접속사를 꼭 넣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게.
없어도 사람들은 전체 흐름으로 이해하네.
17. 통계 수치는 글을 신뢰를 높일 수 있네.
18. 상징적이고 압축적으로 머리에 콕 박히는 말을 찾아보게.
19. 글은 자연스러운 게 좋네. 인위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말게.
20. 중언부언하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하네.
21. 반복은 좋지만 중복은 안 되네.
22. 책임질 수 없는 말은 넣지 말게.
23. 중요한 것을 앞에 배치하게. 뒤는 잘 안 보네. 문단의 맨 앞에 명제를 던지고, 그 뒤에 설명하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좋아하네.
24. 사례는 많이 들어도 상관없네.
25. 한 문장 안에서는 한 가지 사실만을 언급해주게. 헷갈리네.
26. 나열을 하는 것도 방법이네. ‘북핵 문제, 이라크 파병, 대선자금 수사…’ 나열만으로도 당시 상황의 어려움을 전달할 수 있지 않나?
27. 같은 메시지는 한 곳으로 몰아주게. 이곳저곳에 출몰하지 않도록
28. 백화점식 나열보다는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줄일 것은 과감히 줄여서 입체적으로 구성했으면 좋겠네.
29. 평소에 우리가 쓰는 말이 쓰는 것이 좋네. 영토 보다는 땅, 치하 보다는 칭찬이 낫지 않을까?
30. 글은 논리가 기본이네. 좋은 쓰려다가 논리가 틀어지면 아무 것도 안 되네.
31. 이전에 한 말들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네.
32.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은 쓰지 말게. 모호한 것은 때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가는 방향과 맞지 않네.;
33.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는 글이네.

대통령은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지만, 이 얘기 속에 글쓰기의 모든 답이 들어있다.
지금 봐도 놀라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음식에 비유해서 글쓰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1. 요리사는 자신감이 있어야 해. 너무 욕심 부려서도 안 되겠지만.
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2.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재료가 좋아야 하지. 싱싱하고 색다르고 풍성할수록 좋지. 글쓰기도 재료가 좋아야 해.
3. 먹지도 않는 음식이 상만 채우지 않도록 군더더기는 다 빼도록 하게.
4. 글의 시작은 에피타이저, 글의 끝은 디저트에 해당하지. 이게 중요해.
5. 핵심 요리는 앞에 나와야 해. 두괄식으로 써야 한단 말이지. 다른 요리로 미리 배를 불려놓으면 정작 메인 요리는 맛있게 못 먹는 법이거든.
6. 메인요리는 일품요리가 되어야 해. 해장국이면 해장국, 아구찜이면 아구찜. 한정식 같이 이것저것 다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해서 써야 하지.
7. 양념이 많이 들어가면 느끼하잖아. 과다한 수식어나 현학적 표현은 피하는 게 좋지.
8. 음식 서빙에도 순서가 있잖아. 글도 오락가락, 중구난방으로 쓰면 안 돼. 다 순서가 있지.
9. 음식 먹으러 갈 때 식당 분위기 파악이 필수이듯이, 그 글의 대상에 대해 잘 파악해야 해. 사람들이 일식당인줄 알고 갔는데 짜장면이 나오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10 요리마다 다른 요리법이 있듯이 글마다 다른 전개방식이 있는 법이지.
11. 요리사가 장식이나 기교로 승부하려고 하면 곤란하지. 글도 진정성 있는 내용으로 승부해야 해.
12. 간이 맞는지 보는 게 글로 치면 퇴고의 과정이라 할 수 있지.
13.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최고지 않나? 글도 그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야 해.

이날 대통령의 얘기를 들으면서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 분을 어떻게 모시나.
실제로 대통령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글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또한 스스로 그런 글을 써서 모범답안을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다짐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배우는 학생이 되겠다고.
대통령은 깐깐한 선생님처럼 임기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연설비서실에서 쓴 초안에 대해 단번에 오케이 한 적이 없다.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8년간 연설비서관을 하셨던 분이 쓰신 <대통령의 글쓰기>란 책의 일부분입니다.
정말 그간 글쓰기에 대해 가졌던 고민들에 많은 도움이 되네요. 특히 16, 19번은 항상 고민하는 거였는데 많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33번은 정말... 정수네요.

노통께선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어찌 이렇게 글쓰기 강사처럼 말씀하시는지.. 새삼스레 얼마나 지적인 사람이었는지 알게되네요.
그에 비해 요즘 티비에 나오는 연설은 뭐... 카메라나 좀 쳐다 봤으면 좋겠습니다.
IP : 115.139.xxx.134
19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4.5.6 11:07 PM (180.65.xxx.172)

    명문입니다..
    그분이 유난히 그리워지는 시절이네요...ㅠㅠ

  • 2. 무무
    '14.5.6 11:12 PM (112.149.xxx.75)

    이 글 정말 공갈 안 치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꺼내봐요.
    진심으로 글쓰는 분들에겐 필독 지침서라고 생각합니다.
    강추!!!!!!!!!!!!!!!!!!!!!!!!!!!!!!!!!!!!!!!!!!!!!!!!!!!!!!!!!!!!!!!!!!!!

  • 3. 흠....
    '14.5.6 11:13 PM (58.228.xxx.56)

    좋은 글....고맙습니다. ㅠㅠ

  • 4. 그네아웃
    '14.5.6 11:14 PM (58.127.xxx.110)

    노무현 대통령님..
    너무나 과분한 분이었습니다ㅠㅠㅠㅠㅠㅠ

  • 5. 티미
    '14.5.6 11:14 PM (116.121.xxx.52)

    정말 대단합니다.

    부드러우면서 강하셨던 분..

    아..너무 그립습니다.

    이런 분을 한번만 더 우리곁에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립네요.

  • 6. 무무
    '14.5.6 11:16 PM (112.149.xxx.75)

    글 쓰는 분들이 아니어도 어떻게 진심을 진심을 담아 전달할 것인가를 진심으로 고민했던 어떤 멋진
    남자의 글 쓰는 방법이잖아요.
    그게 이 지침서의 가장 큰 힘인 것 같아요.
    82에서 또 읽게 되네요 ^^
    다시 한 번 더 추천 빵~~~~~~~~~~~~~~~~~~~~~~~~~~~~~~~~~~~~~~~~~~~~~~~~~~~~~~~~~~~~~~~~~~~~~~~~~~~~~~~~~~~~~~~~~~

  • 7. 푸른솔
    '14.5.6 11:19 PM (121.185.xxx.93)

    좋은글 감사합니다.

  • 8. ..
    '14.5.6 11:21 PM (112.170.xxx.156)

    참 놀라운것은..어쩜 저리 앞서가는 트인 사고를 하셨는지...

    미국 대학 교수의 강의 저리가라네요.
    (미국에서도 좋은 글쓰기에 강조하는 부분이 저런 부분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우리나라처럼 겉치레식으로 문장을 멋있게 쓰면서 정작 내용은 없는걸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정말 실리를추구하는 대통령이었어요. 노무현대통령님.

  • 9. 기독교인
    '14.5.6 11:24 PM (124.146.xxx.27)

    글쓰기 전문가의 눈앞이 캄캄할 만큼 노통이 요구하는 글과 말의 수준은 높았습니다.

    독학으로 모든 것을 이룬 분...컴터와 아이티분야를 독학해서 청와대의 문서관리 프로그램 이지원을 직접 만들수 있을 만큼 엄청난 지적능력을 갖춘분...이 정도의 학습능력을 갖춘분...이만큼 강인한... 자생하는 생명력을 갖춘분을 우리가 만날 수 있을지....

    흉악한 독재자의 딸년은 대통으로 자기들 머리위에 올려놓고도 부끄러운지 모르는 자들이...고졸자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너무 배 아파했죠....이것이 이 나라의 자칭 주류라고 생각하는 수구부패친일파들...새누리당 얼치기들이 저지른 일입니다....결국 코너로 몰아 죽이기 까지...이 자들이 하늘을 두려워하지않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 10. 무무
    '14.5.6 11:25 PM (112.149.xxx.75)

    이 지침서(?)중 가장 맛깔 난 표현이

    6. 메인요리는 일품요리가 되어야 해. 해장국이면 해장국, 아구찜이면 아구찜. 한정식 같이 이것저것 다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해서 써야 하지.

  • 11. ..
    '14.5.6 11:26 PM (112.170.xxx.156)

    교보사이트에 가보니....평이 아주 좋네요..

    아이들에게 한권씩 사주시면 좋을것 같아요..몇번 숙독하고 싶은 책이라네요..
    저도 내일 구입해서 읽어봐야 겠어요.

  • 12. 대단!
    '14.5.6 11:30 PM (122.128.xxx.139)

    저 책을 갖고 싶다!

  • 13. 청사포
    '14.5.6 11:36 PM (112.187.xxx.174)

    원국이형도 멋진 분입니더

  • 14. 그네시러
    '14.5.6 11:36 PM (211.228.xxx.146)

    하...이런분인데...ㅠㅠㅠ

  • 15. 역사가
    '14.5.6 11:36 PM (175.125.xxx.88)

    역사가 다시 말해줄겁니다.

    아직도 그분이 당선되던 그날.
    눈에 선한데 ,,, ㅠㅠ

  • 16. 진홍주
    '14.5.6 11:40 PM (218.148.xxx.113)

    문장가였죠 연설마다 감동이었고요

    곁에 없으니 더 그리운분 5월이네요 그분이
    안계신 저분은 꿈을 쫒은 이상가였는데

    곁에는 이상가가 없네요....사람사는 세상을
    원했는데 어떤 세상을 꿈꾸었을까요

    저분이 있었다면 시민운동가 노무현은 팽목항
    에서 법률자문을 하고 띠를 두르고 같이 침묵
    시위했을텐데 그런 생각도 들고요....전 대통령
    노무현이 있었으면 저들이 이렇게 까지 국민이
    무시하지 못 했을 것 같아요

  • 17. 저에게 꼭
    '14.5.7 3:00 AM (218.237.xxx.16)

    필요한 글이었습니다.
    한번만이라도 우리에게 이런 지도자를 또 주실수 있을까요?

  • 18. 그래서
    '14.5.7 5:47 AM (175.210.xxx.243)

    탄생한게 이 명문이군요..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 져도 어떤 불의가 옆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 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 했습니다.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 놈아 모난 놈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친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의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 놈아 계란으로 바위친다. 그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들의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한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 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있고 당당하게 무리에 맞설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 19. 미ㅡ르
    '14.5.7 7:50 PM (219.248.xxx.10)

    그립습니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 . .

    너무나도 좋은글 이기에
    감사히 퍼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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