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 없는 사람, 왜 그럴까?|
참담한 일이 벌어졌을 때, 사건과 사고, 멍청한 대응에도 화가 나지만 주변 사람에게 더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동안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엄한 소리를 지껄이거나 전혀 공감을 못하는 것을 보면 소시오패스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 잘못봤다 싶기도 하고, 제법 괜찮은 사람도 저러니 우리나라가 어찌되려고 이러나 싶어 주변 사람때문에 더 절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대학원 공부를 하다가 가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근근이 다니고 있는데, 생활비를 벌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연세가 있으신 교수님이라 해도 생활비를 벌면서 학교 다녀본 경험이 없으신 분은 "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느냐"고 반문을 하시고,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학교 다니는 동안만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안되냐"고 되물으십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부모님 부담되실까봐 학비를 안 받는 착한 딸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주실 형편은 안되고 공부는 하고 싶으니까 제가 벌어서 다니는거지요. 연세와 상관없이 집의 어려움을 안 겪어본 경우, 생활비가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공감을 못 합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도 공감되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는 부모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겠는가 하는 말에는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마음이 이럴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 부모였던 적이 없는 제가 부모 마음을 온전히 공감한다해도 뻥입니다. 그러나 일요일 새벽 자식 잃은 어머니가 맨발로 우비 하나 걸치고 진도대교까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온 종일 눈물이 났습니다. 저희 엄마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 엄마도 그랬을 것 같았어요. 건강도 안 좋고 체력도 약하면서 사흘을 굶고 잠도 못자고도 내 딸 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게 해달라는 말을 하려고 몇 km를 휘청대며 걸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그 상황에 심하게 감정이입이 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개인 차가 분명 있습니다. 저는 엄마 아빠와 가까운 편 입니다. 그리고 저희 엄마 아빠가 딱 진도대교를 걸으시는 부모님처럼 힘도 없고 자식에 대한 사랑만 가득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라고 다 그런 모습은 아닐겁니다. 누군가의 부모님은 자식이 죽는다고 해도 신경쓰지 않을 것처럼 차갑고 먼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만약 부모님에게 사랑 받아본 적이 없고, 이름만 부모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면 세월호 학생들의 부모님의 모습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겁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의 친구,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의 장례도 찾아다닙니다. 장례식에서 사람 한 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도 장례에 안 다녀본 사람은 장례식장에 가면 귀신 붙는다고 가기 싫어하고, 장례식장에 가서 물도 입에 안 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잃은 상주의 아픈 마음에 전혀 공감을 못하는 거지요. 이런 사람의 경우 자신의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치뤄 본 적이 없는 경우에 특히 그럽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이 경험해 본 적이 없고 모르면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를 달리 하자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험이 없어서 입니다.
집안 환경이 편치 않아서 부모님의 사랑 같은 것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데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아낀다"라고 하는 말에 공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부모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 역시 부모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의 아픈 마음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피차 똑같은 것 입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인간 같지 않다고 손가락질하지 마세요. 나이를 얼마를 먹었든 못 먹었든 경험하지 못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또는 축복해주세요. 평생 살면서 힘든 일 한 번 없이 산 복받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는 어려움을 못 느끼며 살아서 모르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식객을 보다가 김강우가 친동생처럼 키우던 꽃님이를 재료로 삼기로 했을 때, 꽃님이의 눈물을 보고 미친듯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열하듯 울었는 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날 저의 감정이 폭발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친듯이 울자 제 옆에 있던 친구는 오히려 눈물을 그쳤습니다. 꽃님이의 죽음이 안 슬펐던 것은 아니겠지만 저처럼 오버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겠지요. 슬플 때 뿐 아니라 즐거울 때도 그렇습니다. 옆에서 "어머, 이 커피에서 브라질의 뜨거운 태양과 사람들의 땀내음, 그리고 잘 로스팅된 불의 향기, 커피 본연의 쌉사름함이 느껴져. 이 커피 너무 감동적이지 않니?" 라고 하면 커피 맛이 좋았다가도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까지 오버해서 감정을 극화시키고 싶지 않은 겁니다.
또 다른 이유는 누구라도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예전에 제 친구의 아버지가 중3때 돌아가셨을 때 였습니다. 친구 어머님은 실신을 하셨고, 친구의 어린 동생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제 친구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안 슬퍼서 아닙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정신줄 놓은 상태에서 자기라도 맏딸로서 정신차려야 된다는 생각에 슬퍼할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이처럼 옆에서 감정이 폭발을 하면 사람은 객관화 욕구와 차별화 욕구가 생깁니다.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정서 상,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성인군자는 자기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배워왔으니까요. 그러니 옆에서 자기 감정을 주체를 못해서 마구 드러내고 있으면 그 모습을 보면서 저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얼굴에 검댕이 묻은 사람과 묻지 않은 사람 둘이 있으면, 얼굴을 닦는 사람은 얼굴에 검댕이 묻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얼굴에 검댕이 묻은 사람은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고 상대방의 깨끗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얼굴에 아무 것도 안 묻은 사람은 검댕 묻은 얼굴을 보면서 혹시 내 얼굴에도 무엇이 묻지 않았나 싶어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 입니다.
이처럼 감정이 격한 사람 옆에 있으면 오히려 나도 지금 너무 흥분하거나 격한 것은 아닌가 싶어 침착해집니다.
더불어 그 사람처럼 감정이 요동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더 침착해 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반감도 생깁니다.
국가적 재난이 있으면 슬픕니다. 슬픈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강요를 해서는 안 됩니다. 슬픈 일이 있으니 다 굶어야 되고 놀러도 가면 안되고 휴일에 쉬어서도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꼬투리 잡듯이 "국가적 재난이 있는데 어떻게 놀러가서 웃고 있는 사진을 올리느냐, 공감능력이 없는 소시오 패스냐" 라며 몰아붙이는 사람들의 무서운 사회적 강압이 더 폭력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화가 나서 미치겠고, 이 상황에 전국민이 공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상황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고 생각도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나의 그런 격한 상태 (자기 혼자만 화 나고 감정이 있는 줄 아는)가 싫어서 옆 사람들은 차분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버하는 나 때문에 되려 반감과 객관화 욕구, 차별화 욕구가 커진 상태일 수도 있다는...
만약 내 주위 사람이 공감능력이 너무 떨어진다면... 그래서 그 사람에게 실망했다면... 꼭 두 가지를 살펴보세요.
그 사람의 인생이 너무 평탄했거나 또는 평탄하지 않아서 일반적인 (부모의 사랑)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혹은 지금 내가 너무 감정이 극한의 상태라서 그 때문에 오히려 옆 사람은 감정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