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별별다방 기사를 관심 있게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누가 저와 비슷한 고민으로 문을 두드리지 않나 내심 기다리다가,
제가 먼저 용기를 내봅니다.
저는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평범한 노인입니다.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재작년에 혼인을 했고, 작은 애는 아직 미혼입니다.
큰 애가 식 올릴 때 나이가 서른 여섯이었으니, 꽤나 늦어졌던 셈이지요.
팔불출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인물도 학벌도 그만하면 안 빠지고,
직업도 확실한 녀석이 무슨 이유로 장가를 못 드는 것인지,
제가 속을 많이 끓였었습니다.
요즘 처녀들은 무엇보다도 부모 재력이 든든한 상대를 찾는다던데,
우리 애는 그런 부모가 없어서 도무지 일이 성사되지를 않는가도 싶으면
죄스럽기도 했습니다.
도와주기는커녕 자식에게서 매달 생활비 보조를 받지 않은면 안 되는
형편이니 말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때, 마침 며느리와 인연이
닿았던 겁니다.
형편 다 알고도 좋다고 하니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요.
게다가 맞벌이를 하겠다고 하니, 제 마음이 더없이 가벼웠습니다.
친정이 넉넉한 듯해서 그것도 고마웠습니다.
이제껏 못난 부모 때문에 고생해온 아들인데 처가까지 짐을 얹어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한없이 다행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사람 욕심이 끝이 없는지, 며느리 잘 보고 나니
곧 손주를 바라게 되더군요.
며느리 나이도 서른 셋이면 적지 않은데 걱정이다 싶다가도,
더 바라면 욕심이지 싶기도 하고 ...
그러나 하늘이 도우셨는지, 곧이어 애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달 채워 예쁜 공주를 순산까지 해주니 내 일생에 요즘처럼 매사가
바라는 대로 술술 풀리는 때가 있었던가 싶었습니다.
사내녀석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던 건 아니지만,
서운한 마음도 잠시 뿐이더군요.
애기가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남편도 평생 처음으로 가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툭하면 애기 보러 아들네에 가자고 해서 제가 그걸 말리기가 힘이 들 정도였죠.
그렇게 무탈하게 애기 백일을 치르고 어느 날 아들 내외가 찾아와
우리 내외 앞에 앉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더군요.
며느리가 복직을 하게 되었으니, 애기를 맡아 키워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아침에 데려다놓고, 저녁엔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데려가겠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뭐라고 답을 해야 될지 몰라 멍해져버렸습니다.
우선, 며느리가 이렇게 빨리 복직할 줄을 몰랐었습니다.
그리고 복직을 하게 되더라도, 애기는 사부인이 키워주실 걸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부인은 저보다 다섯 살이 젊으시고 건강하신 편이라고 들었으니까요.
또 어느 집이나 시어머니보다는 친정 엄마가 돕는 것이 며느리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하고 손발이 잘 맞지 않나요?
그러나 제 속을 다 들여다본 듯이 며느리가 그러더군요. ‘
저희 엄마는 지금 오빠 애기를 보고 있어서요.’
그저 눈앞이 캄캄하기만 한데 남편의 반응이 한술 더 뜹니다.
그래라, 그래. 팍팍한 세상에 늙은 부모가 해 줄 게 그거 밖에 더 있냐.
나도 있고 하니, 걱정 말고.....
남편 말에 기가 막혀서, 제가 그만 할 말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건강에 자신이 없어서 나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요.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말입니다.
남편과 아들은 입맛만 쩝쩝 다시고, 며느리는 뒷꼭지에까지
찬바람이 쌩쌩 불었습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요즘 애기 키우느라 꼼짝 못 하고,
혹사당하는 할머니가 많다는 것을요.
누가 며느리 본다, 딸 시집 보낸다 얘기만 나와도 친구들이 우우 나서서,
애기는 절대 봐주지 마라, 너 폭삭 늙는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다가도 또 끝에는, 할 수 없이 봐줘야지, 어떡하느냐고 서로
위로도 하고요.
그러나 누군들 봐주고 싶어 봐주며, 보기 싫어 안 볼까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지 몰라도 저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큰놈 장가 들기 직전에 제가 갑상선 암으로 수술도 받았고,
약 먹고 있는 게 아침 저녁 한 숟갈씩입니다.
무릎도 안 좋아서, 자리에서 앉고 서는 것도 내 맘 같지 않은데
어떻게 애를 업나요.
남편이 돕는다지만, 그 말을 믿으면 내가 바보지요.
워낙에 술 좋아하고, 나다니기 좋아하는 사람. 평소 자기 먹은 물잔
하나도 치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식 키울 때도 기저귀 한 번을 거들떠본 적이 없는 사람인 걸요.
거기다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남편은 평생을 밖으로 돌며 제 속을 썩였습니다.
남들 하는 사내 짓은 다 했고, 돈 사고도 많았습니다.
속 안 끓이고 살게 된 지 불과 삼사년입니다.
제 나이 환갑 넘고서야, 마음 편히 친구 모임도 즐기게 됐고,
여행도 가게 됐습니다.
게다가, 이런 자유가 그리 오래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지금도 아픈 무릎 콱콱 쳐가며 친구들 뒤를 쫓아다니는데,
이제 곧 그마저도 어려워지지 않겠어요?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는 것 같이 살고 있는데 저한테서
그 한 가지 복마저 빼앗아 가야 하는 건지요.
말이 이삼년이지, 곧 둘째도 낳을 생각들이던데, 까딱하다가는
이삼년이 칠팔 년이 되지 말란 법이 없죠.
그러면 제 나이가 칠십입니다. 생각할수록 아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일 잘 아는 놈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그러나 거절을 해놓고도 며칠을 제 마음은 바늘방석이었습니다.
결국 봐줘야 하나, 어떡해야 하나 조석으로 결심이 변하더군요.
그러다 며칠 만에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결국 장모가 보기로 했다고요.
그 말 듣는데, 오히려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 더 답답해지는 건
또 뭔지... 지은 죄 없이 죄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입은 더 굳게 다물어졌습니다.
고맙고 죄송하다고 전하라는 말도 끝내 안 나오고 지금껏 보던
친손자는 어쩌시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 뒤로 곧 애들은 처갓집 가까이 이사를 갔습니다.
아침에 애를 맡기고 저녁에 찾는 생활이 시작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다 주말엔 장인장모 모시고 외식이며 나들이를 하고요.
가뜩이나 보기 어렵던 아들네가 이젠 더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새끼를 거기다 뒀으니,
마음도 거기로만 치닫는 게 당연하지요.
다 내 죄고, 내 탓이지요.
그렇게 두어 달 쯤 지났을 때, 오랜만에 아들 내외가 저희 부부를 찾아 왔더군요.
애기를 보니, 이 생각 저 생각이 말끔히 씻기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감히 죄스러워서 자주 보여달라는 말도 못하는 금쪽같은 내 새끼니까요.
그런데 아들 내외가 나란히 앉아 한다는 말이, 양쪽으로 드리기는
너무 힘들어서 당분간은 생활비를 못 드리니 이해해달랍니다.
매달 오십 만원씩 내놓던 걸 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애기를 봐주시는 장모님에게 매달 백 만원을 드려야 해서
도저히 여유가 없답니다.
거기다 며느리가 또박또박 덧붙입니다.
“엄마는 절대 안 받는다고 하시는데, 저희가 우겼어요.
나중에라도 올케 언니가 뭐라고 하겠어요? 외손녀 받으려고
키우던 친손자 내보냈다고, 두고두고 서운해하면 어떡해요?
우리 때문에 올케 언니가 사람 쓰게 생긴 것도 미안하구요.”
그러니까 딸한테 돈이라도 받아야 며느리한테 당당할 테니 엄마 낯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백만원씩 꼬박꼬박 드려야겠다는 얘기였습니다.
말문이 막혀버린 제 대신 남편이 대답을 했습니다.
알아들었으니, 그리 하라고요.
그러나 애들 보내놓고는 남편도 한숨을 내쉬더군요.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저는 너무 서운합니다.
우리 부부는 아들한테 도움을 안 받으면 생활이 안 되는 사람들이고,
사돈은 연금에다가 서울 시내 아파트 어디어디서 들어오는 월세만 해도
걱정이 없다고 그렇게나 자랑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며느리한테 큰소리하려고 딸한테서 백만원씩 꼬박꼬박 받고,
그 바람에 사돈은 먹고 사는 게 막막해진다는 게 말이 되나요?
친정 엄마 낯 세워주려고, 시부모 생활비를 끊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우리 형편에 오십만원이면, 먹는 걸 줄이든지, 약을 끊든지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둘째한테는 기대도 못합니다.
걔는 우리에게 손 안 벌리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판입니다.
그런 사정 뻔히 알면서 자식들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는지요?
며느리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 그렇다 치고, 따박따박 날
가르치려드는 며느리 옆에서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는 아들놈을 보니
한심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저런 걸 자식이라고 믿고 살아온 내가 더 한심했습니다.
생활비는 그 길로 끊겼고, 저희 부부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부끄러워 주위의 누구한테도 이런 말은 못했습니다.
사돈이 애 봐주니 너는 얼마나 좋으냐는 친구들 말에 그저 웃기만 합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제 속마음을 누가 알아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