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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변호인보고 친구와 심한다툼을 하였다는데.

아들.. 조회수 : 3,909
작성일 : 2014-03-09 23:34:19

중3된 아들과 변호인을 보고...저는 감동으로 울고...아들은  큰 감명으로 울고..

카페에 앉아 한시간정도 제가 아는선에서 얘기해준것 같아요...

사실 저도 잘 아는바가 없어서..그 뒤에 극장에서 친구와 한번 더 보고싶다길래 예매해주었고.

극장에서 상영안하자 다운로더받아 집에서 3번정도 더 볼정도로 아이가 받은 감동이 크구나 하면서

커나가는 아들이 대견했어요..

일요일인 오늘도 팀짜서 하는 수업이 있는데..오자마자..저에게 노대통령님에 대해 아는바를 설명해달라는

겁니다...어디까지 그 영화가 진실인지등등....

같은그룹친구들에게 영화얘기했나봐요...그 감동을 알리고싶어서..나름 베프들입니다..

강남의 전교회장부터 전교10등이내 아이들인데(참고삼아 적은거여요.)

그중 2명이 그 ㅆㄹ ㄱ같은 영화를 왜봤느냐...관종이다..심지어 엄마...ㅇㅈ가 뭐예요?하고 묻는데..헉..스럽더군요.

순간 저도 흥분해서..왜나면 그냥 몰라서 얘기한 정도를 지나친것 같아서요...

안좋게 대처했고 아이가 전화가지 해서 너 잘못알았다며 싸움을...서로 조사하여 낼 다시 얘기하자 햇다는데..

무지한 엄마가 아는것도 없이 감정에 치우쳐 제대로 설명도 못해준 상황입니다...

어떤식으로 얘기해주는게 현명할까요?

IP : 1.234.xxx.97
2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4.3.9 11:52 PM (1.247.xxx.247)

    변호인보고 감동받았다면서요 . 변호인 보셨으면 그대로 얘기하면 되죠.

    그런데 영국의 처칠이 인도 뱅갈지역의 식량을 모조리 수탈해서 뱅골지역 주민 700만명이 죽었다네요.

    일본군이 뱅골침공해 식량으로 사용할까봐, 미국이 식량원조하는것도 방해해서 끝내 식량원조 못하게 했다네요.

    2차세계대전때 독일이 죽인 유태인이 600만명인데, 처칠은 1년도 안되는 사이에 한지역 주민 700만명을 굶겨죽었네요.

    그렇듯이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신격화되는 사람은 있죠. 님의 고민은 매우 철학적인거라 뭐라 답변할말이 없네요.

    영화 변호인에서 봤던것을 잘 정리해서 주세요. 그 방법밖에없네요. 애초에 영화를 보고 감명받은거잖아요.

  • 2. ㅇㅈ가 운지인가요?
    '14.3.9 11:53 PM (125.177.xxx.188)

    그렇다면 그 애들은 강남 공부잘하는 일베인 셈이네요.
    그 애들과 얼마나 대화가 가능할지 회의적이구요.
    잘 만든 영화를 쓰레기라 일축하는 정도의 지성을 가진 우등생이라.....
    요즘의 추세를 보면 대화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을까 싶어요.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라 더욱 토론의 여지가 없어보여서요.
    아드님에게 노대통령의 실제 이야기 부분과 부림사건의 팩트를 알려주시고, (모두 실화입니다.)
    얼마전에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사면을 받았는데도
    이 나라에서 한 자리하고 있는 당시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고문조작된 사건이 아니라 강변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차근차근 알려주시는 게 좋을 듯 하네요.
    친구들과 굳이 얘기를 할지 말지는 알아서 판단하라 하세요.
    일베하는 애들이 어떤 성향인지, 얼마나 이성과 도덕성에 하자가 많은지 알려주시구요.

    변호인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는 일베라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 3.
    '14.3.9 11:56 PM (175.223.xxx.105)

    ㅇㅈ가 뭐냐고 댓글달려다가
    윗님 댓글보고 알았네요.
    애들이 일베하나본데
    베프인 원글님 아들이 아직 저런 단어를 모른다는게 불행중 다행이네요.
    아들을 저 애들과 떼어놓는게 시급하네요.

  • 4. 트윅스
    '14.3.9 11:58 PM (175.223.xxx.247)

    걔들은 겨울왕국 봤다에 피자한판 겁니다. 일베같은데 시각 교정이 불가하다보여집니다. 아드님 물 안들게 잘 이야기해주세요.

  • 5. ....
    '14.3.10 12:00 AM (1.247.xxx.247)

    그리고 위키사전을 발취해보면 이렇습니다.

    그런데 윗 님은 고등학생도 일베라고 배척하네요. 창피한줄 아세요,

    ㅡㅡㅡㅡㅡㅡㅡㅡ


    노무현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변호사, 노동운동가 출신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 정도 재직하다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인권 사건을 변호했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해 1988년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했다. 국민경선제에서 여당 후보로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고, 그 다음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대한민국 헌법 위반을 이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이후 16대 국회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주류 정당들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패배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면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응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검토하였고, 행정수도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행정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선회하였다. 이 외에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해서 평가가 엇갈린다.

    퇴임 이후에는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 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도 금전을 수수했다는 의혹으로 인하여 '포괄적 뇌물죄 혐의'[1][2] 를 받고 수사를 받게 되었고, 노무현도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2009년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였다.[3] 사망 후 일주일간 봉하 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4] 그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생애 초반
    출생과 수학
    1946년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노씨(光州)이다. 노무현의 위로는 형이 두 명 있었으나 맏형 노영현은 교통사고로 일찍 죽고, 둘째 형 노건평만 살아있었다. 둘째 형 노건평은 1968년 세무직 9급 공무원이 되어 10년간 지방 세무서에서 근무하였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5] 6학년에는 담임교사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했다. 그 뒤 1959년 2월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월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진영중학교 재학 당시 그는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는 외상으로 입학하였다[6] 한다. 중학교 1학년 말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일으키다가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6]

    청년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6] 1963년에 진영중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6]

    막노동과 사법시험 공부를 병행하였다.[6]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 12사단(을지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1973년 초등학교 동창인 권양숙과 결혼했다.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는 네 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한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판사로 임용되어 대전 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되었다. 그러나 7개월만에 판사직을 스스로 사퇴하였다.

    인권 변호사 시절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6] 이후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7]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6] 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6]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葬式)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6]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안기부 직원을 가르치다
    한편 노무현은 자신을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에게 광주항쟁 비디오와 노동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강의하였다. 안기부 직원 이화춘은 이러면 우리가 당신을 잡아가야 된다면서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안기부 직원들에게 민중, 노동운동 관련 비디오, 자료들을 태연히 보여주었다.

    안기부에 들어와 8년 동안 미국 자료를 수집하는 내근 업무를 하던 이화춘은 85년 5월 안기부 부산지부로 파견돼 법조를 담당하게 됐다. 전임자는 "'문제 변호사'가 네 명 있는데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당신의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이들 네 명은 노무현, 김광일, 문재인, 이흥록이었다.[8] 인사차 찾아간 이화춘과 점심을 같이하던 노무현은 4시간 동안 노동.학생운동 사태 등 시국을 논했다. 8년간 미국 자료만 들여다봤던 이화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노무현은 "당신같이 무지한 정보 요원은 처음 봤다. 당신 큰일났다"고 걱정했다. 李씨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자 盧변호사는 "교육을 받아야겠다"며 밤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8]

    “ 광주항쟁 테이프를 보여주더군요. 일어서려는데 盧변호사가 소설가 황석영씨가 집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란 광주항쟁 기록집을 주더라고요.[8] ”

    — 이화춘의 회고
    노무현이 보여준 자료들을 보고 안기부의 직원들은 당황해했다. 이화춘 등은 "이러면 내가 당신을 잡아가야 한다"며 뿌리치자 노무현은 "나중에 잡아가더라도 일단은 읽어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盧변호사가 전화를 걸어 독후감을 물었다.[8] 이화춘은 "광주사태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아 밤을 꼬박 새웠다"고 답했다. 이화춘과 안기부 직원들은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가 같이 운영하는 '노동문제연구소' 겸 변호사 사무실을 출입했다. 사무실은 늘 학생.노동자로 붐볐다. 李씨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 갔고, 그와 노무현은 서로의 애환을 챙기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8]

    정치 입문
    정계 입문 초기


    김영삼,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은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1988년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6]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9]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다. 한편, 1987년 12월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에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구절이 문제가 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았다.[6]

    청문회 스타로 등극
    1988년 11월에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 안전 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6]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번복하고 사퇴서를 거둬들이기도 했다.[6] 한편 이 무렵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9]

    3당 합당 거부와 야당 정치인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3당 합당 선언을 하였다. 이에 노무현은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노무현은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고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 등과 함께 민주당 (1990년)을 창당하였다.[10]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 당시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이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노무현이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며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다.[11]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 합당 참여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6] 1990년 7월 5일 민주당 중앙당 기획조정실장이 되었다.

    한편 노무현은 노태우 정부 하에서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했다. 이는 1990년 10월 4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으로 보안사로 연행돼 프락치로서 수사에 협조해 오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밝혀졌다.[12]

    1991년 10월 14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주간조선'이 게재한 ‘노 의원은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인권 변호사로 알려진 당시 노무현 의원이 부동산 투기의 전력이 있고 호화 요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등 재산 규모 및 형성 과정의 의혹을 보도했다. 노무현 의원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1년여 만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이 기사가 선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계량할 수 없으나 결국 노무현은 1992년 민주당 (1991년)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13] 1993년 민주당(1991년)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민주당(1991년) 후보로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정치 활동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이 1995년에 정계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 행태'라고 비난하면서 합류하지 않았다. 많은 의원들이 민주당(1991년)를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로 가면서 민주당(1991년)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주당(1991년)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를 창당하는데, 노무현도 이 통합민주당(1995년)에 합류하였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이 지역등권론을 주장하자 노무현은 이부영 등과 함께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을 비판하였다.[14]

    1995년 노무현은 민주당 부산시장 경선에 출마하여 황백현 부산진을 위원장을 13표 차로 누르고 [15]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16]

    1996년 4월 11일에 시행된 15대 총선에서 노무현은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1995년)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은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통추 활동기간 동안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하였는데,[17]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3김 정치에 한 번도 저항하지 않은 이인제 후보는 세대교체를 논할 자격도 없다"라며 이인제가 주장한 세대교체에 대해 강력 비판하는 뜻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18] 그러나 일주일이 흐른 후 노무현은 대선 출마를 철회하게 되는데, 이는 통추의 '노무현 대선 출마'에 대한 강력한 비토로 인한 것이었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1995년)의 대통령 후보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면서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이철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라며 신한국당을 선택하자고 주장하였고, 노무현·김원기·김정길 등은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라며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주장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입니다. 단순히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 데 대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쁩니다"라는 말로 과거의 일을 반성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형을 최종 선고 받기 직전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자진 사퇴하였다.[19]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서울시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20] 이후 노무현은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고,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국민경선제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21]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22]

    예비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당시 이인제 대세론이 있었고, 호남 출신으로 오랫동안 김대중을 보좌해온 한화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당시의 분위기는 노무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영남 출신인데다 새천년민주당 내에서는 이렇다 할 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다.[23] 거세게 불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무너지면서 광주 경선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정작 1위를 장담했던 호남 출신인 한화갑 후보는 3위를 기록했고, 영남 출신 후보가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24]

    노무현은 당시 연단에 서서 "광주시민 여러분들의 위대한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면서 감격적인 소감을 밝혔고,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盧風, 노무현 바람)'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연단에서 "동서화합의 큰 가능성이 열린 것으로 평가한다"며 "선전해 준 두 후보께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25] 이후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21]

    민주진보세력 대통합론과 위기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 세력 대통합론'(대통합론)을 내놓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 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젖히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대통합론의 취지를 전달하고 김영삼에게 지방 선거 후보 추천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 세력 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보이면서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의 노무현에게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한편 노무현은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26]

    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광역 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27]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28]

    민주당 내분 사태
    친(親)이인제 성향의 반노(反盧), 노무현의 집권 가능성에 회의적이던 비노(非盧) 의원들은 지방 선거에 참패하자 집단으로 신당 창당, 후보 사퇴를 주장하며 '노무현 흔들기'에 나서기 시작했다.[29] 노무현은 신당 창당과 재경선 수용 입장을 밝혔다. 한때 정몽준, 박근혜, 이한동 의원과 자민련 등이 신당 참여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30] 무산되었고, 정몽준과 이한동은 각자 독자적으로 당을 만드는 것으로 정리되었다.[29] 당시 천정배 의원은 8월 16일 국회의원, 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에서 반노 진영의 행동은 '경선 불복 행위'라고 말했다.[31]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 상황이 악화하였다.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32]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33]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34]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35]

    이때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21]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후보 단일화는 정 대표로의 단일화를 염두에 둔 민주당 내 반(反)노무현, 비(非)노무현 측의 요구에서 비롯하였다.[36]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37][38]

    국민통합21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민주당 김원기 고문은 노무현의 결단은 "이기고 지는 것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39][40]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시행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노 후보 측은 이날 승리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원칙과 정도를 지켜온 것이 국민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41]

    단일화가 되고 나서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를 역전한 직후 이인제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후 이회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는 등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2002년 11월 새천년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전국 농민대회'에 참석했다가 성난 농부들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았다.[42]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파기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지지 철회 발표문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국민통합21은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고,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43]

    노무현 후보는 설득을 위해 심야에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노무현은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과 함께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기다렸으나 정몽준 대표는 만나주지 않았고, 심야 회동은 결렬되었다.[44] 그러나 정몽준의 지지철회로 위기감을 느낀 진보 진영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노무현에게 표를 몰아주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난다.

    제16대 대통령 당선
    노무현은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역전극을 반복하다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57만 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이듬해인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선 과정에서 인터넷의 젊은 지지층을 만들어 이끌어냈다. 대통령 취임 전인 2003년 1월 14일, 대통령 당선자인 노무현은 "토론을 국정운영 방법으로 정했으면 한다"라면서 "토론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토론이 일상화되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45]

    대통령 재임시

    국정 방향
    이 부분의 본문은 참여정부입니다.
    취임 초 노무현은 노무현 정부, 즉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외교안보 분야와 정치행정 분야의 기조로 부패 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 개혁이 경제 분야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이 제시되었다. 사회 문화 여성 보건 분야로는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 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 국민 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등을 제시하였다.

    외교 정책


    2006년 베트남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직후 한·미·일 정상 간의 기자 회견 모습. 왼쪽부터 한국의 노무현, 미국의 부시 대통령,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외교 방식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표방하였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46][47][48]

    대미 관계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여겨졌는데,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 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 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 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었던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


    2003년 10월에 노무현과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함께한 모습.


    2005년 11월 17일, 노무현과 부시가 경주에서 정상회담 후 악수하는 모습.


    2005년 11월 18일,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부시와 악수를 하는 모습.


    2006년 9월 14일의 백악관에서 부시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노무현(왼쪽).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미국)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껄끄러운 궁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49]

    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하였다.[50]

    대일 관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한 노무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 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 언론 및 야당으로부터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 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대북 유화 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일본의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 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는 또 3월 23일에 일본의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하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날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성토하면서 외교적 갈등이 시작되었다.[51]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 신조 총리와의 양자 회담에서 동해를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은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의 한 예로 든 것을 언론이 전격 제안으로 보도했다"라고 해명했다.[52]

    미국의 UPI 통신은 '한국, 동해를 놓고 제안을 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명칭)에 대한 타협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53] 이 같은 제의는 외교ㆍ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돌출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은 국익에 적잖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대일 영유권 시각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54]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에 상처를 입혔다"며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고 지적했다. 네티즌들도 "한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적절치 못한 역사관 표명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었다.[55]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56]

    이와는 별개로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을 써 파문이 일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를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했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 한나라당 원희룡 최고위원은 22일 오전 상임운영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또한 "임기 중 과거사 문제를 쟁점화하지 않겠다"라고 밝힌 데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이런 약속을 함으로써 일본 내 극우들이 과거사 문제를 들고 나올 경우 정부의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57]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도 논평에서 "일제 강점기 만행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58]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가 '다케시마 문제'라고 질문에 언급해서 이를 받아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케시마'라는 언급이 한 번 있었다"면서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대답 내용은 '독도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는 점인데, 이 내용을 가지고 문제 삼아야지, 기자의 질문을 받아 대답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했다고 이를 왜곡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59]

    대유럽 관계
    대중근동 관계
    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 ~ 2004년 2월 24일)


    2003년 5월 14일,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에서 노무현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기자 회견하는 모습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60] 이튿날에는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또 이튿날에는 참여정부 조각 발표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61][62]

    한편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노무현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친인척 의혹 등 부적절한 발언이 거론되자 대통령이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죠”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보수 언론은 이를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구설수에 올렸다. 검사들은 토론회의 의도에 대해 "대통령께서 토론의 달인으로 알고 있는데, 토론의 아마추어인 검사들을 말로써 제압하려 한다면 무의미하다"는 비판을 했다. 당시 이 토론회는 권위적이고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탈권위적인 '토론하는 대통령'을 보여준 모습으로 평가받았다.[63]

    취임 초기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그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라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한편 3월 24일에는 원칙대로 운용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운용되거나 국회의원들이 유용해 온 특별 교부금에 대해 폐지 또는 보통 교부금에 통합하는 등 개선을 명령했다.[64] 그러나 2008년 12월까지 이러한 관행은 개선되지 않았다.[65][66] 4월 18일에는 노무현의 지시에 따라 청남대가 개방되고 모든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관하였으며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초기 어려움을 겪에 되었다.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자 그는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생긴다"[67][68] 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편 2003년 9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2004년 2월 25일 민주당은 참여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실패한 1년, 잃어버린 1년이라는 제목의 국정평가 보고서를 배포했다. 보고서에는 참여정부의 7대 비리의혹으로 불법대선자금 한나라당 5분의 1육박, 민경찬 펀드 의혹, 안희정 향토장학금, 양길승 청주 향응사건, 최도술 검찰소환 대책회의, 청와대 공식 계좌 통한 불법자금 세탁, 최도술 편법출국 등을 꼽았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11가지 자질부족 사례로 "대통령 못해먹겠다" 발언, 6.15 기념일 우중골프, 태풍 와중에 오페라 관람, '호남인 이회창 싫어서 나 찍은 것' 발언, 방미중 청와대 비서진 전화불통 사건, 청와대 사진사 오마이뉴스에 국가기밀 누출 등을 들었다.

    불법 관권선거 개입 사례로는 노무현의 양강구도 언급 등 총선관련 발언들과 군복무기간 추가단축 검토를 비롯한 행정부의 총선용 선심성 공약 남발 사례, 민주당 파괴공작, 총선 올인 등을 꼽았으며 이와함께 장관임기 보장 약속 파기, 대북송금 특검 수용과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자살을 비롯한 사례 21가지 등 총 43가지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1년을 혹평했다.[69]

    위기돌파와 신행정 수도론
    10월 청와대 총무비서관인 최도술이 SK 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터지고,[70] 10월 10일에는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등의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70]

    2003년 12월 29일, 국회는 여야 합의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른바 신행정수도법)을 통과(찬성167, 반대13, 기권14표) 시켰다. 이후 2004년 1월 14일 그는 연두 기자 회견에서 "지난 수십 년간 끊어내지 못했던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 특권적 유착 구조는 완전히 해체될 것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성큼 다가설 것"이라고 말했다.[70] 2004년 1월 16일에는 2003년 말에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신행정수도법을 공포했다.

    2004년 1월, 당시 딸을 순산한 노무현의 며느리 배정민이 개인 홈페이지에 150만 원짜리 유모차가 사고 싶어서 엄마, 아빠(노무현 부부로 추정)에게 사 달라고 졸라야겠다는 글을 올렸다. 이른바 '유모차 해프닝'이다. 그 뒤 항의가 일자 배정민은 홈페이지를 폐쇄했다.[71]

    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 ~ 2005년 2월 24일)


    브라질 대통령 룰라와 만찬장에서 건배를 하는 노무현
    2004년 노무현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하던 국회는 새천년민주당의 주도 하에 그를 탄핵하였고,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이 여파로 좌파진영이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탄핵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4년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당이 고발한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 있다고 인정하고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을 했다. 민주당은 이 조치를 근거로 노무현이 선거법 위반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며 야3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72]

    같은 달 그의 형인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언론 브리핑에서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남상국을 질타했고, 2004년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이 사건으로 노건평은 유죄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73]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남상국의 자살이 노무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을 펴면서 노무현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사건의 본질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마녀사냥하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형에 대한 인사청탁에 대해서 관련된 당사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한 부분에 대해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74] 그 당시 송영길 의원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탄핵반대투쟁에 참가하였다.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75][76] 그로 말미암아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 권한 대행의 역할을 맡았다.[76][77]

    그러나 노무현의 탄핵은 국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요인으로 적용되었다. 탄핵 당일인 3월 12일부터 3월 27일 보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약칭 탄핵무효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 집회가 열린다. 13일 날에는 가장 많은 인파가 촛불을 들고 탄핵 무효를 주장했는데, 주최 측 추산 10만, 경찰 추산 5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78] 한편 80여 개의 보수 단체로 이루어진 '바른선택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탄핵 찬성 집회도 3월 27일에 2000여 명(경찰 추산)이 운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79]

    이후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이 영향으로 '정신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였고, 4월 15일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단숨에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좌파가 중심이 되는 국회가 출범하였고,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었다. 이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그러나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80]

    새로운 여당의 탄생
    같은 해 5월 20일 노무현은 1당이 된 열린우리당에 "수석 당원"으로 입당하여 열린우리당은 공식적인 여당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11일에는 1월에 공포한 신행정수도법에 따라 국회는 신행정수도를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정했다.

    한편 8월에는 노무현에게 숨겨놓은 딸이 있다는 악성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된 H(49세) 씨에 대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의 증거 조사 결과 그런 사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81]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 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지만 '관습 헌법'이라는 일반에 생소한 개념까지 동원하며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자 수긍할 수 없다는 일부 여론이 있기도 했다. 어쨌든 이에 따라 그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게 된다.[82][83][84]

    같은 해 12월 16일 FTA 추진 지시를 내렸다.[85]

    취임 3년차 (2005년 2월 25일 ~ 2006년 2월 24일)


    2008년 몽양 여운형의 건국훈장증.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 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행정도시 특별법은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자, 몇몇 부분을 수정한 뒤 입안한 법이다.
    2005년 2월 14일, 그가 직접 고안한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e지원'이 노무현과 청와대 업무 혁신 비서관인 강태영 등 시스템 구축에 관여한 5명 명의로 특허를 출원해 특허를 취득했다. 2005년 7월 행정자치부에 시범 도입됐다.[86]
    2005년 3월 7일,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과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동북아 역사재단을 지시, 설립하였다.[87]
    2005년 6월 29일,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탄핵 심판에서도 소수 의견 공개가 의무화되었다.[88]
    2005년 8월 3일, 국가보훈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지난 3·1절 여운형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서훈에 이어 주요한 사회주의 활동가에 대해 재조명해 뒤늦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보수파의 반대와 훈격 논란이 일기도 했다.[89].
    취임 4년차 (2006년 2월 25일 ~ 2007년 2월 24일)


    2006년 11월 18일, 권양숙과 노무현(왼쪽에서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이 APEC 정상 회의 직후 오찬장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있는 모습.
    2006년 3월 23일, 노무현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네티즌들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갖고 포털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 생중계로 대국민 토론회를 진행했다. 사회 양극화 문제와 주요 국정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양극화, 함께 풀어갑시다' 등의 주제로 이날 오후 1시부터 네이트, 다음, 야후, 엠파스, 파란 등 5개 포털사이트가 생중계했다. 세계 최초로 시도된 인터넷을 통한 전자 민주주의 구현에 초석을 쌓은 '사건'이다.[90][91]
    2006년 6월 3일, 미국에서 4월에 귀국한 딸 노정연이 딸을 출산했다. 이로써 노무현은 친손녀 1명, 외손녀 2명 등 손녀 3명의 할아버지가 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원정출산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곱지 않은 점을 감안해 노정연 씨가 곽 변호사와 상의해서 한국에서 출산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92]
    2006년 11월 30일, 노무현은 여당 내 신당 창당 움직임에 대해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말이 신당이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신당 창당에 반대했다. 이어 "당적을 유지하는 것이 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탈당을 하는 것이 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해 열린우리당 사수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다시 지역당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역당으로는 어떤 시대적 명분도 실리도 얻을 것이 없다"라고 지적했다.[93]
    2006년 12월 6일 5.7%대의 낮은 지지도를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까지 재임했던 대한민국의 대통령 가운데 최저치였다.[94] 이는 그 당시까지 역대 최저치였던 임기 말 김영삼 전 대통령의 8.4%보다 2.7%포인트 낮은 수치였다.[94] 2006년 12월 헤럴드 경제는 여론조사기관인 '케이엠조사연구소'에 의뢰하여 노무현 정부에 대한 '최근 국정현안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를 설문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매우 잘한다'는 1.0%, '잘한다'는 4.7%로 집계돼 국정운영 지지도는 5.7%에 불과했다. 반면 '못한다'(37.0%), '매우 못한다'(27.7%)는 부정적인 답이 주류를 이뤘으며 '보통이다'(29.6%)는 응답도 많았다.[94] 이번 조사와 유사하게 시행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지난 5월 9일 31.0%로 정점에 달한 후 8월 16일 20.6%, 10월 24일 12.9%, 11월 14일 11.0%로 하락 추세를 보여왔다.[94]
    2006년 12월 8일, 기자 회견에서 북한이 "미국이 한국 내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는 것과 관련, "북한은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언론 보도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는 없다"며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것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95]
    2007년 1월 9일, 노무현은 그간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96]
    2007년 2월 22일, 그는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 이와 함께 한명숙 국무총리가 3월 초순께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한편 노무현은 이날 당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탈당' 대신 '당적 정리'라는 표현을 썼다.[97][98]
    취임 5년차 (2007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2007년 1월 23일, 신년 연설에서 그는 "권력형 비리는 없고 밀실, 측근 가신 이런 말도 사라졌다"라고 말했다.[70]
    2007년 2월 28일,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2007년 6월 3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약칭 참평포럼) 특강이 열린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강연하였다. 참여정부와 역대 정부의 성장률, 수출 증가, 주가 추이 등에 대한 지표를 조목조목 들면서 "어느 정부와 비교해서 실패라는 얘기냐"라고 반박했다. 이어 "아무런 전략도 없이 참여정부의 성과를 파탄이니, 실패니 공격하는 것만으로 우리 경제를 일류로 만들 수 없다"라며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 대선 주자를 비판하였다.[99]
    2007년 6월 8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에 대한 내용을 발언하였고, 한나라당은 노무현을 선거법 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였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중립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노무현은 그 결정에 대해 선거 중립 의무에서 "어디까지가 선거운동이고 정치중립인지 모호한 구성요건은 위헌"이며, "세계에 유례가 없는 위선적 제도"라고 주장했다.[100]
    2007년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기념일로 지정한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공식 기념식에서 노무현은 6월 민주항쟁은 국민의 정의와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점과 군사 독재의 시대를 끊어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민주 세력의 분열과 수구 세력의 기회주의가 6월 민주항쟁의 성과를 반으로 깎아내리고 있음을 덧붙였다.[101] 이어 기득권 세력과 수구 언론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음을 말하면서, "민주 세력 무능론까지 들고 나와 민주적 가치와 정책이 아니라 지난날 개발 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과거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수구 언론이 지난날 독재 권력의 앞잡이에서 지금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 세력을 흔들고, 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말하며 "1987년 이후 숙제로 남아 있는 지역주의 정치, 기회주의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구 세력에게 이겨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지역주의를 부활시켜서는 안 될 것이고 기회주의를 용납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102]
    2007년 9월 12일, 노무현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열린 '제주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통해 "균형 발전 정책은 참여정부의 상징적인 국가 발전 전략"이라고 소개하였다. "균형 발전 정책이 국가의 정의로운 목표로 뿌리 내려 어떤 정부도 이를 흔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수도권 규제 완화 등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고, 그에 따라 2단계 균형 발전 정책으로 세제 혜택 등 유인책을 제공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성공 여부는 그 지방의 역량에 달려 있음을 아울러 강조하면서 국토균형 발전 정책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추진을 강조했다.[103][104]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남북 관계 발전 및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105][106] 흔히 10·4 남북정상선언 또는 2007 남북정상선언으로 불린다.
    2007년 11월 8일, 노무현은 무안공항 개항식 후 나주 중흥리조트에서 열린 광주-전남 주요 인사 오찬 간담회에서 "호남 뭉치자는 말만 하며 저급한 말만 쓰는 호남지역 국회의원들과는 답답해서 일을 못해먹겠다"라고 말해 한동안 논란을 일으켰다.[107]
    2007년 11월 12일, 서울대 등 서울지역 7개 대학 학생의 노무현 임기 5년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의 65.4%가 노무현이 국정수행을 잘못했다고 답했으며 그 중 14%는 매우 잘못했다고 지적했다. 아주 잘했다는 평가는 0.9%에 그쳤다.[108]
    대통령직 퇴임 이후

    퇴임 직후


    봉하 마을에 위치한 노무현 사저
    2008년 2월 25일, 차기 대통령인 이명박의 취임식에 참석한 후 KTX를 타고 밀양을 거쳐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 마을로 귀향했다. 그는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꼽혔으며, 봉하 마을에 대한 관심이 누리꾼들에게 화제가 되었다.[109][110] 노무현의 귀향으로 김해시 봉하 마을에 지지자 및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관광지로 급부상했다.[111] 언론에 비친 모습을 통해 특정 누리꾼들에게 친근한 대통령으로 다가왔다. 또한 특정 네티즌들은 '노간지'라는 애칭을 붙여 줬다.[112][113] 노무현이 봉하 마을 귀향 이후 관심을 갖고 추진한 사업으로 오리쌀 농법과 화포천 정화, 생태숲 조성 등 친환경·친농촌 생태사업이 있다.[114]

    기록물 이관 논란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그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사저인 봉하 마을로 귀향하였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첫날에 노무현 정권 인사들이 고의적으로 청와대의 컴퓨터 시스템에 보안 장치를 걸어 새 정권이 시스템을 사용 못하게 막아 놓았다는 뉴스가 나왔고, 그 후 약 2주간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단순히 화면 보호기에 암호가 걸렸으며, 이는 남아 있는 'e-지원'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115]

    2007년 12월 20일, 남상국의 처 김선옥과 동생 등 유가족이 남상국의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제기하였다.[116] 이는 노무현의 당시 그의 실명을 언급하며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한 것이 원인이 됐다.[117] 당시 노무현의 공개적인 발언 직후 남상국은 자살했다.
    2008년 4월 20일,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위치한 노씨 문중 선산에서 열린 종친회 삼릉단 제종회 대제에 참석해 제관인 초헌관 자격으로 제를 지냈다. 같은 날 오후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118][119]

    2008년 7월,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 전국연합에서 대통령 기록물을 사사로이 봉하 마을로 옮긴 건에 대하여 검찰에 불법적인 '무단 유출'로 기록물에 관련된 전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고발하여 수사가 진행되었다. 기록원의 고발 조치에 대해 노무현 측 비서관인 김경수는 "청와대와 정부의 목적이 기록 회수가 아닌 참여정부 흠집 내기였음이 분명해진 것"이라고 밝히며 "참모진과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하겠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대통령 기록물 유출 실체 규명에 나서게 됨에 따라 신·구 정권 간 대립과 갈등이 격해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120] 한편 회수 조치를 하는 와중에 기록이 담긴 하드디스크(데이터)뿐만 아니라 노무현이 개인 자금으로 구매한 e-지원 시스템 서버(하드웨어)까지 반환하라고 요구했고, 노무현 측은 개인 재산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121] 이때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 5항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 및 전직 대통령이 지정한 대리인은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고, 그것이 비밀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출판하거나 언론매체에 공표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다만 이 조항은 2010년 2월 4일 개정되었다). 그러나 법률 내용에도 불구하고 외

  • 6. ㄱㄴㄷ
    '14.3.10 12:05 AM (180.70.xxx.178)

    먼저 부림사건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시고
    변호인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파악하시고
    그다음 ㅆㄹㄱ라고 생각하는 근거를 얘기해보라고 하면
    그애들이 억지를 부리는건지 아드님이 제대로 알고있는지
    단순하게 나오지 않을까요.
    영화를 보지도 않고 부모나 주위 생각을 여과없이 투영하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 7. ocean7
    '14.3.10 12:05 AM (50.135.xxx.248)

    ^^
    저도 윗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대화는 불가능 할거에요

    그냥 님의 아드님에게 박정희집안의 가계도/정계유착도 찾아서 보여주세요
    선인 노통님과 반대로 매국넘들의 리밋없는 악행이 악하면 얼마나 악할수있는지 잘 비교가 될것입니다

  • 8. 영화의 핵심은
    '14.3.10 12:06 AM (125.177.xxx.188)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어떤 계기로 부조리한 정치현실과 비인간적인 상황을 통해
    격렬하게 내적 변화를 일으켜 삶의 방향을 바꾼 이야기죠.

    이야기 구조는 신화적인 원형을 가지고 있는 굉장히 전통적이고 본질적인 영웅담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요.
    주인공이 위대해서 영웅인 게 아니라, 인간이 도전하고 변화하고 어떤 고양된 정신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영웅적이라는 거죠.
    흔히 헐리웃을 비롯한 상업영화는 이런 신화구조에서 차용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만큼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지극히 정통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고, 이런 부분을 노무현이라는 실존인물에 대한 미화라고 일축하는 건 바보같은 얘기에요.

    그럼에도 영화의 대부분은 그 실존인물의 삶을 상당히 정직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게 됩니다. 대중의 정서를 움직이는 강력한 본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이 영화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대중적 공감 자체를 거부하는 거라고 봐요.
    그게 이 나라의 일그러진 현실이구요.
    3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감동은 더 큰 거겠죠.
    역설적으로 그렇게 반복시키고 있는 주체들이 영화 변호인의 가치를 부정하고 폄하하고 싶은 것이고,
    일베를 통해 끊임없이 그런 이데올로기를 접하고 받아들인 애들은 충실하게 세대교체를 하며 그런 이데올로기를 계승하는 중이라고 봅니다.

  • 9. 트윅스
    '14.3.10 12:07 AM (175.223.xxx.247)

    정신이 썩으면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프랑스가 이차대전 직후 나찌 부역자 처단함에 물질적 조력자보다 정신 문화적 조력자를 더욱 엄하게 처벌한 것도 이에 기인한 조치였죠. 특히나 나찌편에서 글을 쓴 문학가 기자들은 예외없이 사형에 처했지요.

  • 10. 논쟁할 필요가 없을
    '14.3.10 12:12 AM (98.217.xxx.116)

    것 같은데

    굳이 논쟁을 하고 싶으시면 영화 변호인을 쓰레기로 보는 측의 논리도 세심하에 들어 보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wkCQr9T5dHk

  • 11. 네...
    '14.3.10 12:13 AM (1.234.xxx.97)

    답변들 감사하고 아들에게 82 이모들의 의견을 보여줄께요..혼돈기인지 브레이브 하트보고도 감동받고.

    공부만 하던 아들이 크나봐요...저도 다 괜찮은데 ㅇㅈ라는 단어를 물어봐서 급흥분하였구요...

    이뻐하던 친구들인데 그 부모들까지 순간.....

    전 단지 영화보고 감동받은건 아니고 그분을 생각하며 통곡수준이었으나 아는게 너무나 없는 무지한 그저

    한 인간이더라구요....여기 이모님들의 의견 직접 보여주며 존경받으셨고 여기 글들도 다 검색해 날잡아 보여

    주려 하네요..친구라는 놈은 아주 강하게 악질적 발언이 심했거든요...

    따박따박 따져보라고 해줄랍니다....낼 새벽에 깨워야 겠네요...

  • 12. 트윅스
    '14.3.10 12:13 AM (175.223.xxx.247)

    그런 면에서 보면 일베를 만든 국정원 담당자가 누군진 몰라도 꽤나 머리가 좋은 장기적 안목을 가진 새끼라 보여집니다. 원글님 참 훌륭하시고 또한 아드님도 그러하네요. 잘 커나가길 바랍니다.

  • 13. 앞으로
    '14.3.10 12:14 AM (112.169.xxx.227)

    프랑스는 예전처럼 다른나라 식민지가 되더라도
    프랑스인은 그나라에 협력하는 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없을꺼래요

  • 14. 논쟁할 필요가 없을
    '14.3.10 12:24 AM (98.217.xxx.116)

    결국은 북한얘기로 옮아갈 것입니다.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거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 15. 아이가
    '14.3.10 12:28 AM (1.234.xxx.97)

    아직도 어려서인지...대통령이되면 다 되는 세상인줄로 알더라구요...지지기반..세력없이 그 자리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한 영화처럼 말을 잘하셨는지도 묻길래...변호할때 대사들이 맛깔지잖아요...

    그래서 그것만큼은 자신있게 얘기해줬어요,,,원래 말씀을 저리 잘 하셨노라고..박종철까지 찾아보고...

    갑자기 집이 훅훅..난리가...

  • 16. ㄱㄴㄷ
    '14.3.10 12:38 AM (180.70.xxx.178)

    위에 점네개님 덕분에 잠시 노통의 추억에 젖어봅니다..
    참 미안하고 고마운 분..

  • 17. 우리는
    '14.3.10 12:53 AM (175.197.xxx.51)

    위키글 가져오신분 글에 자세히 있지만, 저는 다른 내용 링크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영화 변호인은 어디까지 실화일까?
    http://blog.naver.com/sinjeongcc/130182019877

  • 18. 그쪽 애들이 그래도
    '14.3.10 1:45 AM (98.217.xxx.116)

    인정해 줄 만한 거

    티비조선

    http://www.youtube.com/watch?v=yyd2RnFTDpQ

  • 19. 부모의 가치관이
    '14.3.10 6:23 AM (99.226.xxx.236)

    아이들에게 걸러지지 않고 흡수된 케이스같아요. 그걸 이른바 '세뇌'라고 하겠죠?
    상대방 아이들의 부모도 아마 원글님 아이에 대해서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볼거예요.
    그저...견해가 다른가보다. 생각하시고 끝내도록 하세요.

  • 20. ㄱㄴㄷ
    '14.3.10 9:32 AM (180.70.xxx.178)

    이 블로그도 꼭 보세요.
    길지만 사실에 입각한 내용이라 추천합니다.

    http://m.blog.naver.com/inizios/10180800260

  • 21. ..
    '14.3.10 9:48 AM (211.36.xxx.5)

    일베, 수꼴들의 역사에 대한 앎이 독재 부역 언론과 국정원이 써낸 환타지일 뿐이라는 사실이 문젭니다. 지금도 독재자, 독재를 미화하고 민주화 세력을 음해하는 소설들이 그들을 겨냥해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들 사이트에 접속할수록 세뇌가 시작, 공고화되는 수순을 밟습니다. 이미 ㅇㅈ를 말할 정도면 민주화 세력에 대한 ' 가상의' 적개심이 형성된 후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중시하는 팩트가 실종되어 피아를 구분하는 근거를 아예 차단당한 상태지요.
    노무현 대통령님에 대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들이 옹호하는 반민주화 세력들이 얼마나 더럽고 무능한지는
    한국 현대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알게 되니 차제에 강준만 교수가 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라도 권해 주세요. 일베들이 속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정상적인 현대사 책들이 많습니다.
    일베를 제외한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가 안티 일베라는 사실도 늘 기억해야겠죠. 일베는 모든 커뮤니티에 ' 죽음을 먹는 자' 들과 동의어입니다.

  • 22. 댓글들 중에
    '14.3.10 9:50 AM (121.138.xxx.87)

    얘기가 안통할꺼라며 그냥 나둬라 넘어가라는 말이 많을까요? 마치 국정원이 세뇌한 일베충들이 세뇌에서 벗어나길 바라지 않는것처럼. 깊이 발을 담그지 않은 아직 어린 애들에게는 정상적인 생각으로 돌아올수도록 대화를 많이 해야한다는 생각이드네요.(친구와의 토론이든 선생님이든 아님 생각이 훌륭한 친구의 부모의 설명이든)

  • 23. 윗댓글님
    '14.3.10 1:27 PM (98.217.xxx.116)

    열정은 좋이만 현실을 무시한 발언이시네요. 괜히 어린 학생들 간에 험한 꼴 나는 거 좋지 않습니다. 제가 위에 링크한 티비조선 프로 수준으로 웃으며 얘기하는 것 조차도 현실에서는 대단히 힘듭니다.

  • 24. 건너 마을 아줌마
    '14.5.6 2:19 AM (222.109.xxx.163)

    귀한 원글과 댓글들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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