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culture/newsview?newsid=20140301160405651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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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다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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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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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다 참나...
원래 이상하게 본인이 이쁘다고 착각하고 사시더라구요. 글 읽으면 그 허세와 자기애에 벙쪄요.
글은 참 잘쓰셨는데 사고방식이 완전 쉣이죠. 폭력을 사랑으로 착각하는거부터 어린시절 아버지 컴플렉스를 극복 못한거죠. 안타까와요. 자기최면에 사는 사람.
그게 노망인지?
남의 인생 그렇게 말하지 맙시다.
정말 몸이 잘 맞았는지 아닌지는 그 두 사람만이 아는 거 아닌가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할 수도 있겠죠. 항상 고상하게 문학적 정신이 나를 그에게로 이끌고 머물게
했다 이래야먄 하나요? 오히려 나이가 저만큼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솔직한 표현인 것 같은데요.
만약 서영은씨가 30대나 20대였다면 저 소리 했다간 한국서 못 살아 남겠지만 지금 서영은씨는
70이 넘었어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앞으로 살 날이 살아온 날 보다 더 짧은 사람이 그렇게
평하는 걸 누가 노망이니 욕할 수 있나요?
서영은씨로선 자기 인생이 살아 낸 자랑스러운 일인가보죠.
저도 글 읽으면서 그닥 새로 이해되고 몰입되진 않지만 저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선택과
삶이 옳았다는 걸 강변하지 않으면 안 될 수도 있고
저 분 용모만 좀 좋았으면 사실 저 정도 능력에 학벌에 손을 보니 손도 무척 예쁘던데 몸이
예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얼마든지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랑 연애도 해보고 했을텐데 자신의 자의식과는 다르게 여자라 용모가 중요한 여자라는
종 특성상 남자에게 주로 선택 당하는 입장에서 많은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거기다 자신의 수준에도
맞으면서 서영은씨가 엎어질만한 남자는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니 어쩌면 김동리씨 같은 문학적으로라도 자신보다 훨씬 나은 남자라야
존경하고 살 수 있었을 듯 해요. 어쨋든 김동리씨가
적어도 서영은씨가 생물학적으로 말고 여자로 살게 해주었으니 저런 말도 살아낸 인생도
자랑스러운가 보죠.
이번 주 다음 주 책읽어주는 이비에스 라디오 소설책인데요.
방금 전 6-8시까지 일주일 분 몰아서 다시 읽어주는 거 또 들었어요.
저도 이베에스에서 이 책을 선택한 것에 대하여 거부감이 들고 좀 그렇더라구요.
들으면서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이젠 아닌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ㅠ 모르겠어요, 진짜.ㅠ
중간에 작가와 인터뷰를 하는 데 '3인칭 시점으로 쓸 정도로 시간이 제법 흘렀다'라고 하는 말에 오랜 시간동안 자유롭지 못한 그녀의 사랑에 대해 연민을 느낍니다.
죽은 전처와 자식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신의 사랑은 자기혼자 간직하는게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리 자기가 사랑이라 주장해도
불륜은 불륜입니다
저 잔인한 폭력을 사랑으로 합리화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안그럼 본인 인생자체가 사기가 되는거니까요. 애잔하죠.
책보다는 상담치료를 받으셨으면 본인을 객관화해 볼 수 있었을텐데. 저 연세에 아직도 저렇게 사시니 휴.....
왜 저러는 걸까요?
문학 '소녀' 병이 평생 걸려서 곪으면 인생 저리 되시나요?
글이 곧 그사람이 아니라 사고방식과 말이 그 사람이란걸 늦게 알았어요
글은 허위가 많다는걸..
몸이고 뭣이고 간에
유부남과 사련이 나서 결혼했다는 게
뭐가 어떻다고..
못생긴 여자들이 불륜 주인공 되면 자기 미인 착각병이 드디어 보상받는다더니
대표 케이스
신경숙 + 이분..
서영은씨가 쓴 다른 책을 읽었는데
산티아고 여행에세이였는데
놀랍도록 자신의 내면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신앙에 대한 내용을
섬세하게 잘 써서 읽으면서 감탄과
한편으론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
그리고 신앙적으로 어떤 경지에 올라선거
같은 느낌도 있었고요... 비록 김동리의 숨겨진
여자로 수십년 살며 손가락질 받았지만
그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자전적. 글을
쓴 용기도 대단하거같아요
다른 인터뷰에선 김동리 선생 어디가 그렇게 좋았느냐는 말에
"에너지가 강했어요."라 했답니다. 하하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93100011&ctcd=C07
글쎄
좀 젊었을 때 읽었던 서영은 씨의 소설은
사랑과 자신에 대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미화라기보다 상식적으로는 추하고 비루한 자신의 사랑...그게 진실이었으니까... 가 아닐까요.
저도 이비에스 책 읽어주,,,, 들었어요,,,,
열쇠뭉치를 손에 쥔 노인은 여자를 데리고 그의 집 지하실로 데려간다. 금속 열쇠를 채워넣어야 열리는 문이 하나, 둘, 셋, 넷. 그 관문을 뚫고 등장한 방 앞에서 노인은 말한다. "이제 여길 써라." 비록 적막한 암자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리긴 했으나, 이제 노인과 여자는 부부였다.
1년째 이 집에 사는 여자는 곧잘 그 지하방으로 자신을 숨겼다. 노인은 이제 그 모습이 못마땅해 거실 옆 방 열쇠를 건넨다. 어렵게, 비로소 열린 그 방문 너머엔 온갖 희귀한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노인의 수집벽은 한밤중 나타날지도 모를 도둑에 대한 상시적 두려움까지 달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집은 불침범만을 위해 고용된 '작은 아줌마'가 상주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노인의 아침식사는 참으로 야단스러웠다. '큰아줌마'를 시켜 만든 잣죽을 먹는 과정이 무슨 의식을 치르는 듯했다.
문예지 기자였던 여자의 나이 스물넷, 세속의 부와 명예를 다 가졌던 노인의 나이 쉰넷에 둘은 처음 만났다. 서른살 터울의 이 커플의 결혼식은 전처가 죽은 1987년 여자의 어머니 제안으로 치러졌다.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김동리(1913∼1995)와 1983년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던 작가 서영은(71)의 '스캔들'이 소설 속 노인 박 선생과 여자 강호순의 이야기와 거의 일치한다.
남편이 세상을 뜬 지 19년 만에,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30여년 만에 서영은은 자전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출판사)를 최근 펴냈다. 소설은 여자와 그의 늙은 남편의 '이상한 결혼식'에서 시작해 남편이 쓰러져 휠체어에 앉은 순간까지 다루고 있다.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거리감만 유지하고 있을 뿐, 내용 모두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소설에서 '노인'으로 표현되는, 사실상 김동리 선생의 일상은 바로 살갗을 맞댄 아내의 근거리 증언으로 비교적 적나라하게 나온다. 노인의 거동을 보면 마치 실물 크기의 황금송아지가 이 집 어딘가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애지중지 모은 그의 1000여점 귀중품들이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은 그의 '휠체어' 이후 드러났으니, 그 천재작가의 황망했던 생의 일부는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소설은 여자의 인고의 세월을 무심한 어조로 담고 있으면서도, 잔혹한 인생을 칼끝으로 후비는 듯한 예리한 성찰로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뒤늦게 예상치 못한 결혼을 신문으로 확인한 노인의 전 전처, 그러니까 첫째 부인 소생 다섯 자식이 몰려와 생성시킨 그 짓누르는 분위기보다 여자에게 더 극심한 고통을 안긴 건 노인의 그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쓸쓸한 속살이었다.
전처 방 선생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자신 역시 대단한 스캔들로 노인과 재혼했던 방 선생은 생전 둘의 연애 사실을 알고 여자에게 당부한 바 있다. "박 선생 불쌍한 사람이야. 잘해줘." 여자는 그 말을 두고두고 곱씹어본다.
그 피나는 세월을 견디게 한 건 결국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에서 나온 힘이었을 것이다. 순종만 하던 여자는 어느 날 노인의 처신에 감정을 폭발시켜 부엌 설탕 단지를 집어던진다. 그때 여자는 이제 노인의 곁을 떠나도 홀로 설 수 있을 것 같은 자신만의 힘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불쌍한 노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결의까지 갖게 만든다.
김동리라는 큰 나무가 한국 문학에 드리운 그늘은 크고 깊다. 서라벌예대(중앙대 예대의 전신) 학장과 문예지 추천위원으로 활동한 김동리는 주요 작가들을 문학의 길로 이끌며 ‘김동리 사단’을 형성, 한국 문학의 대부로 우뚝 섰다.
그가 추천한 대표적인 작가가 소설가 박경리다. 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등단한 박경리는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박경리가 김동리에게 처음 보여준 것은 소설이 아닌 시였다. 박경리의 습작시를 본 김동리는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냉정하게 평가하며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했고, 이듬해 단편 ‘계산’으로 등단하게 된 것이다. 한말숙과 문순태·서영은 등도 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서라벌예대 제자군은 더 화려하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관촌수필』의 이문구, 『죽음의 한 연구』의 박상륭, ‘저녁의 게임’의 오정희 등이 모두 김동리의 제자다. 이들 중 이문구와 박상륭은 스승인 김동리의 샤머니즘을 자신만의 색깔로 재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에서 “박상륭과 이문구의 라이벌 의식은 문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것”이라며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은 ‘샤머니즘의 세계화’(박상륭)와 ‘샤머니즘의 움막 짓기’(이문구)라는 성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서른 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뤄낸 김동리와 소설가 서영은 부부. 1987년 두 사람은 결혼했고, 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동리는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중앙포토]
김동리의 연애사는 파란만장했다. 세 번의 결혼을 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의 작품만큼이나 세간의 화제가 됐다.
첫 번째 부인은 1939년 결혼한 진주여고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 김월계였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소설가 손소희(1917~87)를 만나면서다. 통신사 기자 등으로 일했던 손소희가 47년 서울 명동에 다방 ‘마돈나’를 열고 문인들이 드나들게 되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이들의 관계를 깊게 만든 건 6·25 전쟁이었다고 한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됐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한 김동리를 손소희가 자신의 집 안방 천장 위에 석 달 동안이나 숨겨준 것이다.
이후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 간 김동리는 손소희와 딴살림을 차리고, 이 사실이 부산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두 사람의 연애는 기정사실화된다. 소설가 이호철은 문단 야사를 연재한 글에서 “손소희는 이 일에 대해 ‘그 기사는 20%의 사실에 80%의 픽션이 섞여 우리의 결합을 세상에 광고한 격이 돼 운명을 수용하게 했다’고 밝혔다”고 언급했다.
서울로 돌아온 53년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하고, 66년 김동리는 첫 번째 부인 김월계와 이혼한다. 손소희는 김동리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김동리는 온전히 손소희의 남자로 남지 않았다. 이내 서른 살 연하의 작가 지망생 서영은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서영은은 박경리의 주선으로 등단 추천을 받기 위해 서울 신당동 김동리의 자택을 방문했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손소희가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고 “김동리 선생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는 것이 문단의 뒷이야기로 전해져 온다. 83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서영은의 ‘먼 그대’는 그들의 연애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87년 1월 손소희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봄 김동리와 서영은은 서울 정릉 봉국사에서 친인척만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린다. 김동리가 74세, 서영은이 44세였다. 이들의 결혼으로 세상은 한바탕 떠들썩했다. 95년 김동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8년간 공식 부부로 살았다.
손소희
소설가
여성 처녀자리 뱀띠
프로필 정보
프로필 정보
기본정보
출생
1917년 9월 12일(함경북도 경성)
사망
1987년 1월 7일
가족
배우자 김동리
데뷔
1946년 백민에 소설 '맥에의 몌별'
경력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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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사항
1983
소설가협회 운영분과위원장
1981~1987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1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1974
한국여류문인협회장
1960~1974
한국펜클럽 중앙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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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사항
접기
학력사항
1957~1961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문학 학사
~1936
영생여자고등학교
수상내역
접기
수상내역
예술원상
5월문예상
1960
서울시 문화상
서영은
소설가
72세 (만 70세)
여성
프로필 정보 작품활동
프로필 정보
기본정보
출생
1943년 5월 18일(강원도 강릉)
데뷔
1968년 소설 '橋'
경력사항
경력사항
접기
경력사항
2002~2006
추계예술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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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사항
2013
EBS라디오문학상 심사위원
2006
이상문학상 심사위원
2005
세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
2005
세계문학상 심사위원
2004
이상문학상 심사위원
이전 1 / 2 다음
학력사항
접기
학력사항
1963~1965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중퇴)
1958~1961
강릉사범학교
수상내역
접기
수상내역
1990
제3회 연암문학상
1983
제7회 이상문학상
저서 73 권
(엉슝네 註)
청색 글은 출처가 있는 인용문이고
검은 색 글은 기사 및 검색 자료를 읽은
엉슝네의 느낌을 써본 것입니다.
서영은 작가. (사진의 저작권은 경향신문에 있으며 인용 목적으로 위 사진을 사용함을 밝힙니다)
주말인 3.1절 오후에 올라온 서영은 작가 뉴스…
어느덧 고희를 넘긴 서 작가(71세)가 오랜 침묵을 걷고
14년 만에 신작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출간했다고 한다.
작가는 신작 발간과 때를 맞추어 홍보겸 안부겸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오늘 서 작가를 인터뷰한 이는 입심좋기로 유명해서
많은 사람이 언론인이라기보다는 방송인으로 알고 있는
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다.
유 기자의 서 작가 인터뷰는 인터뷰 기사의 교과서라할 만큼 잘 쓴 글.
그러나 그 제목 때문에 독자로부터 욕을 좀 듣는 기색이다.
요즘 세상은 댓글이란 게 있어서 기사와 기사에 언급된 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주관적 판단 외에도 그 정보에 대한 호불호와 객관적인 평가,
내지는 대중이 잘 모르는 기사 이면에 깔린 이야기며
혹은 소문까지도 아울러 총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서영은 작가 신간 출간 기사의 제목과 추천베스트 댓글
김동리 선생 집안의 내막을 잘 아는 듯한 사람이 달아놓은 의미심장한 댓글
비유하자면 인내천이 지고의 진리이던 1세기 전처럼,
요즘 세상은 인간만사를 투영할 수 있는 천지경이 곧 온라인인 것이다.
따라서 금일 유인경 기자의 서 작가 인터뷰는
그 댓글 비난의 강도로 보건대 참 잘 쓴 인터뷰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를 모두 욕 보이는 기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잘 쓴 인터뷰임에도 굳이 비난을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엉슝네가 보기에는 단지 딱 제목 한 줄이 부른 참화라고 생각된다.
왜 경향신문 편집부는 굳이 이 제목을 달았을까?
그것도 고희를 넘긴 노 작가에게 하필이면 이런 제목을 붙일 생각을
했다는 그 사실이 일견 어이없기도 하다.
항간에 여자 나이 60이면 예쁜 년, 못난 년 구분이 없다 하고
여자 나이 70이면 (머리에) 든 년, 안 든 년 구분도 없다 하고
여자 나이 80이면 (재물이) 있는 년, 없는 년 구분도 없다고들 하는데
어찌하여 굳이 70 평생을 살아온 노 작가에게,
그것도 그녀의 살아온 일생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우린 몸이 잘 맞았어요”라는 제목을 붙일 생각을 한 것인지.
비난을 예상하였으면서도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 역시 단지 하나일 것이다.
많은 클릭고 조회를 유도하려는 딱 그 이유.
알면서도 했으니 신간 홍보 작가 찬미 기사가 아니라
미필적고의에 의한 인터뷰이 욕 보이기라 해야 할 이번 기사와
많은 댓글을 읽은 엉슝네의 소감은…
세상이 아무리 광속으로 변해도 인지상정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사회와 관습을 유지하는 도덕윤리에는 넘지 말아야 할 금도가 있고,
그를 거스르는 행위는 반드시 많은 사회적 저항에 직면한다는 것.
비록 그러했더라도 경향처럼 제목을 뽑지 않았다면
별로 욕 들을 일이 없을 기사였을 것을…
1987년. 김동리가 76세, 서영은 46세 되던 해 결혼 2년차 부부시절.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서영은 작가와
고 김동리 선생의 사랑이 그러했다.
이미 서영은 작가 자신도 다 버리고 지웠다고 말하는,
김동리 작가와 서영은 부부에 관한 희미한 옛 사랑의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찾아 옮겨 본다.
서영은 작가는 건국대학을 휴학하고
직장에 다니던 24세 때 김동리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해가 1967년.
김동리 선생을 만나기에 앞서 서 작가는
현대문학지가 주관한 창작실기 강좌에서
박경리 선생님으로부터 소설창작 기법을 배웠다.
그리고 박경리 선생의 추천으로 습작들을 들고
서울 중구 신당동 김동리 선생댁을 찾아가
동내의 차림의 김동리 선생을 처음 마주했다고 한다.
김동리 선생은 26세에 교사였던 김월계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5형제를 뒀다.
아들들은 모두 뛰어난 영재였고 효자들이었다고 한다.
평온한 가정을 꾸리기에는 김동리 선생의 피는 너무 뜨거웠나 보다.
다섯 아들을 두고서도 김동리 선생은 6.25전쟁 부산 피난통에서
미모의 소설가 손소희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서울로 돌아온 53년부터 두 사람은 집을 얻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후 십수년 간 첫 부인에게 이혼을 요구하던 김동리 선생은 마침내 66년 이혼한다.
마치 흑백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한 장면처럼
첫 부인의 전부를 빼앗고는 처절하게 버렸다.
다섯 아들을 데리고 손소희 여사와 재혼했던 것.
김동리 손소희 부부
하지만 이 사랑도 영원하지 않았다.
이혼한 이듬해인 1967년이었다.
그해 초겨울 김동리 선생은 삐쩍 마르고 훌쩍 키가 큰
30세 연하 작가지망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주인공을 닮은, 그 처녀가 서영은 작가였다.
예상과 달리 김동리 선생은 서영은이 들고 온 습작을 추천하지 않았다.
“너무 수필같다”는 게 이유였다.
서영은 작가는 이듬해 바로 그 습작으로 ‘사상계’애 입선,
그 다음해에는 소설 ‘너와 나’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김동리 선생이 제 첫 소설을 보시더니 ‘이 소설은 너무 수필적이야.
다른 원고가 있으면 좀 가져와보지’ 하셨는데 그 분에게
두 번 다시 원고를 보여드릴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
제가 두 번째 원고를 완성했을 때 우리는 원고 얘기를 하기에는
겸연쩍고 쑥스러운 사이가 되어 있었어요.”
연애에 첫걸음을 떼면서 두 사람이 마음의 증표로
주고받은 선물은 책과 시계였다고 하는데 김동리 선생은
‘김동리 문학선집’을 한 질 건네며 첫 권의 안표지에다
‘일심영원(一心永遠)’이라는 휘호를 담아주었다고 한다.
(출처: 여성동아)
당시 월간문학 편집장이 소설가 이문구 선생.
이후 1973년 김동리·손소희 부부가 ‘한국문학’을 창간해
이문구 선생을 초대 편집장으로 발탁했고,
이문구 선생은 편집기자 겸 경리로 서영은을 뽑았다고 한다.
이문구 선생은 2003년 타계했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
이게 “김동리·서영은의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훗날 이문구 선생은 기술했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며 사람들은 항용 그럴 듯하게
포장들 하곤 하지만 알고 보면 속내는 있게 마련이다.
이미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는 선생과 서영은의 연애,
혹은 불륜은 당시 문단의 ‘공공연한 비밀’로 회자되었고
이내 손소희 여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손소희는 대범했다.
펜클럽 회장을 지낸 김시철 시인의 회고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손소희와 함경도 동향이다.
김시철이 김동리와 서영은의 소문을 거론하면서 묻는다.
“손 여사님, 어떻게 하셨기에 영감님을 밖으로 나돌게 합니까?”
손소희가 거침없이 대답한다.
“그래도 난 아무렇지가 않아요! 나 대신 귀찮은 일들을 덜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좀 꼴사납고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도….”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김동리·손소희·서영은의 기연)
혹은 이런 얘기도 떠돌았다고 한다.
손소희 여사가 부부관계를 싫어해
김동리 선생과의 잠자리를 멀리 했다는 것이다.
결국 받아들이기 힘든 남편과 20대 소설가 지망생과의 불륜을
그런 식으로라도 합리화해 자기 세뇌시키려던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비겁한 사랑에도 할 말은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집사람과 이혼은 할 수가 없어.
손 선생 참 좋은 여자대이.
그 사람과 만날 때 이혼을 한 번 했기 때문에 두 번씩 할 수는 없대이.
또 이혼을 한다면 나는 사회에서 매장당할 끼대이”.
김동리 선생이 서 작가에게 했던 말이다.
이후 연인은 ‘따로 또 같이’ 동거 아닌 동거 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키워갔다.
사랑과 욕망의 속성상 천국 같은 시간도 있었지만
지옥 같은 시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김동리 선생에게 알리지 않고 4박5일 동안 잠적해버렸다.
김동리 선생의 “어디 갔었나?”라는 추궁에 그는 “헤어져보려고요” 하고 답했고
곧이어 “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노”라는 말과 함께 눈앞에 불이 번쩍 했다.
(출처: 여성동아)
충격적인 사실은 서영은 작가가 소설에 담았던 것처럼
김동리 선생이 폭력을 휘둘렀다는 대목.
이에 대한 누리꾼들의 비난댓글도 다수 보였다.
‘그분의 목소리가 쉰 목 안으로 잠겨버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맞았다.
매를 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얼마 동안 때리고 맞는 소리만 났다.
코에서 피가 나왔다. 눈이 감겼다. 나는 울음 대신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격렬한, 온몸을 시원한 물처럼 흘러내리는 환희였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었다. 운명의 확인이었다.’
(‘내 사랑이 너를 붙잡지 못해도’ 중에서)
그리고 세월은 흘러… 20여 년 후.
병을 얻은 손소희 여사가 서영은 작가를 따로 불러 한 말은
“김동리 선생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
여사가 세상을 뜨고 몇 달 후, 오랜 연인은
서울 정릉 봉국사에서 마침내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74세, 서영은 44세였다.
김동리 서영은 부부의 결혼식 사진(출처: 구글링)
하지만 두 사람은 8년간 공식부부로 살았으나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3년에 불과했다.
서 작가는 뇌졸증으로 김동리 선생이 쓰러진 후
95년 6월 17일 세상을 뜰 때까지 5년간
충실한 간병인으로 살아내야 했기 때문.
결혼생활은 꼬박 4년. 부부싸움도 했다.
어느 해 겨울, 부부싸움 끝에 그가 집을 나와 한 호텔에 묵은 일이 있었다.
이 때 김동리 선생이 그를 찾아왔다. 다짜고짜 큰소리가 날아올 줄 알았으나
김동리 선생은 목욕탕의 수돗물을 이리 틀어 보고 저리 틀어보기를 몇 차례,
전혀 의외의 말문을 열었다.
“여기 따뜻한 물 나오니까 같이 목욕이나 하고 집에 가자.”
그는 김동리 선생과 정식 결혼생활을 4년 남짓 했는데
이런 그에게도 역시 결혼은 사랑의 시험대였다.
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스스로 이를
감상이라고 주입시키며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출처: 여성동아)
신간 포스터 앞에 선 서영은 작가. 여전히 젊어 보인다.
김동리 선생이 병석에 누운 뒤부터 향년 83세로 세상을 뜬 후.
서 작가는 선생이 살아 생전, 그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기의 로맨스를 혹독하게 치러낸 “그 징글징글한 사랑보다도 더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음해와 오해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전처 자식들과의 재산분쟁이 오해의 핵심.
경향 인터뷰에 따르면 서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함구했다고 한다.
아래는 인터뷰에서 “몸이 잘 맞았다”는 제목보다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대목이다.
유인경 기자가 “쏟은 만큼 김동리 선생으로부터 충분히 받았냐”고 묻자…
“(1초의 망설임 없이) 전혀요. 받을 생각을 안 했으니까. 바라지도 않았고요.
성격적으로 제가 그래요. 속으로 피 흘리면서 감내하는 거죠.
김동리와의 사랑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에요”라고 서 작가가 답한 대목.
또 김동리 선생은 생전에
“나는 다 가진 남자다. 첫째 부인은 자식을,
둘째 부인은 재산을, 셋째 부인은 사랑을 주었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는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단언컨대 요즘 세상에서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자는 결단코 없으리라.
어쨌거나 타인들에게 남겨진 두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으로 보건대
소설가로서 김동리 선생은 존경하지만 연인으로서 김동리는 참 나쁜 남자다.
특히 아래 대목이 그러하다.
그는 서 작가에게 늘 이 말을 습관처럼 다짐받았다고 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말임을 맹세합니다.”라고.
한 여인도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
일생 무려 세 여인으로부터 이런 맹세를 다짐받은 남자가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