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에 올라오는 글 중에 살이 쪘다든지 또는 가난하다고 하면 먼저 살을 빼라 직장을 알아봐라 하는 등의 냉혹한 답글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에게 '자유의지'란 것이 있어 온전히 개인을 탓하는 것이 옳을까요? 이에 대한 좋은 글이네요.
오늘날 눈부신 과학의 발전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과학의 영역이 아니었던 문제들을 과학의 영역에서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성과 중 하나인 유전자에 대한 연구는, 과거 한 개인의 개성이자 온전히 한 개체의 책임으로 간주되었던 많은 특성들에 유전자의 영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태어나기 전 부터 그러한 특성을 가질 확률을 매우 높게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유전자” 에서는 운동선수들의 능력에 유전자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지를 다루고 있으며, “동일하게 다른” 에서는 우리가 가진 정신적 특성인 신앙과 영성마저도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뇌과학의 발전은 뇌에 가해지는 자극이 자기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뇌에 자기장을 가함으로써 통증을 경감시키는 연구 가 진행되고 있으며, 경두개 직류전기자극법 에 대한 연구는 직류전기를 특정영역에 흘림으로써 우리를 쉽게 몰입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번 달에는 자극을 통해 우리의 인내력과 의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두뇌영역 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결과들은 곧 우리의 정신과 감정 역시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의식’을 연구하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일찌기 DNA를 발견했던 프랜시스 크릭 역시 이제 과학자들은 의식의 문제에 도전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습니다. . 지난 10월 발표된 한 연구는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의 환자의 뇌를 관찰하였고, 의식의 여부가 뉴런 간의 효율적인 정보전달 과 관련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영혼의 유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철학자 스티븐 케이브는 자신의 책 “불멸(Immortality)” 에서 영혼은 우리의 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존재할 것이라는 다른 이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죽은 뒤, 곧 뇌가 정지했을 때 우리의 영혼이 정상적으로 느끼고 볼 수 있다면, 왜 현생에서 뇌의 일부가 손상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 해당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만약, 인간이 이렇게 유전자와 환경과 같은 외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으며, 또 우리의 정신상태가 물리적인 뇌의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어떤 의미가 있을 지 물을 수 있습니다.
철학자 데니얼 데닛은 이러한 자유의지에 대한 도전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 이를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며, 물리적 대응관계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샘 해리스는 그의 책 “자유의지는 없다”에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논리를 이용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다시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습니다. 물론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앞서 우리가 보았던, 장기적 원인으로써 환경과 유전자이고 단기적으로써 그러한 생각을 촉발시킨 뉴런의 활동이며, 이는 곧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역시 어떤 다른 원인으로 부터 왔고, 물리적으로 그러한 마음이 들기 전에 이미 그러한 마음이 들도록 정해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논리는 과거 중세시대, 신의 존재를 증명 하기 위해 사용된 논리 중의 하나라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는 반증가능성의 조건에서 볼 때 어느 정도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주장입니다. 콘웨이의 경우, 한 쪽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자유의지 정리(zariski 블로그) )고 말했습니다. 즉 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것이냐는 한 개인의 신념, 또는 한 사회의 합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는 이 주장의 진위에 매진하기 보다 이 주장이 어떤 사회적 효과를 가지며 우리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주장의 영향은 먼저 인간의 자유의지를 찬양하는 주장들이 어떤 사회적 효과를 가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주어진 환경과 악조건을 이겨낸 인간의 의지와 고매한 정신에 대해 다수가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은 지성이 어느 단계에 이른 후, 특히 계몽의 시대 이후 인류가 꾸준히 반복해 온 일입니다. 여기에는 명백한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먼저, 이러한 찬사를 반복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악조건 속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반면,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 곧 자신의 환경과 불운에 의해 성공하지 못한 다수에게는 이들과의 비교에 의해 보다 심각한 좌절을 안겨줄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곧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가질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직 미래를 남겨둔, 어떤 악조건 속에서 자신을 다그치고 있던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도전의식을 앗아갈 것이고, 그 반면 현재의 실패 혹은 좌절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 두 주장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를 좌절과 우울감에 빠지게 하는 타인과의 비교의 범위가 오늘날, 특히 지난 몇년 간, 소셜네트웍의 발전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과거 한 마을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아름다움과 영리함은 이제 전지구적 열등감의 일부가 되기 쉽습니다. 또한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환경과 우연이라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요소들에 의해 개인의 성공이 더욱 좌우되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장하석 교수는 자신의 강연 마지막에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부모님도 참 잘 만났고, 특수한 상황도 많았고, 여러가지 운이 좋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온 모양이 여러분의 삶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두 주장에는 위와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두 관점 중 어떤 관점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계획할 것인가는 다시 자신의 의지와 상황에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힐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