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석 감독의 12월18일 개봉작
'변호인'을 보았습니다.
'변호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어느 정도 허구를 가미해 그려낸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당연히도
실존했던 '모델'이 계속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관객의 생각에 따라서
영화에서 서로 다른 느낌을 받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어쩔 수 없는 소재적 측면을 제외하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우선 이건 기본적으로,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이 영화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12년 12월이 아니라
적어도 시기적으로는 정치의 뜨거움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대선 이후 1년이 지난 2013년 12월에 개봉 날짜를 잡았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이렇다 할 정치적 주장도 없습니다.
있다고 해봐야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내용이 있을 뿐이고,
그에 뒤이어, 극중의 뒤틀린 국가주의자에게 내쏘는
"국가란 곧 국민이다"란 상식적인 일갈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스스로 속물 변호사로 자칭하던 주인공 송우석이
갑자기 국가보안법 관련 재판의 변호인이 되겠다고 자청할 때 그가 내뱉는 말이
"이라믄 안되는 거잖아요? 이런 게 어딨어요?"라는 것은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그때 그는 명확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비전을 가지고 임한 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상식조차 폭력적으로 제압되는 상황을 목도하고서
원칙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한 명의 뜨거운 인간으로서
더이상 물러서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 지금도 호소력이 있고 유효하다면
현재의 한국사회가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실존 인물이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를 (물론 쉽지는 않지만) 잠시 거두고 보면,
'변호인'의 이야기가 지닌 기본 골격은 특정 사건을 계기로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다루는
허다한 휴먼 드라마의 궤적에 고스란히 일치하기도 합니다.
영화적으로 볼 때
'변호인'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연기입니다.
송강호씨가 탁월한 연기를 선보여온 것은 오래 전부터지만,
이 영화에서의 그는 실로 대단합니다.
인물의 행동과 심리에 대해 전체적 맥락을 고려해서
최적의 위치와 강도로 연기를 하는 느낌이죠.
(설국열차-관상-변호인으로 이어지는 2013년 하반기의 송강호씨는
한 명의 배우가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만족감의 폭과 깊이에서 그 극대치를 드러냅니다.)
전반부에선 정이 가득한 너구리처럼 연기하고
후반부에선 무섭게 돌진하는 사자처럼 연기한다고 할까요.
말하자면, 묘기처럼 기기묘묘해서 팔짱을 끼고 탄성을 연발케 하는 연기가 아니라
캐릭터와 배우를 구분할 틈도 없이 의자에 등을 떼고 내내 빠져들게 한 후
영화가 다 끝난 뒤에야 뒤늦게 크게 한번 무릎을 치게 만드는 연기입니다.
배우로선 감당하기 쉽지 않은 무거운 짐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론 일생일대의 기회일 수도 있는 배역을 맡아서
송강호씨는 그야말로 후회없이 마음껏 연기합니다.
(이 영화의 송강호씨는 오래도록 되풀이되어 이야기될 것 같습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들도 다 좋은데,
특히 곽도원씨가 송강호씨와 법정에서 맞붙는 대목은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짜릿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장면을 보면서 '다우트'에서
메릴 스트립과 필립 시무어 호프먼이
격심하게 대립하는 명장면이 떠오르더군요.)
사실 '변호인'은 영화적으로 흠결이 있는 작품입니다.
재판 장면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드라마적으로나 캐릭터 묘사의 측면에서
한쪽으로 확 쏠리면서 영화가 지나치게 뜨거워집니다.
가뜩이나 실화의 무게 때문에
무겁고 격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서
일례로, 관객의 가슴에 즉각적으로 불을 지르는 고문장면들은
양으로나 묘사방식으로나 과하게 느껴집니다.
(시대가 엄혹했다고 그런 시대를 묘사하는 영화적 방식까지
반드시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특정 캐릭터들이 너무 일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변호인'은 관객이 판단하기 전에 영화가 먼저 판단하고,
설득하려 하는 대신 쏟아내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변호인'은 캐릭터 드라마와 법정영화로서
상당한 힘을 갖고 있는 영화인 것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캐릭터의 변화가 학습된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성격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뤄지는 것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법정장면을 액션영화 이상의 전투적 실감으로
내내 끌고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 인물이라면 송우석은 꼭 극중에서 묘사되는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또다른 발화점을 만나서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갔을 것 같습니다.)
무척이나 감동적인 영화이기도 하구요.
좌고우면 하지 않는 정공법의 돌파력이
관객의 마음을 뻥 뚫린 듯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고
곳곳에서 눈물이 솟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http://lifeisntcool.blog.me/130181906434
평도 좋고 이동진 기자가 "미리미리추천" 태그를 달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못 보고 기대만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런 저런 평을 보면 확실히 영화 자체가 잘 빠진 느낌.
송강호 연기의 완성이라는 얘기도 있고요.
송강호가 전도연과 "밀양"을 찍을 때 전도연에게 이렇게 연기자의 잠재력을 터뜨릴 만한
시나리오는 평생에 한 번 들어올까말까 한 거라고 했는데, 송강호 스스로 "변호인"은
스스로에게 밀양 같은 작품이라고 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듀나도 이동진과 비슷한 평을 하기도 했고 좋은 평을 한 평론가들은 많은데
굳이 이동진의 평을 가져온 건 이 이후의 이야기 때문입니다.
이 평을 보고 그러니까 정치적 견해가 뭐냐 야당이냐 여당이냐 스탠스를 확실하게 해라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비단 일베충 뿐 아니라 그 반대편에도 있었던 모양.
그래서 이런 글을 썼죠.
1.
'변호인'에 대한 댓글들을 읽고나니
다른 비난이나 조롱에 대해서는 몰라도,
아무래도 한 가지에 대해서는
제 생각을 말해야 할 것 같네요.
2.
네, 맞습니다.
저는 영화평을 쓸 때
제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견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종교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도
심지어 제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가급적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일부분 제 개인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일부분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제 개인 성향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특정다수를 향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게 문제가 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3.
딱 하나,
제가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에 대해 제가 제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인으로서 지난 7년간을 살아오면
적어도 영화에 대해서는 제가 뭔가를 회피하려 하거나
판단을 유보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쓰는 글의 스타일 자체가 공격적이지 않을 뿐입니다.)
물론 평하기에 좀 부담스러운 영화들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은 적도 없고
본 영화에 대해서 일부러 평하지 않고 묵살한 적도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라고 해서 우회하거나 위장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느낀대로만 써왔습니다.
영화평론가로서 제가 가진 직업윤리는 그것입니다.
4.
제 종교나 가족이나 거주여건이나 재산상태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듯이,
영화평론가로 세상을 향해 영화평을 쓰거나 말할 때
제 정치적인 견해를 밝혀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모든 영화는 그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일종의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인데,
그렇다고 영화평론가가 그런 주제들에 대한 개인적 입장을 일일이 밝혀야 하나요.
정치인이라거나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즉각 밝혀야 할 의무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5.
물론 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개인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투표를 포함한 여러가지 정치적인 행동도 하며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솔직하게 나누는 편입니다.
(심지어 자주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정치적 견해를
이런 자리에서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뭔가가 무섭거나 불이익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제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사람과 친해져도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종교가 무엇인지
미혼인지 기혼인지 지난 번 선거에서 누굴 찍었는지
거의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꽤 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당신들이 소리높여 정치적 견해를 말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제게도 제 정치적 견해를 말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에게는 제게 정치적 견해를 밝히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6.
'변호인'은 지극히 당연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극중에서 가장 울림이 깊은 대사로 강조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니 저도 '변호인'식으로 지극히 뻔한 상식을
다시 한번 말해보도록 하죠.
대한민국 헌법 제19조에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몇번째 조항인지를 몰라서 검색해보다보니
네이버 지식백과에 역시나 이런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담은 대목이 있더군요.
현행 헌법에서는 양심의 자유를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양심의 자유의 내용은 '양심결정의 자유'와 '침묵의 자유'로 나뉘어진다. 양심결정의 자유란 자신의 윤리적ㆍ논리적 판단에 따라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유를 의미하고, 침묵의 자유란 자신의 주관적 가치판단에 따라 결정된 양심이나 사상을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아니할 자유를 의미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심의 자유 [良心─ 自由]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불필요한 자리에서까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것을 강요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거세게 압박하거나 조롱하는 게 만연된 사회란
얼마나 끔찍한 곳입니까.
왜 당신들의 삶의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려고 하시나요.
7.
자, 그러니,
제가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인으로서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이제 한 개인으로서의 제 양심은 제게 맡겨두시지 않겠습니까.
제 양심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8.
시절이 워낙 하수상하니 '변호인'이 그랬듯,
저 역시 이런 지극히 당연한 글까지 써야 하는군요.
9.
그래도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제 개인적인 견해가 궁금하시다구요?
'변호인'에 대해 적은 제 글을 읽고도
어떻게 그걸 파악하지 못하실 수가 있나요?
그걸 읽고도 알지 못하시겠다면 혹시 그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문체의 글에만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영화 평론가한테 정치적 스탠스를 까라고 난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특히나 9번의 박력!!!!!
그런데 맨 위의 저 평만 봐도 굳이 까라마라 할 필요없이 이미 그 안에 다 들어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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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고
용기는 속에 있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펄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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