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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90년대, 방송반의 추억

깍뚜기 조회수 : 1,401
작성일 : 2013-11-05 17:18:31
간만에 가을 햇살 받으며 집에서 뒹굴뒹굴, 언제나 게으른 생활이지만 
역시 집에서 뒹굴며 게으른 게 최고네요! 역시... 
파라다이스에서 호의호식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어 ㅠ
.... 맞다고 해주세요! ㅋㅋㅋㅋ 

밀린 청소를 하다가(결국 안하고 이러고 있음) 고릿적 서류, 옛날 편지, 사진, 통신표(성적표 아니고 통신표ㅎ)
중등, 고등 모의고사 성적표;;;가 들어있는 종이 상자 발견! 중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가니 
음... 떡볶이 사먹은 기억과 방송반 활동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냥 이 두 가지만 했던 시절이죠. 대학교 시절하면 동아리 활동이 8할이었던 것처럼. 
1학년 2학기 시작하고였나? 여중 CA의 꽃이라는 방송반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하고 ^^ 
들어갔으나, 선배 언니들의 은근한 군기에 1학년이 하는 일이라고는 쉬는 시간에 열심피 엘피판 닦는 거랑, 
점심 방송할 때 교실에 올라가 잘 들리는지 확인, 운동장 조회 때 마이크 설치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산비탈에 있는 학교로 새벽마다 무거운 가방을 울러매고 다니는 중딩 생활. 
... 1학년 때 키가 멈추더군요 ㅠ

아, 멘트를 쓰기까지의 실력을 담금질하기 위해 
방송반에서는 매주 책 한권 읽고 독후감쓰기가 필수였어요. 
굉장히 개방적이고 좋으신 담당 선생님께서 정성스럽게 코멘트를 해주셨지요. 
주로 근대 소설과 서양 고전 소설을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 분노하던 저에게
선생님은 (성인의 언어로 말하면) 자아, 개인성이 부각되던 낭만기에 자유 연애라는 개인성의 발현이 
어떻게 시대 때문에 좌절되는지 그런 면으로 확장시켜보면 좋겠다...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어요. 
아주 한참 지나서야 이해했지만...
그 이후도 지금도 다독하는 스타일은 아닌데(책보단 인터넷! 테레비!) 그나마 그 때 소설을 많이 읽었네요. 

유명 곰탕집에서 깍두기 담그기까지 무닦고 썰기만 수 년씩 해야 그 담 코스로 양념 나르는 거 (버무리는 거 말고)
한다잖아요. 그렇게 눈물 쏙빠지는 수련기를 거쳐 CA의 꽃인 방송반의 꽃인 겨울 방송제 준비를 하게 됩니다. 
점심 방송 멘트쓰는 수준을 넘어 방송극 쓰고 콘티 짜고 우아 무대 만드는 거 보니 멋지더라구요. 
1학년들이야 눈치껏 잔심부름 하고 종이 정리하고 그랬지만...
졸업한 선배... 라고 해봤자 고1, 2 언니들이 막판에 와서 약간의 격려와 엄청난 잔소리+비판을 하는 게 전통이었는데
그렇게 까칠하던 중3 언니가 선배들에게 '이걸 대본이라고 썼어?' 왕창 깨지는 걸 보고 있자니 
쌤통이기 보다는 에휴 오금이 저릴 정도였죠. 

우리 기수의 멋진 방송제를 기약하며 
학년이 올라가자 기계 만지는 법도 배우고, 멘트 보조 하고, 신청곡 리스트 정리 등 
뭔가 실질적인 일들을 맡게 됩니다. 깍두기 써는 지난함과는 비교가 안 되는 뽀대다는 일이었죠. 
요일마다 교시 수가 달라서 4시에 끝나는 날에 5시에 종이 치면 절대 안 되는데, 
실수로 우리 기수하나가 종을 안 꺼서 대박 깨지는 건 기본 ㅎㅎ 그래도 후배 받으니까 언니들도 덜 혼대더라고요. 

드디어 장르별로 요일을 맡아 자기 방송을 하는 날이 오고 
우리는 후배들 받으면 절대 혼내지 말자 다짐했던 동기들은 실수 연발인 1학년들 앞에서 
화를 삭이느라 애를 썼고, 쫌만 과격해 보이는 음악판은 교무실에서 반려, 
서태지가 나왔을 땐 요일이고(요일별로 클래식, 가요, 경음악 ㅎ 이런 식으로 테마가 있는데)
 나발이고 죄다 신청곡이 태지 오빠 ㅋㅋㅋㅋ 
그 때 그만 틀라는 교장샘에게 맞서며 언론 탄압이 왜 나쁜지 처음으로 경험했습죠. 

드디어, 방송반 생활, 중학 생활을 마감하는 방송제가 다가왔습니다. 
유명인, 가수 축전을 따 들려주고, 간단한 콩트, 학교 뉴스 등 여러 꼭지가 있었으나
역시 하이라이트는 방송 드라마였습니다. 
사실 이 얘기를 하려고 82에 들어왔는데 ㅋ
정확히 어떤 연유로 드라마 주제를 결정하고 대본을 쓰고 연습을 했는지 디테일은 잘 생각이 안나는데, 
우리는 주저없이 '닫힌 교문을 열며'를 선택해 각색을 했습니다. 
영혼없는 백일장 전용 주제인 4월, 어머니... 이런 거에 4.19 얘기를 썼더니 칭찬해주신 국어샘의 영향일지, 
방송반 독후감을 쓰며 자연스레 체득한 감각일지... 암튼 저희가 그 때 영화를 봤을리는 없고
(이재구 감독 영화, 배우 정진영의 데뷔작이죠)
아마도 선배들에게 들은 전교조 이야기, 사계절에서 나온 책을 기초로 각색했던 걸로 기억해요. 
또 이제 어엿한 어른(?)이라면 내 주변의 삶을 폭넓게 돌아 보아야한다는 의무감과
야들야들하고 간지러운 소녀 감성을 죄악시하던 
역설적인(!) 소녀 중2병들의 영글지 않은 사회비판의식 때문이었거나요 ^^;; 

전교조 선생님들이 고초를 겪으시며 교복입고 함께 교문앞 싸움을 하고 해직당한 선생님과 얼싸안고 울던
그런 전교조 세대는 아니었어요. 사태는 약간 유화국면에 이르렀고 아마도 그렇기에 별다른 검열(?)없이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비록 전신 연기를 하는 연극은 아니었지만, 당시 선생님을 맡은 동기의 
떨리는 목소리, 대본을 쓰면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던 복잡한 현실과 그럼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뜨거운 감정. 
그것 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울렸는가는 모르겠는데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가 비지엠으로 들어갔던 것 같은데ㅋ 

그래봤자 저희도 졸업한 언니들한테 왕창 깨졌죠. 
'그것도 발성이라고 하는 거니? 릴테이프가 얼마나 비싼데 그걸 녹음용으로 써? 
 하여간 요즘 애들 너무 풍족해서 탈이야;;;' ㅜ

그런데 응답하라 90년대!!! 를 외치며 이렇게 추억타령이나 할 전교조 문제가 
현재 진행형이되었다니. 새 정부 들어서 노동자 탄압 강도가 높아진 거야 새삼스럽지 않지만
오늘보다 새누리 소장파들도 식겁할 '법외노조' 사태를 지켜보니 
여긴 어디고 지금이 어느 시대이며 나는 누구인지...
민변도 법적 근거가 없다고 입장을 표명했죠. 
이렇게 황당무계한 과거형 SF(?)를 통해 방송제를 추억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떻건 90년대 그 시절에 정말로 '응답'할 때라는 게 씁쓸합니다.     


IP : 180.224.xxx.119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삼순이
    '13.11.5 5:27 PM (218.238.xxx.178)

    깍두기님 오랜만이어요. 여중생 방송반 시절이라니...듣기만 해도(아니 읽기만 해도) 풋풋하군요.
    전 바닷가가 고향인데 고교 입학하면서 수도권으로 이사 및 전학을 하고 용감하게도 방송반에 도전.
    아나운서가 아니니 어찌어찌 붙어서 다니긴 했는데 어느날 급히 주차 안내 방송을 하게 된 것이죠.
    아나운서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마이크 잡기 싫다는 걸 선배가 끝내 시켜서 멘트를 몇 마디 했더니만
    다리 꼬고 앉아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선배 왈, "너 지금 생선 팔러 왔니?"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는데 그 때는 그 선배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럽던지.

  • 2. 깍뚜기
    '13.11.5 5:46 PM (180.224.xxx.119)

    삼순이님, 진짜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ㅎ
    선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했네요 ^^;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바닷가 고향이라고 다 수산업 종사자도 아닌데 말이죠!
    근데 방송반에서 주차 안내 방송을 하셨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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