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뒷걸음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뒷걸음치고 있나, 여러분은 어떻게 측정하십니까?
저는 이런 지표들을 사용합니다. 공직에 엄격한 도덕성이 무너졌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 이전 즉 2002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음주운전 하나 때문에 외교부의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 오르지 못한 분이 있었습니다. 김병준씨는 논문 한편을 두 군데 게재했다는 사실만으로 경제부총리 후보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공직자라면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이 발붙일 수가 없었던 시절이 노무현 정부때였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장상씨가 복지시설을 짓겠다고 투기와는 상관없는 지역에 친구들과 땅을 산 것이 문제가 되어 총리에 오르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이번 정부의 인사를 놓고 보면 김대중 정부 이전 즉 1997년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정원장과 대통령 독대가 이명박 정부에서 다시 시작됐으니 역시 이걸 거부한 노무현 정부 이전 2002년만큼으로 돌아갔고요. 국정원의 지역담당관제 역시 이명박 정부에서 부활해서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김대중 정부 이전 1997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역시 이명박 정부에서 중단된 금강산 관광이 다시 열리지 않는 것을 보면 1998년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전교조가 합법화한 것이 1999년인데 이번 달 23일까지 해직교사 노조원을 탈퇴시키지 않으면 불법노조로 한다고 정부가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면 1998년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방송이 대통령이나 정부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에서였습니다. 김대중 정부때까지도 방송뉴스는 땡어쩌구 뉴스를 했습니다. 뉴스시보 땡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뉴스가 대통령 뉴스였습니다. 전두환때는 땡전이었고 노태우때는 땡노였고 김영상 때 김대중 때 모두 땡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 찬양이 다시 살아난 방송은 2002년으로 돌아간 것이겠지요. 그러나 사회의 굵직한 변화를 완전히 외면하고 정권찬양 일색인 방송을 말한다면 이건 전두환 노태우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송에 비해 신문의 권력 비판은 지속되었는데 흔히 말하는 조중동 체제, 다시 말해 보수 내지 수구신문의 카르텔이 형성된 시기는 대개 김영삼 정부 하반기로 보고 있습니다. 신문 가운데 가장 부수가 많고 영향력이 크던 석간신문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에 밀린다는 생각을 하고 조간신문으로 발돋움을 한 1993년부터 1997년 사이에 정치권력보다는 경제력, 즉 광고시장의 중대성이 부각되면서 점차 논조를 보수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이어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 더불어 적극적인 정부 비판에 나서게 됩니다. 진보독자보다 수구독자가 많다는 판단에 따라 정파적 수구신문의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문에서 이런 체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1997년 이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사례에서 보듯 정보기관의 개인사찰 문제를 보면 박정희-유신정권까지도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1972년 10월 17일 선포된 유신 말입니다.
그러나 위에 말한 것들은 모두 정치적인 문제를 겸한 거대한 정책의 문제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는 얼마나 미끄러지고 있을까요? 경찰이 검문하면 그대로 응하십니까? 내 개인정보가 정보기관으로 흘러가 나를 위협할 거라는 불안감이 드십니까? 친구들에게 대화를 하면서도 이 말이 혹시 도청될까 걱정이 됩니까?
비단 이런 문제만이 아닙니다. 혹시 한국이 그냥 한국으로가 아니라 외국인에게 잘보이고 싶은 한국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까? 가령 전두환 시대에는 이런 구호가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보면 웃어줍시다.’ 왜 외국인을 보면 웃어줘야 합니까? ‘서로 보면 웃읍시다’ 이런 구호도 웃기겠지요. 웃든 말든 그건 개인의 자유입니다. 행복하다면 웃음이 절로 나겠지요. 그런데 그런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행복한 척 가장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웃으라고 강요하는, 캠페인하는 사회는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외국인을 보면 웃어줍시다’는 자국민을 외국인에게 잘 보이는 도구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큽니다. 한국사회는 안전하다, 우리는 친절하다, 이렇게 외국인에게 보이는 걸 의식하는 국가는 실제로 그 국가구성원들이 행복한지 친절한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외국인에게 잘 보이기만 바랄 뿐입니다. 외국의 시선을 의식하는 국가는 전시국가입니다. ‘외국인을 보면 웃어줍시다’는 정부 공익광고로 전두환 시절에 극성을 떨었고 그 후에도 ‘관광객에게 친절하자’는 구호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왜 관광객에게 친절해야 할까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게 좋습니다. 관광객에게든 자국민에게든 법과 정의가 지켜지면 됩니다. 굳이 관광객만을 나눠서 그들에게 친절하자는 구호를 국가가 공익광고로 돈들여 한다는 것은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공평하게 법집행을 하겠다는 기본정신을 망각한 태도입니다. 빨리 사라져야 할, 구시대적인 유물입니다.
그런데 이걸 줄이기는커녕 더 늘리는 정책이 생겨났습니다. 경찰청과 문화체육부가 최근 손을 잡고 관광경찰을 만들었습니다. 관광지마다 배치되어 외국인을 등치는 바가지 상혼이나 불법 영업을 단속한다고 합니다. 관광객이 신고하면 즉시 해결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국인이 불법과 바가지를 겪으면 곧바로 처리가 가능합니까? 그런데 왜 관광객을 위해서는 이런 제도가 설치됩니까? 관광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라고요? 그렇다면 한국인이 내는 세금은 안 중요하고 관광수입만 중요합니까? 그런데도 이런 황당한 정책이 이번에 101명으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경찰의 인력부족이 문제입니다. 경찰이 치안에는 신경을 안쓰고 공안에만 투입되어서 갈수록 사회의 약자들이 불안해할만큼 치안이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시용으로 관광경찰까지 빼낸다고 합니다. 그냥 경찰이 한국민 문제도 해결하고 관광객 문제도 해결하면 왜 안되는 것입니까?
정부비판하는 소리를 막으려는 공안경찰, 외국인 신경쓰느라 만드는 관광경찰에 인력을 빼앗기고 정작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치안경찰의 수는 점점 줄어듭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많이 겪은 시절 같지 않습니까? 네, 관광객에게 외국인에게 웃으라고 하던 전두환 시절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서서히 과거로 돌아가다보면 사람들이 시민으로 당연한 권리 주장에는 점점 더 무뎌집니다. 그렇게 해서 외국인 보기 좋고, 남 보기 좋은 질서가 유지되는 무서운 공안국가로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끌려가는 것입니다.
제발 이런 뒷걸음질, 멋있다고 좋은 정책이라고 포장하지 마십시오. 일상에서 전시국가 공안국가로 퇴행하는 상징적 행위들입니다. 일상에서 퇴보해버리면 무엇이 문제라는 의식조차 없기 때문에 바로잡는 것이 더욱 힘들어집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인식조차 흔들어버리는 이런 나쁜 절차, 여기서 멈추길 바랍니다.
☞ 2013-10-15 서화숙의 3분칼럼 팟캐스트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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