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리꽃이 한창이네요. 주황색에 검은 반점이 있는 이 꽃은 여름철 산야에서 제일 흔한 꽃입니다. 저희집 마당에는 종로 5가의 꽃시장에서 사온 나무에 딸려온 비늘인지가 싹을 틔워서 몇 포기가 돋더니 매년 너무 번져서 걱정인, 생명력이 아주 왕성한 놈입니다. 입 줄기마다 주아라고 불리는 씨가 맺히는데 그게 땅에 떨어지면 곧바로 싹으로 돋으니까요. 처음에는 외잎 한 줄기가 돋다가 4~5년 자라면서 구근이 두툼해지면 꽃을 피웁니다. 보통 다른 식물은 꽃이 피고 진 뒤에야 씨가 맺히는데 나리는 꽃을 피우지 못하는 어린 놈도 주아는 만들어내니까 번식력이 더 남다른 것 같습니다. 나리꽃의 구근은 옛날에는 먹기도 했다고 하네요.
저희집에 있는 것은 나리꽃 중에서도 제일 크고 흔한 참나리입니다. 나리꽃은 전세계에 100여종이 있는 데 그 중 10여종이 한국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하늘나리 땅나리 하늘말나리 솔나리 섬말나리 등 이름도 다양하고 색깔도 분홍부터 주홍까지 다양합니다. 땅을 향해 눕는 꽃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향해 얼굴을 내미는 꽃도 있습니다.
보통 나리꽃의 크기는 종류에 따라, 영양상태에 따라 30센티도 못되는 것부터 1미터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참나리가 제일 큰 종류에 속합니다. 저희집에 있는 것 역시 꽃이 피는 건 80센티에서 1미터 정도 되는듯한데 실상 산에 가서 보면 참나리꽃이 이 정도거나 더 적거나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참나리꽃을 2미터가 넘는 것을 강원도에서 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이만큼 자라기는 한다는군요. 그러나 사진 찍힌 것은 외국에서였지 한국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렇게 거대하게 장엄하게 피어난 꽃을 한국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4년 전 강원도 정선으로 아이들과 휴가를 갔다가 평창과 횡성 원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워낙 길치라 서울행이라는 도로표지판만 따라가던 길이라 정확히 어느 동네인지 이름을 모릅니다. 가파른 산에 있는 소떼를 본 다음, 횡성에 있는 안흥찐빵집에 이르기 전에 지나간 동네라 평창에서 횡성 사이거나 횡성에 있는 동네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정말 거대한 나무 같은 참나리가 슬레이트 지붕을 한 시골집 옆에 서있었습니다. 8월초 딱 지금 철이었습니다. 주황의 꽃송이가 무성했습니다. 차를 멈춰세우려다가 고속도로가 막히기 전에 국도에서 원주-서울간 고속도로 올라타야한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안흥찐빵집에도 들러야했으니까요.
어찌나 장엄하던지 오는 내내 그 꽃 생각만 했습니다. 곧 다시 여름철에 그 길을 차로 달려서 꼭 그 모습을 다시 보겠노라 했지만 지금까지 실행을 못했습니다. 그 후로 영월 평창 계속 강원도로 휴가를 갔으면서도요.
허버트 조지 웰즈가 지은 소설 중에 ‘담장의 문’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다섯살 때 길다란 담 사이에 초록문을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가지요. 거기에는 정말 마음 편안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고 강아지처럼 순한 표범도 있고 아름다운 소녀도 있었습니다. 꿈결 같은 행복한 시간이 지나고 그곳을 벗어난 소년은 다시 그곳으로 가보려고 하지만 이상하게 그 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자라면서 몇 번 그에게 그 문이 나타나기는 했는데 그는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거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 문을 봐도 들어가지는 않지요. 나이가 들어서 그는, 왜 그 문을 그냥 지나쳤을까,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어쩌면 사소한 것이고 그 문이 그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기쁨과 편안함을 주던 곳인데 라는 생각을 하지요. 그리고 얼마 후에 그는 이 문을 다시 찾았는데…단편소설이니까 한번 직접 읽어보세요. 오늘 칼럼을 쓰려고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영어로는 전문을 소개해놓은 곳도 있더군요. 하하하
사실 오늘 이야기는 저 소설의 전체 주제와는 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이만난 문 속 세상이나 제가 본 거대한 참나리꽃처럼 우리는 살다가 어느 순간,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만큼 놀라운 광경을 보고 놀라운 사연을 겪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순간은 사람들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지요. 나중에 곰씹을 때도 다른 아무 생각 없이 오직 그 순간만 생각하게 하는 적멸감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적멸의 순간을 많이 느끼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공의 시간, 아무 생각도 없는 시간, 고요의 시간, 평화로운 시간. 그래서 제가 겪은 신비로운 장면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제 휴가들 가실텐데요. 무엇을 느끼자, 보자, 그런 각오 없이 그냥 자연 속에 던져져서 어느 순간 문득 이런 놀라운 장면을 부딪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모두 매일 조금씩 더 고상하게 삶을 살아봅시다.
☞ 2013-8-1 서화숙의 3분칼럼 팟캐스트로 듣기
http://news.kukmin.tv/news/articleView.html?idxno=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