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달이 뜨는 곳, 강릉 경포대에 가면 밤하늘의 달뿐 아니라 호수와 바다, 임의 눈동자와 술잔에 비취어 뜨는 달을 볼 수 있다. 전라남도 화순의 어느 작은 사찰에는 지상에 내려온 달처럼, 별들이 석탑에 내려와 자리하고 있다. 하늘의 시나리오를 가지고서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운주사, 그 수수께끼 절에게 다시 다가간다.
지금까지 봐왔던 사찰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사전조사를 통해 운주사가 어떤 곳인지 대략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특이했다. 불상들은 스스로 서있기보다 큰 돌덩이를 등받이 삼아 기대어 서있는 게 많았고, 석탑은 군병들이 도열한 듯 나란히 서있었다. 그 중에 ‘원형다층석탑’을 보고선 참았던 웃음을 ‘빵’ 터뜨리고 말았다. 정교하게 깎아 만든 탑만 보다가 밀가루로 반죽해서 만든 호떡을 겹겹이 쌓아 올린 듯한 모습을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푸핫, 푸하핫”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에는 석탑뿐 아니라 곳곳에 돌부처들도 있다. 그런데 이 돌부처들도 조금 익살스럽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파인 만큼 길쭉한 코만 도드라져있는 불상들. 불만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무표정한 것 같기도 하고,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 곤란한 표정인 것도 같고…. 개그맨들이 자신들은 웃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웃게 만드는 것처럼 표정 없는 불상들은 그렇게 중생들을 미소 짓게 하고 있었다.
기자가 불자가 아니라서 돌부처와 석탑을 향한 경건한 마음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웃음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운주사가 무작정 웃어 넘길 수 있는 곳은 결코 아니다. 설렁설렁 만든 것 같은 돌탑과 돌부처 안에 그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특히 ‘칠성바위와 와불’은 밤하늘의 별들을 지상에 구현해놓은 유물로서 하늘의 깊고 오묘한 뜻을 담고 있을 것만 같다.
부처님이 좀 많이 못 생겼다. 중생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인 듯한 운주사에는 원래 일주문이 없었다. 천왕문도 사천왕상도 없다. 한마디로 격식을 차리거나, 세속과 성스러움을 나누고 구분 짓는 그 어떤 상징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느 절과 다름없이 일주문도 있고, 운주사 안내지도에 보면 있지도 않은 천왕문도 그려놓았다. 사천왕상도 지으려고 그러나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 사찰의 모양새를 갖춰가니 주지스님은 좋을지 몰라도 운주사를 창건했던 사람과 감독관도 좋아할까싶다. 운주사는 원래 절 같지 않은 절이니까.
운주사의 불상은 법당 안에 안치되어 위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야외로 나와 중생과 더불어 햇볕도 쬐고 궂은 날에는 비바람도 맞는다. 부처님 가부좌한 다리를 간지럽히며 크고 작은 돌탑을 그 위에 촘촘히 쌓아올려도 넉넉히 이해해주는 그런 부처님들이 모여 있는 곳이 운주사다. 정교함보다는 소박함과 다정함이 느껴지는 운주사를 파격의 조형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 다시금 ‘격’을 갖추는 건축물이 들어서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돌부처 이야기를 좀 더 하자.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돌부처와 운주사의 돌부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얼굴모양도 모양이지만 우선 덩치의 차이가 큰 것 같다. 보통의 불상은 굉장히 입체감 있고, 아기 살처럼 통통한 편이다.
그런데 운주사의 불상들은 작대기처럼 키만 크고 말랐다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깡마르고 못생긴 부처님을 만나니 문득 기독교 경전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가 생각난다. 예수님의 외모 또한 만만치가 않다. 구약성경을 보면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나이까’ 또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되어있다.
어쩌면 중생을 구원하는 분은 높직이 앉아 예배를 받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낮고 낮은 모습으로 중생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진리를 깨우쳐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많은 불상과 석탑들은 누가 왜 지었던 것일까.
출처: 글마루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