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이모님들 안녕하세요?
저는 이십대 중반의 한 직장인이에요. 사실 직장인이라고 하긴 거창하긴 하지만...
제가 친언니가 있는것도 아니구, 정신적으로 의지할만한 언니 내지는 이모님이 안계세요.
그래서 제 오래된 고민을... 여기에 써서 도움말씀을 받고 싶어서 글을 차근히 써내려갑니다.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는 9살 차이가 났습니다. 어머니 22살 때, 한 대기업 기술직으로 들어간 31살의 아버지를
지금 저희 큰엄마 주선으로 만났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전라도 시골에서 6남매집 장녀였고, 아마도 추측하기로는
시골에서 쭉 사셨던지라 서울생활에 대한 동경도 있구, 장녀로서 집안을 살려야한다 하는 마음이었다기 보다는
서울에 취직하고 생활하고 싶어서 올라오신듯 했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로도 일하고 들어와서
적적한 자취방이 싫어서 가정을 꾸릴 결심 하셨다고도 했구요.
아버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집안 이끌 대학생인 큰 형 학비 댄다고 20대를 꿈 같은거 펼칠 새 없이
그냥 착하게만 돈벌면서 지내셨고 기껏 그 돈 벌어오면 본인한테 쓰시기 보다는 (물론 사소한 기타치고
몸가꾸는 멋 정도는 부리셨던것 같아요) 집안 살림 보태달라고 당시 시집살이 하시던 큰엄마나
할머니 드리면서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20대를 사셨다고 합니다.
암튼 결혼하실 때가 되어서 두 분은 만났고, 그리 길게 연애하진 않은중에 덜컥 저를 가지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히 결혼하게 되셨는데 아마 엄마는 그 때 나이가 너무나 어리기도 했고 그저 가난한 시골집
딸이었으니 미처 준비됐던게 없으셨고, 자연히 결혼 혼수나 예물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저희 친가에서 엄마가 예쁘지만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할머니께서 워낙 독실한 기독교인이셨고
엄마 아버지도 사랑하니까 결혼을 무를 생각이 없으셨으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난게 저구요. ^^
엄마께서는 결혼하시고 나름 열심히 사신 것 같아요. 그 어린 나이에 할머니 모시고 단칸방에 네식구가 살아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미싱하고 부업하면서 쌈짓돈 버시고, 같은 동네에 저희 할머니와 큰엄마가 계시니
그냥 생활이 웰컴투시월드...였겠죠 ㅋㅋㅋ 사생활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으셨을거구.
아무튼 제가 어느정도 말도 하고 걸음을 뗀 후엔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엄마는 다시 일을 다니셨어요.
그러다가, 제가 다섯살쯤 엄마께서 회사에서 알게 된 분이랑 바람이 나서 도망가셨다고 합니다.
(저도 이걸 20대 초반에서야 엄마가 집을 나가시고 난 후에 들었어요) 제일 안쓰러웠던건 아빠도 사업상
아는 남자분이었다는거... 정황은 자세히 쓰지 않겠고 결국 할머니, 큰엄마, 아빠 이렇게 세 분이서 도망가신 곳에 가서
엄마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때의 기억은 제가 머릿속에 남기 전 아주 어릴때라 없지만 아마 제 무의식중에 있겠죠.
두 분이서 새 살림을 차리려는 목적으로 도망가신거였고, 다시 돌아오게 된 건 다름아닌 그 상대 남자분이
알고보니 전과있는 분이어서 -_-; 엄마를 설득해 모셔왔다고 합니다.
그 뒤로 엄마 아빠는 새다짐을 하신건지. 사실 위에 문단 얘기는 제 성장기때는 몰랐던 얘기지요.
그래서 7~8살때 엄마 아빠가 돈을 모아 청약통장으로 서울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작은 아파트를 사게되고
잠시 엄마가 일을 쉬고 집에 계시면서 간식을 해주고 숙제를 봐주시곤 했다는 좋은 기억이 남아있어요.
부엌 식탁에서 제가 책을 보고 있으면 엄마는 맞은편에서 계산기 놓고 가계부를 쓰시던 모습도 남아있구요.
엄마는 다시 일을 하셨는데, 주로 보험영업이나 자동차세일즈를 하셨어요. 아무래도 고졸에 변변찮은 경력이
없으셨다보니 주로 영업쪽을 하셨던 것 같아요. 영업하시는 분들 정말 대단하게 생각하는데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무살 넘어서 제가 아르바이트 해보니까 짐작되더라구요.
암튼 작게나마 아파트도 생기고 엄마 아빠 일도 적응 되시니까 두 분이서 운동으로 취미생활 다니시고...
언젠가 크고 나서 엄마한테 들었는데 이 때가 가장 좋으셨대요. 두 분이서 운동하고 맥주 한 잔 하시던게.
그렇게 사이가 좋던 분이었는데 사실 작게 계속 사이가 흔들거릴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싸우면 감정적으로나 심하면 물리적으로도 거칠 때가 있으셨고. 엄마께서 현금 천 만원을 실수로 잃어버리신다던지.
아빠께서 무리하게 취미생활 하시느라 (식물 키우시는걸 좋아해서요) 퇴직금도 땡겨쓰시고 큰 돈을
쏟아부었던게 다 망가졌다던지 하는 그런거요.
가끔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오시는 이모들은 저를 당연히 예뻐해주셨지만 어린 제가 느끼기에도 너무 강했고...
때로 나이트에 다녀오신다거나 술을 많이 드시고 오신다거나 가끔 그런 날이 있었어요.
아버지도 공고 출신이라 다니시던 대기업에서 그렇게 많이 진급은 못하셨고 퇴직하실 나이가 되었을때
해당 대기업의 점포를 차릴수 있는 권한을 가질지 계속 그냥 회사에 남으실지를 고민하시다가 전자를 선택하셨어요.
근데 딱히 밑천도 없고, 무엇보다 그냥 순하게 순하게 사셨던 아빠가 사업에 맞으실리가 없었어요.
멀쩡히 매출 잘 나오던 가게가 동업자분께서 엎으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남의 가게가 되었어요.
결국 어찌저찌 다른곳에 다행스럽게 다시 점포를 차리셨는데, 살던 집도 빼고 이것저것 대출이며 다 끌었지만
워낙 무리하게 올인한지라 결국 그런 표현 있죠... 바지사장.. 그런 처지가 되셨었어요.
이 과정에서 경리로 일을 도우던 엄마는 굴욕스럽다고 결국 집을 나가셨습니다.
물론 경제적인것 뿐만이 아니었겠죠. 경제적인게 큰 포션을 차지하긴 했겠지만 그동안 쌓인 무심한 아빠에 대한
원망이라던가 큰 딸도 20살을 넘겼으니 여기까지면 참을만큼 참았다 싶으셨나봐요.
외갓집에 저랑 아빠가 가서 사정을 해도 되려 외갓집은 우리 딸 이제 못내준다, 너도 클 만큼 컸으니 엄마라는
존재는 포기하고 잘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몇 번을 찾아갔는데도... 제가 나름 무식할정도로 끈덕진
구석도 있는데 정말 이 일만은 어떻게 안되더라구요. 지금도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 이런건 생각도 못하구요,
그냥 힘만 축 빠지네요.
그렇게 대학교 4년중 2년 과정 다니던 저는 학업을 접어야했고. 곧 고등학생이 될 동생 위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생활이 안되는 상황이었기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아 아직도 그 때 서늘했던 가을이 생각나네요.
말리던 대학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얼굴 하며... 처음 교제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어머니도 나가고.
웃는얼굴로 눈물 뚝뚝 흘리면서 나한텐 남은게 없다고 농담하던게 얼마전 일인것 같은데 벌써 5년이 넘게 흘렀어요.
집안일도 해야했고, 동생도 돌봐야했고, 돈도 벌어야했고. 가끔 아빠랑 소주 한 잔 집에서 마시기도 했고.
덕분에 신부수업 받은 꼴이 되었고 또래들보다 아주 약간 돈이나 사회에 대한 감이 생겼고
아주 가끔은 제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던 어머니가 없어서 자유롭게 지낼 수도 있었어요.
(자유롭게 지낸다는게 음... 만나는 남자가 있으면 누구냐고 너무 자세하게 물으신다던지 이런거요)
시간이 흐르고... 저도 이십대 후반이 될랑말랑한 나이가 되니 이젠 그 때를 뒤돌아보게 됩니다.
잘 지내진 못했지만 적어도 내 자신에겐 부끄럽지 않게 지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저도 결혼적령기가 되고 어느정도 사회인으로서 마인드가 잡히다보니 절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뭐라고 이해해야할지 고민이 되더라구요.
전 '돈있는 집에 시집갈거야' 하는 악에 바친 마음을 먹을랑말랑 하던 과도기를 지나
덕분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 하는 주의가 되었어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자고. 근데 이런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을것 같아서 벌써부터 일단 나는 독신으로 살거다
잠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태입니다..ㅋㅋㅋ
다행스럽게 아버지의 사업은 아주 잘되진 않지만 나쁘지 않게 풀려서 아마 제가 마지막으로 학업에 도전하거나
아버지 하시는 일을 물려받거나 진로는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구요...
진로가 어찌됐든... 나중에 같이 살 내 남편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처지에 있던지 흔들리지 않고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있게 서포트 해줄 수 있는 당찬 여자가 되고싶단 생각 하곤 합니다. 노력을 많이 해야겠지만? ^^;
하지만 여전히 남은 고민들... 엄마는 왜 나를 버리고 나간것이며... 그 배신감은 어떻게 정리할것이며.
나중에 결혼할 남자가 혹여나 생기면 그 남자에게 이런 상황을 털어놓는건 둘째치고 시부모님들께는 어떻게
설명할건지... 솔직히 여기 아들가진 82쿡 이모님들도 많으시겠지만 일단 저 같은 상황에서 자란 딸을
며느리감으로 들여온다면 온실속 화초처럼 예쁘게 자란, 거기까지는 안바라더래두 소소한 집안이지만
양부모 금슬좋은 모습 보고 배우며 자란 며느리가 더 좋은건 사실이잖아요...^^ 저같아도 그렇겠는걸요.
참 이런 고민들이.. 이젠 막연한 고민이 아닌... 한발짝씩 더 제 옆으로 와닿네요.
아,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도 많이 고민이 돼요. 아빤 법없이도 사실 분이 맞긴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결과
결코 좋은 남편감이 아니에요. 능력이 좋으신것도 아니구, 그렇다고 다정하거나 자상하지도 않아요.
휴일이면 애들 밥차려주거나 부인과 영화데이트를 한다거나 심지어 마트 장보기도 안하시는 분이에요.
아빤 지금도 엄마가 왜 나가셨는지 본인의 잘못에 대한 의식 조차 없으시구요...
정말 저희 아버지라서 모셔야한다 라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괜찮은 남자일줄 알고 만나서 결혼했는데 아빠같은 사람이면 어떨까 싶으면서... 이런걸 미연에 방지하려면
난 어떤 남자를 만나고 어떤 면을 봐야하는걸까 싶기도 해요. 근데 그런 말씀 들을데가 잘 없네요...^^;;;
어쩌다 신상에 대한 주절주절이 되었는데... 혹시 이런 제 상황 겪으셨던 82cook님들 계시진 않을런지...
친한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해주실말씀 없으신지... 그런 말씀 듣고 싶어서 글 남겨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