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아직도 광주다
어머니는 가장 편한 순간일 때조차 광주항쟁에 대한 기억에 대해 언급하길 꺼리신다.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일종의 채무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80년 5월 어머니는 젖먹이인 나를 부둥켜 안고 있었고, 밖에서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어머니는 살아야했다. 덕분에 나도 살아서 효도 따위 모르고 이렇게 경우 없이 산다.
광주항쟁이라는 역사는 내게 참 복잡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다시 전학을 갔던 광주의 고등학교에서 나는 처음 그 잔상과 마주했다. 야간 자율학습 때 내가 농으로 김대중을 비아냥거려 생긴 일이었다. 한 친구가 발끈하더니 결국 주먹질이 되었다. 아이들이 뜯어 말리는 가운데 그는 “네가 광주나 김대중에 대해 뭘 아냐”고 소리쳤다. 당시로선 참 뜬금없고 촌스런 말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그의 아버지가 80년 5월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월 광주는 생각보다 가까웠고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위에 있었다. 5월이 되면 자꾸 그 말이, 그 억양의 서슬퍼런 질감이 떠오른다. 나는 그 친구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
얼마 전 광주항쟁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기록 유산에 등재될지 모른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정부의 기록물에서부터 취재수첩, 병원기록들, 그리고 미국의 광주항쟁 관련 비밀해제 문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가 제출되었다. 그런데 곧 이어 희한한 소식이 들려왔다. 한미우호증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한미우호증진협의회 한국지부에서 “5.18의 진실은 600여명의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와서 시민들을 칼빈으로 죽인 것”이라며 유네스코에 반대 청원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은 다시 한 번, 광주민주화운동 3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시민군도, 계엄군도 북한 사람이라면 전라도는 북한 땅이었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 위해 특정 이념들과 싸워야 한다는 건 지치는 일이다. 광주항쟁에 관련한 북한 개입설에 대해서는 이미 넘치도록 충분한 자료들에서 해명이 이루어진 상태다. 80년 5월 25일 황금동 부근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스물 한 살의 장계범이라는 사람이 도청 농립국장실에 허겁지겁 들이닥치면서 “독침을 맞았다!”고 외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시민군이 점거 중이던 도청 안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광주사태는 간첩의 책동”이라는 신군분의 선전에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이 사건은 침투정보요원들의 도청지도부 교란 작전이었다. 이틀 후 계엄군은 도청을 접수하고 시민군과 8명의 투항자를 사살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는 당시 계엄군 병사가 한쪽 발을 시민군 포로의 등에 올려놓고 사격하면서 “어때, 영화구경하는 것 같지?”라는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광주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 익숙하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기억으로 멀어져 가고 있다. 광주항쟁을 극화한 드라마, 영화 등 회고록들 가운데 상당수가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실제 일어난 일을 축소 재현하는 방식으로 왜곡해왔다. 그렇게 5월의 광주는 사진 한 두장의 느슨한 인상으로, 낡은 구호로, 공동화한 기억으로 타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를 조준 사격하고, 화염방사기를 동원하고, 임산부와 여고생을 대검으로 학살하고, 이를 제지하는 할머니를 짖밟은 등의 이야기들이, 아직까지는, 지금 이 시간 적지 않은 이들의 기억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당장 구글에서 관련 키워드를 검색해보면 당시 해외 기자들에 의해 촬영된 사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장담하는데 당신이 그 어느 잔혹한 영화에서도 차마 본 적이 없는 장면들이다. 폭력의 강도를 확인해보라 권유하는 방식으로 지킬 수 있는 과거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그렇게라도 사실을 사실로 지켜야 하는 현실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빤히 벌어진 죽음의 초상들이 알량한 이해관계에 의해 영 다른 기억으로 왜곡되고 지워지는 지금 이 시간에, 그나마 광주를 기억해보려 애쓰는 모든 이야기들이 고맙고 귀하다. 최근 80년 5월을 통과한 자연인들의 기록물인 다큐 영화 <오월愛>가 개봉했다. 어김 없이 오월이다. 그 사람들이 죽어서 우리가 야구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렇게 질기게 살아있다. 외면했거나 망각했거나 축소했거나 가르치지 않았던 우리 모두 광주의 죽음 앞에 새삼, 유죄다.
-허지웅 (시사인)
ps: 다음의 자료를 추천합니다.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박남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10일간의 항쟁>(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 취재반), <알려지지 않은 역사>(윌리엄 글라이스턴), <비화/ 5.18 당시 정보부 전남지부장 장석환 비망록>(장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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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죽어서 우리가 야구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렇게 질기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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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두려워해선 안되네. 실수를 감당할 용기도 필요해.
실망과 패배감, 좌절은 신께서 길을 드러내 보이는데 사용하는 도구일세.”
- 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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