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이어지던 지난 10일 한차례 단비가 내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정치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민정(36)씨를 서울대 교정에서 만났다.
“시스템이 영혼을 결정한다”
보건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그녀는 주변에서 “도대체 왜 보건대학원에 가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그녀의 진로결정이 생소하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녀가 ‘한의사’라는 안정된 궤도를 벗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 때부터 사회정의에 대해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모두 함께 행복하게 잘 사는 사회로 굴러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때 못다한 고민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진학했던 것 같습니다.”
박 씨는 경희대 한의대 시절 성평등 동아리 ‘달해’와 의료철학동아리 ‘처음처럼’에서 활동하면서 의료를 통해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길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진 예비의료인이었다. 의료인으로서 빈부격차에 따른 건강의 형평성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2002년 한의대 졸업 후, 병원 수련의로 차차 적응해가면서 그때 못다한 고민들을 꺼내 다시 풀어보고 싶었다. 2005년도에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입학해 보건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시스템이 영혼을 결정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행위별수가제에서 의사는 환자나 지역사회의 건강증진이나 예방에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진료를 마음껏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제도적 시스템 안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보건정책은 바로 그런 제도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학문입니다.”
그가 전공하고 있는 보건정치경제학은 경제학적 관점과 정치학적 관점을 통합적으로 분석해 보건의료제도와 정책을 연구한다. 이와함께 보건의료정책을 좀 더 넓은 사회복지정책의 관점에서, 또 국가 보건의료체계의 관점에서 보건의료공급자, 보건의료산업에 대한 정부정책의 효과분석 및 효과적인 정책의 설계에 관해 연구하며 여러 나라의 거시적인 제도와 정책에 대해서도 폭넓게 비교·분석할 수 있는 학문이기도 하다.
제도·정책 개선을 위해선 ‘연구능력’ 필요
그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국내 보건의료정책연구의 동향을 지켜볼 수 있어 평소 본인이 갖고 있던 평등한 의료도 지속적인 제도나 정책 연구를 통해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석사 때 교수님과 우리나라의 건강 형평성에 관한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전에는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치료도 못 받는 사회는 부당하다는 생각만 했다면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와 논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주장의 근거로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 분야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그녀는 현대사회에서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도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특히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경우 각종 보건의료계의 이슈와 관련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고, 때로는 그 연구결과가 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합니다. 또 복지부를 비롯한 건보공단, 식약청, 심평원 등과 교류가 많고 그와 관련된 연구가 늘 진행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2007년 석사 수료 후,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 출산으로 한동안 육아에 매진했다. 간간이 임상에서도 손을 놓지 않고 경험도 쌓았다는 그녀는 2011년에 박사과정에 진학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단다. 남편과 양가 부모님의 이해로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다고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무엇보다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그녀 자신의 의지가 강했을 것이다.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의료정책분야가 무엇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나라는 의료전달체계가 없어서 1차 의료기관이 무너져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동네의원이 3차의료기관과 경쟁을 하다보니, 자꾸 설자리가 없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국내에서 체계적인 의료 전달체계를 성립하는 부분과 의료보장성 강화를 통한 건강 형평성의 증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한의학이 어떤 측면에서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씨는 또 “제도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 행태와 정신을 결정하기 때문에, 이 제도에 한의학적 특징을 같이 반영하기 위해서는 한의학 전공자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한의계, 보건의료정책분야에 불모지
처음에는 개인적인 관심에서 보건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국내 보건의료정책에서의 한의계의 입지가 취약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보건학 분야에서 한의학에 초점이 맞춰진 연구는 매우 드뭅니다. 의대의 경우 예방의학교실 뿐만 아니라 의료관리학교실이 있어 교수와 학생들이 끊임없이 의료제도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연구하는 의료제도는 양방에 적합한 제도이고, 그 연구에서 한의학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의대보다 좀 더 개방된 보건대학원에서도 의료제도 연구에서 한의학은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박 씨가 한의사로서 가장 괴리감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의계에서 정책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님도 한 분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학부 때 보건의료정책관련 수업을 듣거나 교수님을 만났다면 이 분야에 대해 미리 알 수도 있었을 텐데 학생 때는 이런 학문이 있는지조차 몰랐다는 게 아쉬운 점입니다. 한의학이 보건의료계에서 확고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한의사들이 자체적으로 한의학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한의학을 위한 제도를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녀는 보건대학원에 한의학 전공자들이 많이 들어와 공부한다면 자연스레 교수들도 한의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것이고, 그러면 한의계도 점점 보건정책분야에 대한 연구풍토가 마련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의계의 젊은 교수님들 중에서는 본인의 연구에 필요한 방법론 등을 배우기 위해 석사과정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더러 계시는데, 교수님들도 보건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아야 할 만큼 한의계 내에서는 보건정책과 관련된 연구풍토가 매우 취약합니다.”
“임상 경험 살린 보건의료정책 연구하고파”
그는 “그만큼 앞으로 할 일이 많다”며, 그에 대한 역량을 기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론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국가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표본자료를 이용해서 한방의료를 다방면으로 평가해보기 위해 계량경제학적 유사실험연구기법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석박사학위를 취득하면 기본적으로 연구원으로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연구기관에 취직해 자신이 흥미를 가진 연구를 한다거나 전문기관에 취직할 수도 있지만, 한의사로서 자신이 어떻게 연구분야를 특화시켜나갈 것인가는 개인의 역량이라고 봅니다.”
그녀는 “수련의 경험과 임상 경험을 통해 느꼈던 많은 것들을 어떻게든 연구를 통해 반영해나가는 것이 제가 가진 강점”이라고 말했다.
또 “연구자로서 자신의 연구가 목적한 바 대로 잘 쓰일 수 있다면 뿌듯한 일일 것”이라면서 “우선은 연구능력을 키워나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작은 씨앗을 품고 열심히 싹을 틔워가는 그녀를 보니 가까운 미래에 한의계에서 젊은 보건의료정책연구원으로 마주하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보건의료정책의 불모지인 한의계에 그는 단비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김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