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20년 전 경고 “민주당 공부하라”
[한겨레]93년 집필 '민주당 개조론' 새삼 주목
"우리 제품은 아무도 안봐" 진단
대선 패배 뒤 민주당 상황과 흡사
"정책 정당 위해 공부하는 정당" 강조
'불리하게 왜곡된 시장구조, 자본과 판매조직의 열세, 이런 상황에서 경쟁사는 신개발 제품으로 시장을 석권하고 있고 우리 제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것이 오늘 민주당이 처한 현실이다.'
이 글을 쓴 필자는 여당을 '신개발 제품으로 시장을 석권한 경쟁사'라 표현하면서, 민주당이 '불리한 시장구조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제품이 됐다'고 한탄하고 있다. 새누리당이 집권하고, 민주당이 무기력한 제1야당이 된 지금의 정치현실에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은 진단이다. 2013년 민주당의 처지를 예견한 것 같은 착각이 들게하는 이 글은, 바로 1993년 5월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진보언론 '말'지에 쓴 기고문 첫머리에 나온다. 마치 민주당을 향한 '20년 전 노무현의 경고'로도 들린다. 현 민주당에 대한 쇄신요구가 분출하는 상황에서, 당시 기고문의 제목마저 '민주당 개조론'이다.
5·4전당대회를 앞두고 민주당 관계자들 사이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년 전에 쓴 '민주당 개조론'이 새삼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92년 말 대선에서 진 뒤 당의 활로를 모색하며 이 글을 쓴 93년 5월과, 지난해 말 대선패배 이후 위축된 2013년의 5월의 상황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친노무현계 인사들이 만든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홈페이지 '칼럼·이슈'(게재날짜 3월19일)란에 '다시 읽기-노무현 민주당 최고위원이 외쳤던 민주당 개조론'이란 제목으로 올라와 있다.
이 글에서 노 전 대통령은 "치솟는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 죽 쑤는 민주당"이라고 93년 5월의 현실을 짚은 뒤, '김영삼 정부개혁'들의 허점 속에서 민주당의 갈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법과 제도의 개혁을 함께 하지 않는 개혁"이라고 평가하며, "새로운 권위주의가 자리잡을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또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는데, 경기부양책이 위험스럽기도 하거니와 경제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 없이 어떻게 공정한 사회, 합리적인 사회로의 개혁이 가능할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독점, 소유의 편중, 엄청난 불로소득 등 불공정한 경제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분배와 성장은 더 이상 두 마리의 토끼가 아니다"며, "분배와 성장은 한 마리 토끼의 앞다리와 뒷다리로 보아야 한다"는 '토끼 앞·뒷다리론'으로 분배 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이어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알수 없다"며 "인기 있는 발표들이 포장만 요란할 뿐, 알맹이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고 걱정했다.
한 민주당 당직자는 "20년 전 김영삼 정부에 대한 평가인데도, 대선에서 내건 경제민주화·복지공약들이 후퇴하고 '창조경제'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노무현의 우려'로 읽히기도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민주당 최고위원'은 민주당 개조론에서 "새 제품(김영삼 정부)에도 문제가 많다"며, 이런 상황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이 "한마디로 달라져야 한다"고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그는 '정책정당, 깨끗한 정당, 공부하는 정당, 당내 민주화'를 민주당의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언론과 국민들도 민주당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하면서도, "정책정당으로 인정받는 것은 민주당 스스로의 과제이다. 앞으로의 정책대결은 구체적·개별적 정책에 관한 것이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민주당이 민생에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정책을 생산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특히 그는 '공부하는 정당'을 강조했다. 그는 "공부하는 정당은, 정책정당으로 변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세이다. 공부는 개별 의원들이 할 일이지만, 중앙당은 매주 또는 월 2회 이상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어 나가고 정책기구를 강화하여 소속 의원들의 자료 요청과 자문에 응하는 등의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밖에 소속 의원들의 자발적인 그룹토론, 개혁모임의 활동은 공부하는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영국의 메이저 총리가 의정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며 공부하고 연구하는 의정활동을 역설했다.
그는 또 "세상이 달라진 만큼 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긴장과 관리가 필요하다"며 깨끗한 야당 정치인이 돼야 한다고 적었다.
그는 '상향식 민주주의·참여 민주주의·당내 지역주의 불식'이 필요하다면서, 민주당이 지방자치 현장에 밀착해서 다가갈 것도 요구했다. 그는 "지방자치를 정치적 매개 고리로 하는 참여의 시대, 대중의 시대, 지방화의 시대"를 강조한 뒤, "대중을 통치의 객체로서가 아니라 정치의 주체로 모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의 글을 본 민주당의 다른 당직자는 "새로운 지도부를 뽑는 5·4전당대회는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희망전대가 돼야 했다. 하지만 당 혁신을 격렬하게 논하는 전대가 되기는 커녕, 계파경쟁·상호 비방전으로 흐르고 있다. 93년 주장한 노무현의 민주당 개조론을 넘어서는 민주당 혁신론이 당에서 강하게 제기됐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민주당이 127명의 의원들을 보유한 만큼, 현장과 밀착하고 열심히 공부해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으라는 노무현의 경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년 전 노무현이 말한 '민주당 개조론'의 글도, 귀족주의 야당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지금의 민주당을 걱정하듯, 이렇게 끝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대안은 '겸허한 자세와 자기반성'이다.
"송호진 기자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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