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의상이라고 하면 훨훨 날아오를 듯한 천사 의상 튀튀!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백조들 튀튀가 젤 유명하죠.
혹은 발끝까지 오는 안개 같고 몽환적인 로맨틱 튀튀! 지젤에 나오는 처녀 귀신 윌리들 의상이죠.
발레복은 일반인들도 늘 즐기는 유행이었어요.
섹스 앤 더 시티의 유햅투 폴깁미도 입질 않나. 꼬꼬마 여자 애기들도 입고요ㅋㅋ
하지만 막상 발레를 배우는 난 그걸 입을려면 백년은 걸려요!
과연 입기는 할 수 있을까ㅠㅠㅠ
블랙 스완에서도 나탈리 포트만이 늦잠 자서 연습에 헐레벌떡 지각하고 보니, 떡 하니 자기 라이벌이 주역 튀튀를 입고 있어요.
이냔아 내 튀튀 내놔!!!!!
뭐 머리끄댕이 잡진 않고요, 그냥 눈빛 살인. 눈빛 임신보단 덜 바람직한가...
기본 발레 의상은 역시 핑크 타이츠 & 블랙 레오타드.
그게 가장 기본적이고 젤 심플하게 이뻐요.
거기다 머리는 꼭 똥머리. 잘못하면 회전 한 번 할 때마다 머리핀을 진달래꽃처럼 흩뿌릴 수도 있지만.
발레 처음 할 때 걸림돌이 바로 레오타드입니다.
수영장도 아닌데 수영복 왜 입나, 딱 그거죠.
나도 내 몸매 보기 싫고 남들 몸매도 보기 싫어 수영장 안 가는 판에, 수영도 아닌데 웬 수영복?
저도 처음엔 이게 정말 입기 싫었어요.
그래서 발레복 살 때 선생님이 사다주신다는 걸 마다하고 혼자 인터넷으로 구입했어요.
선생님은 보나마나 꽉 끼는 레오타드 사다주시겠지, 싫어요, 챙피해요, 부끄러용, 한 삼개월 뒤에 살 빠지면 입을께요ㅋㅋ
그래서 발레 전문 쇼핑몰에서 반바지와 티와 타이즈와 발레슈즈를 샀어요.
슈즈는 역시 레자가 짱이에요ㅠㅠ 천슈즈 샀다가, 한 번 안 가져와서 남의 가죽 슈즈 빌려 신었더니 다르더라구요.
전 본래 새 옷 사면 빨아 입거든요. 그래서 반바지와 티를 손빨래해서 널었어요.
근데 좀 일찍 하지, 레슨 전 날 밤에.
레슨 당일까지 안 마르는 거예요ㅠㅠ
할 수 없이 안 마른 옷가지 손에 여우 목도리처럼 걸치고 평촌까지 갔어요.
묻지마쳐다보지마궁금해하지마 사연 있는 여자고 싶지 않았어...
발레복 진짜 잘 안 마르더라구요, 결국 입을 때까지 축축.
나중에 선생님이 제 포즈 교정해 주시면서, 어마, 축축해요, 혹시 땀?
아뇨, 선생님, 땀 아니고 피땀.
피땀 묻은 티 입고 레슨 받는데, 티는 길지도 않은 터라 돌돌 말려 올라 배꼽티가 됐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지퍼처럼 올라가지 않은 배꼽의 반항이 들킬 거 같더라구요. 난 분명 시켰는데 반항하는 걸 어째요.
안에 파란 캐미솔을 입었는데, 그렇게 입고 나니까 도저히 브래지어는 할 수가 없어요. 했다간 산산조각.
그래서 그냥 했는데, 그게 정석이었어요.
본래 발레할 때는 속옷 안 입고 몸의 선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유연하게 잘 되거든요.
당연한 거 같기도 해요.
배꼽이나 귀처럼 상관 없어 보이는 애들까지 괴롭히는 춤인데, 지금 속옷이 문젠가...
선생님은 여탕에 왔다고 생각하라며 대일밴드를 권하셨어요. 가끔 눈이 뜰 때가 있거든요. (우리 모두 이 이야기 못 알아들어서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음. 쪽지로 물으시면 대답함, 리플 노노)
선생님, 제가 무용수의 몸매를 지녔다면, 속옷에서 탈출하라고 권하실 필요도 없어요.
그치만 비루한 몸매로 꽉 달라붙는 레오타드를 어케 입어욧!
따지진 않았어요. 속으로 개겼을 뿐.
하지만 레오타드 입으면 더 춤추기 좋다는 말에 혹해서 결국 금기의 세계로 한 발짝....
그냥 구경이나 하러 간 거죠.
구경하고 안 사면 되잖아요. 것두 인터넷 쇼핑인데.
아아, 그곳은 정말 금기의 세계었어요.
그곳엔 망사도 있구요 옆트임도 있구요 벨벳도 있구요. 블랙 스완에 나온 옷들도 있고ㅠㅠ
모든 죄악의 아이템은 다 있었어요. 니 통장에 빨대 꽂겠다 뭐 이런.
전 정말 망사 앞에서 고민했어요. 언제 또 망사를 입겠어요? 목에서 팔까지 몸통 빼곤 이어지는 망사.
그 망사가 감쌀 팔이 이쁘냐가 문제가 아니라 망사가 블랙이냐 레드냐. 이미 눈은 뒤집혀서 클릭 쿨릭 쿨럭.
평소 고시생 패션인데 발레복은 숨겨진 관능을 막 자극하더라구요.
옆트임은 또 언제 입겠어요. 입고 또 어딜 가겠어요. 오스카 레드 카펫?
그리고 레오타드에 치마 달려 있는 것도 있는데 치마가 엉덩이를 가려줘요.
약간 로맨틱 튀튀 같은 게 이뻐요.
이거 입고 똥머리에서 핀 우수수 떨어뜨리며 헤드 뱅잉하면 지젤 같겠다. 사, 사, 사버려ㅋㅋㅋ
하지만 결국 그냥 세일하는 검은 레오타드 샀어요. 천사 의상 입고 갔다가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고 부러워하고 질투할까봐.
사람들이 다 나 같은 줄 알거든요.
근데 그게 또 입시 레오타드라 초보에게 좋대요.
됐어, 초보 딱지, 됐어, 백조 의상이 입고 싶다고!
얌전하게 타이즈 입고 그 위에 레오타드.
타이즈도 만만찮아요. 첨에 포장에서 꺼냈을 때 하도 작아서 팔에 껴야 하나 싶었어요.
다리 넣는 순간 펑크 터지는 줄 알았는데 팽창력 짱이예요.
그리고 반바지를 입어요. 반바지나 치마 안 걸치면 진짜 민망해요. 그뇬의 레오타드 땜에 팬티 라인 다 보임.
선생님이 초보는 꼭 반바지를 권하시더라구요. 오리 궁둥인지 아닌지 감시하시려고.
다리를 꼬고 있는데 무릎 사이에 빛이 보여요, 무릎을 좀 더 꼭 붙여요, 이러시는 분이거든요.
굉장히 낙천적인 분이세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시고.
얘들 가르쳐서 언젠가 백조 공연 해야지 원대한 야망을 품으시고.
그런데 확실히 레오타드 입는 이유가 있어요.
발레는 가장 오래된 춤들 중 하나인데, 그 유구한 역사를 통해 더 춤추기 좋도록 하나하나 개량되어 온 전통이 있는 거예요.
레오타드를 입으면, 그 살을 꽉 조여오는 천이 상체를 바로 세워요.
상체를 천상(혹은 지상 십 센티)으로 들어올리기 좋도록 해주죠.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반듯이 하면서 여러 유연한 동작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코르셋만 입어도 몸매가 이뻐 보이는데 코르셋 입고 춤 추는 식이니까요.
저도 처음엔 내 소중한 배, 내 소중한 허리, 아무도 못 본단 식으로 은장도 이로 깨문 처자 심정이었는데
발레하다 보면 남의 몸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거울에 비친 자기 몸 보기 바빠요. 동작 제대로 취했나.
솔직히 그냥 펑퍼짐한 옷 입어도 자기 군살 자기가 다 알잖아요.
아예 다 까놓고, 거울 앞에 보이면서 동작 취하면 어떤 게 그나마 근육으로 개과천선할 가능성이 보이는 놈인지
어떤 놈이 주리를 틀어 능지처참할 군살인지 다 보여요.
남이 내 살 볼까봐 달라붙는 옷을 꺼릴 이유가 없어요.
내가 내 살 보려고 입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살을 교정하려구요.
스트레칭 하면서 허리 숙이고 뱃살과 인사하는 거예요.
죽겠다고 헐떡거리며 째려보면 뱃살도 뽀로뽀로 뽀로롱하고 있어요. 우리만 힘든 게 아니에요. 뱃살도 힘들어요.
자기 살 보기도 바쁜데 남의 살 볼 틈 없어요.
자기 살도 남의 살도 보기 싫어도 선생님이 다 보고 계세요.
발레의 산타세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날씬해지고 나쁜 아이는 살이 안 빠져 뭐 이런.
확실히 전 살이 빠졌어요. 석 달도 안 되고 일주일에 한 번 했는데 그 한 번을 되게 재밌게 했어요.
선생님이 항상 웃고 있다고, 헤벌레 히죽댄다는 이야기를 돌려서 칭찬해 주셨는데요.
정말 거울 보면 해해거리면서, 탈춤처럼 벙실대고 웃고 있어요. 등신 같아요. 참말이에요.
바보처럼 웃고 있는 게 어이 없어서 더 웃겨요.
근데 거기 레오타드에 타이즈라도 갖추고 발레리나 흉내 내고 있는 게 넘 씬 나요ㅋㅋ
히히 웃다가 순서도 자주 틀리고, 지적도 자주 당하는데요, 그래도 좋아요.
백조처럼 우아하거나 차도녀처럼 도도한 얼굴로 먼 곳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
나 혼자 해해해해 유치원 학예회 삘로 탈춤 춰요.
근데 진짜 나중에 안 맞던 청바지가 맞더라구요.
그래봐야 레오타드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으면 풍만해요 아주. 가슴 말고ㅠㅠ
그치만 슬슬슬슬 살이 빠져요.
문제를 직시하라잖아요. 그거예요. 살이 문제면 마주봐 줘야죠.
좋아 이 기세로 내 살을 다 째려봐 주겠어 하고 맘먹었죠.
그리고 더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거울을 보니 반바지를 안 입고 있더라구요.
수영복 다리 라인을 타이즈만으로 고대로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꺄아아악!!!
조신한 처자답게 비명을 지르면서 탈의실로 뛰어들었어요. 사실은 커튼 쳐놓은 공간.
왜 진작 안 말해 줬어요, 바지를 안 입고 있었는데!!!
남들 탓도 잊지 않구요.
바지를 부랴부랴 입고 나오니까 다들 한 마디씩 위로해 주더라구요.
용감하게 레오타드만 입고 하기로 결심한 거 같아서 격려해주고 싶었다, 팬티 무늬가 이뻐서 가만 보고 있었다, 등등. 됐거덩요.
나랑 결혼하실 것도 아닌데 팬티 칭찬 감사해요, 유부녀 회원님ㅠㅠㅠㅠ
난 쪽팔려하지 않고 모두에게 찡찡댔어요.
그날 따라 선생님이 결혼 얘기에 이번 학기 끝나면 뒷풀이 얘기에 날 홀려 놔서 그런 거야ㅠㅠ
거울이 너무 커서 초점이 분산된 거야, 선생님이랑 누구랑 누구랑 이쁜 치마 입고 있어서 부러운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바지 입기 싫었던 거야, 내 살들이 바지 안에서 갑갑해서 반란을 일으킨 거야, 조명이 눈부셔서 아무것도 안 보인 거야
108 번뇌 맞춰서 세상 탓 남탓 내 무의식 탓(내 탓 아님)을 했는데 것도 까먹어서 다 적지도 못해요.
심지어 나와 짝지어 윗몸 일으키기, 다리 운동한 파트너도 있는데 말을 안 해주다니ㅠㅠ
다들 안 그래도 그 분에게 묻더라구요.
그럼 쟤(우리 반 바보)가 저러고 있는 걸 다리 붙들고 한 거네요.
난 안 입고 하려는 줄 알았죠. 좋은 건데 말릴 것도 아니고.
그렇게 진상 부렸더니, 우리 착한 클래스메이트들은 다음 레슨 때 날 보자마자 바지 입어요, 오늘은 입었네요, 내 바지 안부를 묻더라구요.
바지 까먹었을 때 이야기하라고!!! 까먹었을 때!!!
청년성 치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나의 레오타드, 나의 타이즈와 함께.
나만의 발레를.(진심)
튀튀 입는 그날까지.
망사 입는 그날까지.
옆트임 입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