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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펌글)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은 왜 자살해야 했나?

장발장 조회수 : 6,064
작성일 : 2013-02-01 16:23:49

최근에 영화가 아주 큰 일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 미제라블’을 본 560만명이나 되는 관객,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본 무려 1,200만명이나 되는 관객,

'도가니'를 본 466만명이나 되는 관객,

‘부러진 화살’을 본 346만명이나 되는 관객…

지금 한국의 ‘권력’은 이 어마어마한 관객들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면, ‘권력’이 아직 상황파악도 제대로 안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레 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의 모습을 보면서 ‘부러진 화살’이 생각났습니다.

부러진 화살에서 안성기가 연기했던 김명호 교수(영화에서는 이름이 김경호로 나옴)는 본인 자신이 ‘법(法)’에 의해 인생이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은 수학과 같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김명호 교수가 수학자이기에 ‘수학’을 비유로 들었을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수험생들에게는 지긋지긋한 과목이겠지만, 수학자에게 있어서 수학이란 일체의 사족이나 군더더기, 미사여구가 배제된 ‘순수한 진리체계’로서 아름다움의 극치일 것입니다.

법이 수학과 같이 아름다운 것일 수 있을까?

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짓 판결을 강변하는 법관이 엉터리인 것이지,

법 자체는 잘못이 없는 것이므로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점에 대해 동의가 안되는 분들도 계실 듯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영화 ‘부러진 화살’의 주인공 김명호 교수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갈 만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 발장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계속 쫓아가는 자베르 경감 역시 “법은 수학과 같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봅니다.

물론 그에게는 비교의 대상이 수학이 아니라 ‘신의 언명’이었겠지요.

새벽에 성당 지붕에 올라선 자베르 경감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밤하늘의 별은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그 별을 보고 사람들은 좌표를 삼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면 별은 항상 정해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그는 장 발장에게, 자신도 감옥에서 태어난 비천한 신분이라고 말합니다.

천성이 강직한 그에게, 자신이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였다는 사실, 자신을 낳은 부모가 죄를 지은 범죄자였다는 사실은 평생을 규정지은 멍에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가 부모의 죄를 대신 씻어 부모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길,

잘못된 자신의 태생을 바로잡아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법과 원칙을 지키는 역할에 글자 그대로 충실하는 것, 이것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법과 원칙이 그에게는 진리요, 종교가 되었습니다.

법과 원칙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법을 수호하는 경찰의 직분은 그에게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필코 장 발장을 체포해야 했습니다.

지난 글에서 설명드렸듯이,

장 발장은 19년 동안의 심사숙고를 통해 ‘이 사회가 유죄’라고 스스로에게 선언한 사람입니다.

이 사회를 창조한 신의 섭리가 유죄라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 발장은 자베르 경감에게 있어서 진리요, 종교인 법 질서의 존재 가치 자체를 정면에서 부정해버린 자입니다.

따라서 자베르 경감에게는 장 발장이 일반 '잡범'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 인물입니다(그 때문에 경감은 장 발장을 잡기 위해 여관주인 부부 같은 잡범은 그냥 놓아주기 조차 합니다).

장 발장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면 줄수록, 경감에게는 그가 더욱 더 위험한 '이단'이며, 절대 그 존재 자체를 용인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장 발장을 쏠 수 없었습니다.

법의 수호라는 그의 존재근거는 쏘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깨달음이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막아섰습니다.

그 순간 그는 내적으로 분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장발장과 나는 이 세상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계속해서 법을 수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법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법은 수학과 같이 아름다운 진리의 체계일 뿐….

도둑질한 사람은 감옥에 갇혀야 합니다.

탈옥한 사람은 감옥에 갇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사회 체제가 문제였습니다.

극단에 이른 부의 양극화가 문제였습니다.

당시의 사회 체제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장발장과 같은 사람이 빵을 훔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었습니다.

도둑질한 자를 감옥에 가둔다는 법의 규정은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이 상호모순은 어떻게 해야 해소될 수 있을까요?

결국 정답은 잘못된 사회 체제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 때문에 마리우스와 같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청년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마저 희생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자베르 경감이 당면한 모순은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장발장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을 때,

그가 깨달은 사실은,

이미 ‘정당한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 되어버린 사회 체제를 뒤엎기 위해 그 자신도 바리케이드 뒤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법과 제도의 수호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인 순수한 종교인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법의 수호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이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진리와 종교에 헌신해오던 영혼이 어느 날,

지금까지 해온 자신의 헌신이 사실은 과오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달리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자베르 경감은 어차피 밥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도 아니었습니다.(그 때문에 그는 새벽녁에 한 발짝만 삐긋해도 떨어져죽을 수 있는 높은 성당 꼭대기 가장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걷곤 합니다. 자신을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올려세우는 이 행동이 그에게는 아마도 종교의식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순수한 영혼인 그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면 그 뿐입니다. 그냥 실행하는 것 뿐….

결국 그에게 자살은 자연스러운 (필연의)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레 미제라블’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순수한 영혼을 가졌기에 ‘비참한 사람들’의 얘기지요.

주인공 장 발장의 경우는,

존경받는 시장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자기로 오해받아 잡혀들어갈 처지에 놓인 사람을 모른 척 할까 고민하다가,

그리하면 날마다 내 얼굴을 어찌 보나, 라고 노래합니다.

그에게 판단기준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가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자신이 어찌 보나, 였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자신의 눈,

이게 양심의 눈이고, 하늘의 눈, 신의 눈이겠지요.

영화 후반부에 장 발장이 급히 영국으로 도피하려고 가방을 꾸릴 때,

예전에 미리엘 신부가 준 은촛대를 가방에 넣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 발장은 날마다 은촛대를 보며 신부가 전해준 깨우침을 잊지 않기 위해 되새겨왔던 것입니다. 그 역시 매일 매일을 경건한 종교인의 자세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은 둘 다 순수한 영혼들이요, 진리와 종교에 헌신했던 신자겠지요.

그 외에도 마리우스와 그의 친구들,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던 에포닌, 용감했던 소매치기 꼬마소년 등 바리케이드 뒤에 섰던 모든 이들은 순수한 영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체제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모든 이들을 비참한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결국 당시의 사회 체제는 ‘개혁’되지 못하고 혁명으로 전복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진리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헌신하는 모습을 봅니다.

정의의 여신은 공정하기 위해 눈을 가리고서 한 손엔 저울, 다른 한 손엔 칼을 들고 있는 것인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최고위층 법관들의 경우에도, 눈가리개를 슬쩍 걷고서 어디에 ‘돈’이 있는지,

어떤 판결을 내려야 자신에게 ‘이익’이 될 지,

자신이 호의호식할 수 있는 줄은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힐끔거렸던 듯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좌절이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영화 ‘레 미제라블’에 감동하도록 만드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믿던 진리를 위해 더 이상 헌신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다리에서 떨어져내리던 자베르 경감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동상을 보는 듯 해서 숭고한 느낌 마저 줍니다.

(제가 법학을 전공하기도 해서 저만 유달리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일까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법원이나 헌법재판소 내부에서도 스스로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기에 희망을 가져봅니다.

자베르 경감 같은 이들이 법 질서를 수호하는 데에 신념을 갖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사회,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최소한,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몸서리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사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IP : 14.47.xxx.109
9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3.2.1 4:35 PM (124.5.xxx.133)

    펌글이라고 적으셨는데, 어디서 퍼오셨는지 출처도 적어주세요. (밑에 펌글도 포함해서)
    그리고 원글자에게 '펌' 허락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음 펌글은 월요일 아침에 올라오겠군요. ^^

  • 2. 파란배
    '13.2.1 4:35 PM (112.119.xxx.99)

    이글 어디서 퍼오셨나요 글 정말 좋아요.
    자베르의 죽음에대해 정말 잘 쓰셨네요.
    영화는 못보었지만 두꺼운 원서역본을 몇번이나 읽었죠.

  • 3. 정말
    '13.2.1 4:45 PM (119.70.xxx.194)

    글 잘쓰셨네요.

    제가 말하고 싶으게 이거였는데
    정작 멘붕으로 죽었단 표현밖에 안나오더라는

  • 4. 우와~
    '13.2.1 4:48 PM (121.160.xxx.2)

    잘 읽었습니다~

  • 5. ...
    '13.2.1 5:20 PM (211.234.xxx.51)

    슬프지만 공감 가는 글입니다
    기득권이 이 문제를 현명하게 봐야 할텐데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 없는것이 우려됩니다

  • 6. 퇴근길에
    '13.2.1 5:25 PM (14.54.xxx.56)

    영화본후에 제가 한말입니다.
    글로 잘 표현하셨습니다.

  • 7. ㅌㅋㅋ
    '13.2.1 6:18 PM (115.126.xxx.115)

    ........강추!!

  • 8. 레 미제라블
    '13.2.1 6:49 PM (121.167.xxx.161)

    공감...........

  • 9. into
    '13.2.3 10:12 PM (124.61.xxx.124)

    잘 읽었습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몸서리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사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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