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오랫만에 맥주 한잔 합시다.

나거티브 조회수 : 913
작성일 : 2013-01-16 02:08:01
연말 연초에 골치 아프고 바쁜 직장일이라 자게 들어오기도 정말 띄엄띄엄합니다.
대문에 올라간 같이 잘 살고 싶었다는 글 읽고 그 즈음 저의 기억이 떠올라 맥주 한잔과 안주 조금 챙겨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저는 IMF가 터지던 그해 겨울에 스무살을 막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등록금과 용돈을 해결해주셨지만, 청바지 두벌을 교복으로 입어야하는 신입생이었지요.

고향집에 내려가는 저녁, 눈이 제법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갑에 딱 차비가 있었고, 주머니에 500원, 50원 동전 두개.
한산한 버스터미널 앞에 누가 엎드려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듯 등에 눈이 쌓인 채...
주머니를 뒤적여 500원을 동냥그릇에 넣어주고 저 사람이 저러다 죽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집에 내려와서 옷을 갈아입다가 500원짜리 동전이 떨어졌습니다. 
그날 조금 많이 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겁 많고 소심하고 나이브한 제가 도심을 뛰어다니는 학생시위에 참가하게 된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꽤나 괜찮은 선배들의 꼬임(?)이나 똘똘한 동기들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안하던 마음이 무신경했던 500원의 기억 때문에 접어졌습니다. 제대로 된 의미의 정권교체가 이미 있었지만 그 전과 후를 갈라보기엔 제 삶이 짧았지요.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두들겨맞고 쫓겨나는 철거민이 있고, 죽음으로 말하는 노동자가 있고... 하늘은 맑은데 그늘은 여전히 그늘이고 오히려 더 깊어보였습니다.

개표부정...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겨울에도 이번에도 개표참관으로 지켜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규정, 좀더 촘촘하게 짜넣어야 할 것 같은 관리상황은 있지만... 
이제 멈추어주었으면 바라지만, 하지만 굳이 비난하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좌절도 책임도 다른 누구에게 넘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에... 저 역시 심장이 뛰는대로 꿈틀거려본 기억이 있기에... 노동자들이 줄줄이 목숨을 끊었던 어느 해 가을, 저는 종로 대로를 막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든 시위대의 앞쪽 줄에 서 있었습니다. 수년만에 화염병이 등장했다고 언론이 보도하고... 관련자를 엄벌하겠다던 그 날이었습니다. (화염병은 써보지 못하고 거의 박스 채 경찰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초라한 불과 몇명의 사수대가 쇠파이프로 아스팔트를 긁어댈 때 튀어오르던 불꽃이 기억납니다. 맞은편에서 전경들이 진압봉을 치켜들고 달려나올 때 제가 얼마만에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는지 누군가의 머리가 터지고, 정신을 잃을 듯 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우는 처음 보는 어린 아가씨의 손을 잡아 끌고 골목길로 달리다가 멈췄을 때 여전히 울부짖던 그 소녀를 두고 저를 향해 황망한 눈빛으로 '저 이는 왜 저런가' 묻던 단병호위원장...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영화 필름을 한칸씩 빛에 비춰 볼 때처럼 기억합니다. 
그리고 기억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가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세상이 좋아지기를 기다려야 했는지, 전경이 아니라 탱크가 와도 뒤돌아 뛰지 않고 버텼어야 했는지 저는 가끔 고민합니다. 

이미 너무 추웠던 5년이 지나고 또다시 겨울이 옵니다. 자게에서 모호하게-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요- 우리라고 부를 수 있었던 님들과 저에게도 다시 긴 겨울이 옵니다. 우리는 묻어두었지만 긴긴 인내와 생명력을 지닌 씨앗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썩어 없어질까요. 
원한 적은 없지만 길고길고 또 긴 겨울을 보내보니, 겨울은 끝나 않지만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은 여전히 죽지 않고 묻혀있습니다.

가볍게 맥주 한잔이라고 생각했는데 집들이에 쓰고 남은 맥주 피처가 저를 취하게 합니다. 결이 다르고 그래서 누구를 지지했고 누구를 지지했지만... 자게에서는 막장가족드라마 며느리를 응원했고, 죽고 싶어요 엉엉 글에 힘내라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던 마음 따뜻한 많은 님들... 대선 승자는 승자의 만족 속에 패자는 와신상담 속에 그리고 잊혀진 자들은 가진 것 없기에 더 절실하게 품을 수 밖에 없는 희망 속에서 가진 것 없고 가장 약한 사람들도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그날이 오기까지 한땀한땀 스스로의 생활을 다졌으면 합니다. 
   
IP : 221.160.xxx.51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건배
    '13.1.16 3:20 AM (211.234.xxx.57)

    동년배, 비슷한 마음결, 눈물이 뭔지 아는 나거티브님에게 건배.
    저는 맥주 캔 따고 영화 한 편 보고 잡니다. 왜 봤던 영화에 자꾸 손이 가는 걸까요? 오늘 제가 보려는 영화는 굿윌헌팅.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영화를 켭니다.

  • 2. 나거티브
    '13.1.16 3:51 AM (221.160.xxx.51)

    건배님/ 덕분에 무플을 면했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할 수 있을 때, 더이상 마음이 아리지 않을 때가 오긴 올까요?(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 3. 플럼스카페
    '13.1.16 7:12 AM (211.177.xxx.98)

    나거티브님 오랜만이시네요.^^* 맞죠? 아닌가 제가 오신걸 못 보았었나요?
    집들이 하신 거 보니 이사하셨었나봐요. 바쁜 새해 맞이하셨네요.

  • 4. 나거티브님,안녕~
    '13.1.16 7:47 AM (121.130.xxx.30)

    기다리고 있었어요~
    글이 안 올라와 염려가 되면서도
    어디선가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계실거라 생각했어요.

    경로와 방법에 있어서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다같이 잘사는 세상을 꿈꾸는 건 매한가지잖아요.
    앞으로 자주 뵈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231692 포트메리온 어느게 제일 좋은가요? 2 아래질문녀 2013/03/19 1,805
231691 아기들도 유독 안 따르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죠? 7 답답 2013/03/19 2,119
231690 엊그제, 집안에 있던 엄마의 휴대폰이 없어졌다는~~ 1 궁금 2013/03/19 1,585
231689 술 먹으면 꼭 이런 골뱅이 유형들 있다! lsatan.. 2013/03/19 935
231688 커피메이커 커피통(?)이 스테인레스인 것 쓰는 분 계신가요? 2 램프의요정 2013/03/19 1,241
231687 '성매매법과 접대비 상한제로 국내 소비가 위축되었다'던 사람을 .. 3 2013/03/19 758
231686 세잌스피어 햄릿? 연극과 뮤지.. 2013/03/19 560
231685 스카프 활용하기! 20 스카프 2013/03/19 2,717
231684 탈아입구와 문화사대주의에 관한 작은 생각... 10 신둥이 2013/03/19 1,135
231683 고딩(남) 옷타령 4 고딩맘 2013/03/19 1,135
231682 집에서 홍삼 만들어 먹을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2 홍삼 2013/03/19 894
231681 쇼핑몰관련글좀찾아주세요 써니큐 2013/03/19 533
231680 화초는 역시 햇볕이 가장 중요한가봐요.. 3 .. 2013/03/19 1,535
231679 손님접대용 컵...어느 브랜드가 좋을까요? 2 마님 2013/03/19 1,259
231678 생리를 열흘째 하고 있어요 5 이런경우 2013/03/19 4,071
231677 호계동 선경이나 신동아 살기 괜찮을까요? (학군도) 3 평촌 2013/03/19 1,035
231676 타임스퀘어 맛집 추천 좀 해주세요~ 3 타임 2013/03/19 2,117
231675 헉~며느리 살해 충격적이네요 7 왜이러지 2013/03/19 4,106
231674 한경희스팀청소기 as 문제 답좀 주세요 5 열폭 2013/03/19 3,126
231673 와플팬 사면 잘 사용할까요? 5 .... 2013/03/19 2,107
231672 프라다 VS 멀버리 지갑 좀 골라주세요 ㅠㅠ 10 브이아이피맘.. 2013/03/19 2,324
231671 학부모 상담 갈때요.. 9 초보엄마 2013/03/19 2,716
231670 부산 광안리삼익단지 벚꽃 언제가 가장 피크일까요? 3 ... 2013/03/19 651
231669 고3 총회 보통 가시나요? 4 의견 2013/03/19 1,886
231668 사돈 팔촌까지 자랑 1 감정노동 2013/03/19 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