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2번을 찍은 사람이고 당연히 문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가 제대로 멘붕 온 사람입니다.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어요. 박근혜가 어떤 사람인지 딴 거 다 떠나서라도 그 토론실력만 봐도
그 실력으로 똑똑하고 영악한 세계 각국 정상들이랑 단독회담이라도 하면
횡설수설 어버버만 하다가 FTA 불리하게 체결해놓고도 못 알아채는 거 아닌지, 일본한테는 독도 기냥 넘겨주는 거 아닌지, 밑에서 그냥 하라는 대로 따르는 거 아닌지 걱정되지 않나? 설마 저 능력을 봤는데도 박근혜한테 표를 주는 건 미친 사람들이나 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저의 오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깨달아지는 게 있습니다 (순전히 저의 주관임!)
전 과거 노무현을 뽑았던 사람은 문에게, 이회창을 뽑았던 사람은 박에게 투표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리석었죠)
게다가 인터넷의 활성화로 새롭게 계몽된 층, 40시간을 걸려 주권행사를 한 해외거주자들, 자식의 설득에 항복하신 부모들까지 합하면 이번에 당연히 문재인이 된다고 믿었습니다만..
세상엔 부동층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세상은 새누리 지지자와 비새누리 지지자로만 구성된 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각각 대략 1/3씩을 차지한다고 치면 부동층, 즉 누가 꼭 당선돼야 한다고 목메지 않는 사람들이 1/3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람'에 따라 투표를 합니다.
제가 슈스케를 무척 즐겨보는데
제가 슈스케 마니아다, 문자투표도 무지 열심히 한다 라고 하면
누구 응원하는데? 누구 팬인데? 이럽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그때 맘 내키는 사람한테 합니다. 그날 잘한 사람한테 그날 표를 주고 싶은 사람한테요.
이렇게 얘기하면 엥? 그게 뭐야? 근데도 그렇게 열심히 본다고? 합니다.
꼭 누구를 응원해야 문자투표를 하나요? 저같은 사람 많습니다.
어떻게 일개 오디션 프로와 대선투표를 비교하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1/3의 사람들은 대선투표를 하긴 하지만 어차피 누가 돼도 내 생활에 큰 변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응원하던 오디션참가자가 떨어지만 울고불고 식음전폐하고 삶의 낙이 없어졌다는 둥, 직장도 나가기 싫다는 둥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팬카페 들어가면 이런 사람들 꽤 많습니다. 멀쩡한 성인들이에요)
이들을 보통사람의 눈으로 보면 웃기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그렇듯이
국민의 1/3의 사람들은 선거에 목숨 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박이 되나 문이 되나 크게 다른 거 없다. 독재는 어차피 없다. 민주주의는 이미 정착됐고 누가 집권하든 우리의 남은 삶은 비슷할 거다라고 생각해요.
아주 일부분은 맞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때그때 투표하고 싶은 사람에게 표를 주고 결과에도 그리 지장 받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다는 걸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 건
순전히 이인제라는 '바람' 덕에 가능했습니다.
갑툭튀한, 인상도 안 좋고 근본도 없고(??) 부인은 촐랑대는 사람을 도대체 누가 뽑아주나 했었는데
3김시대에 질려버린 부동층들이 '신선한' 이인제에게 97년 대선에서 무려 20%의 표를 줬습니다.
이것은 가히 획기적이었습니다. 3김 말고도 대선후보가 나올 수 있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알려줬던 인물이에요.
2%도 얻기 힘든데 무려 20%. 사람들은 사표가 될 걸 알면서도 우린 3김과 지역주의에 이만큼 지쳤다, 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이인제에게 투표했습니다.
이인제 요정이 아니었으면 김대중은 절대 대통령 되지 못 했죠.
그 다음 대선에서도 바람이 불었습니다. 노무현 바람!
이회창이라는 최고학벌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늙은 할아버지 느낌을 주는 사람 대신
젊고 친근하고 청문회 스타였으며 고졸 출신인 노무현.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것도 부동층에겐 너무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뭔가 이제 새로운 시대, 정의로운 시대가 열리는 느낌!
그때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여론조사서도 일찌감치 앞서있었고 학벌위주의 세상에서 노무현을 찍으면 뭔가 진보적인 나라가 된다는 믿음, 누구나 평등한 세상이 된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줬습니다. 거대한 바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이명박 바람이 불었죠.
경제가 어려워지고 그놈이 그놈이라는 사고가 팽배해있을 때(조중동의 왜곡 때문이지만)
최연소 ceo출신의 인물. 70년대 경제개발의 아이콘! 딴 건 몰라도 경제는 살려주겠지 하는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열망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명박을 찍었습니다. bbk나 개인의 비리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거 알고도 찍었어요. 이 사람이 우리의 구세주다 하는 바람이 이미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에요.
(이때도 비한나라당파는 울면서 정동영을 찍었죠. 1/3이요)
그리고 안철수 바람이 불었죠.
안철수는 정말 바람직한 바람이었습니다. 새누리도 민주당도 아닌, 젊고 똑똑하고 의로운 사람.
안철수가 사퇴하며 문재인을 지지했기 때문에 그 표가 대부분 문에게 갈 거라 생각한 건 오산이었습니다.
안철수 나오면 무조건 안철수! 이러다가 박근혜에게 간 표가 얼마나 많은지 저는 몰랐습니다만
상상 이상으로 많았더군요.
그렇다면 박근혜는 뭐가 새로우냐, 구태 중에서도 상구태 아니냐 이럴 수도 있지만
박근혜에겐 '여성'이라는 미끼가 있었습니다. (이제야 그게 인정이 됩니다)
솔직히 전 여자기 때문에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수꼴통들이 미쳤다고 여자를 찍겠나? 여자인 건 핸디캡이야! 이랬어요.
물론 아버지의 후광+묻지마 새누리지지 층도 엄청 많죠. 하지만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건 '부동층'입니다.
박근혜라는 인물을 떼놓고 그냥 여성대통령이라고 보면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일입니다. 기적X100입니다. 여성단체에선 감격에 오열할 일이에요.
그때그때 맘 내키는 대로 찍는 부동층 입장에선
여성대통령을 찍으면 뭔가 진일보하는 느낌, 왠지 깨끗할 것 같은 느낌,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자대통령이 나올 때가 됐지' 라고 하는 사람을
안그래도 새누리 찍을 거면서 갖다대기는.. 이렇게만 생각했었는데 이게 젊은 층과 부동층엔 먹힌 거 같습니다.
박근혜가 20대, 30대에서 30% 이상의 지지를 받은 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국 이래 최초 '여성대통령'이 참신하고도, 나아가 여성에게 투표하는 자신이 젊고 탈권위적인 느낌을 줍니다.
박정희의 아들이 나왔으면(꼭 박지만을 말하는 게 아님) 대통령 못 됩니다. 새로움을 주는 미끼가 없기 때문에.
여자라는 성은 박근혜에게 엄청난 플러스가 됐습니다. 저는 이제 인정이 됩니다.
안철수가 나왔으면 대통령 됐습니다. (저 안지지자 아님, 오히려 문지지자에 가까움. 단일화 논란 땐 침묵했음)
안철수 나왓어도 어차피 안 됐다고 하는 저쪽 사람들은 우리에게 패배감, 총체적 무력감을 주기 위해 하는 소립니다.
아무리 언론장악 됐어도, 그들이 부정투표를 했어도 안철수 바람이 한 번 세게 분 이상, 대통령 됐습니다.
바람은 불었을 때 확 땡겨야 합니다. 아무때나 부는 바람이 아니기에.
그래서 지금의 패배가 정말정말 쓰라립니다.
그래도 저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또 어떤 바람이 불지 모르니까요.
앞으로 민주당은(혹은 다른 당이라도) 1/3의 부동층을 어떻게 흡수하느냐에 모든 걸 걸어야 합니다.
1/3의 묻지마 지지자(저 포함)에게만 어필하는 공약, 처절한 호소는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 소홀히(?) 대한다 해도 감수할 겁니다.
중요한 건 정권교체니까요.
5년후에도 안철수 바람이 유효할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선 대안이 안철수밖에 안 떠오릅니다. 그만큼 거대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 그 밖에는 없을 거 같습니다.
본인도 정치를 계속 하겠다고 했고요.
노인이 너무 많아서 이젠 글렀다. 경상도 인구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 언론이 장악된 이상 앞으론 쭉 새누리일 거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그렇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바람이 앞으로 얼마든지 불 수 있습니다.
묻지마 새누리 지지자는 전체 인구의 1/3이고
바람 탄 사람에게 투표하는 사람들도 1/3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