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자택 취득과 관련해 박 후보는 10·26 이후인 1982년 성북동 자택을 매입했다가 1984년 이 집을 팔았다. 이 집을 취득한 경위에 대해 박 후보는 당시 경남기업 회장 신기수씨가 무상으로 제공해준 것이라고 5년 전에 전 국민 앞에 털어놨다.
이와 관련해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7월 19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검증청문회에서 “부모님이 유일하게 남긴 재산인 서울 중구 신당동 집으로 동생들과 이사했으나 집이 좁아서 꼼짝 못했던 상황이었다”며 “이 사정을 알고 신 회장이 아버님과의 인연이 있어 도와주겠다며 유품을 보관할 장소가 있다고 해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그는 ‘증여세를 냈느냐’는 지적에 “법적으로 세금 관계나 모든 것의 처리를 신 회장이 알아서 한다고 해서 믿고 맡겼다”고 해명했다. 결국 증여세나 취득세 납부 여부 자체를 본인 스스로도 모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더구나 등기부등본 상엔 ‘증여’가 아닌 ‘매매’로 기재돼있다. 석연치 않은 취득경위인 것이다.
당시 박 후보는 영남대 이사를 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신 회장의 경남기업이 영남대에서 4건의 수의계약을 수주하는 등 대가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쏟아졌다. 박 후보는 ”학교 발전에 도움이 되는 분들 중 신회장도 거론돼 추천된 것으로 안다”며 “(영남대) 생활관 건축 의결은 내가 취임한 80년 4월 이전의 일이다. 신 회장이 영남대 건설을 맡은 것은 수의계약이 아니라 경쟁입찰로 기억한다”고 답했었다.
성북동 집을 ‘공짜로’ 받았다는 박 후보의 해명과 집을 지어줬다는 이의 설명과는 다소 엇갈리는 대목이 나타난다. 5년 전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경선 과정에서 박 후보의 의혹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검증에 나섰던 신동아는 2007년 6월호와 7월호에서 신 회장과 인터뷰한 내용을 게재했다.
신동아에 따르면 박근혜의 성북동 330-416번지 자택의 ‘폐쇄등기부 등본’을 확인한 결과, 박근혜는 1982년 8월25일 성북동 330-416 번지의 집을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매입해 이주한 것으로 돼 있다.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은 신동아 2007년 6월호와 인터뷰에서 이 집을 지어서 박근혜 후보에 주라고 전두환이 지시했다고 말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가 살 집을 지어달라고 내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품이 많으니까 그걸 다 보관할 수 있게 지어달라고 해서 일부러 지하실을 크게 만들었다. 정확하게는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직에 오르기 전에 지시를 받았다”
다만 신 회장은 “돈 받고 지었다(…)누가 줬는지 모른다. 얼마인지도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신 회장은 이어 신동아 2007년 7월호와 인터뷰에서 전두환의 지시에 대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 ‘지시’라기보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게 보내온 것”이라며 “그 말을 듣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기수 회장은 전두환 지시로 박 후보에게 집을 지어줬다 하는데, 박 후보는 신 회장이 아버지 인연으로 알아서 지어준 것이라고 해명한 것이다. 전두환의 지시였다는 신 회장의 인터뷰 내용이 사실이라면 박 후보의 자택 취득과정은 신군부에 의한 부당하게 축재한 것이라는 비판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신 회장은 박 후보의 영남대 이사 재직시절 집을 지어주고 본인도 영남대 이사가 된 데 이어 본인의 경남기업이 영남대 병원 시공사가 된 시점과 비슷한 이유에 대해 “박 전 대표의 성북동 집 가격이 얼마나 된다고 내가 영남대 병원 공사를 달라고 요구했겠나”며 “성북동 집이 있던 일대는 원래 대한교육보험(지금의 교보생명) 소유여서 흔히 ‘대교단지’라고 불렸다. 대한교육보험에서 그 땅을 등기 분할해 팔았는데 분양이 잘 안 됐다. 그래서 경남기업이 일괄적으로 고급주택을 지어 팔았다. 박 전 대표 집도 그중 하나였다”고 해명했다.
이를 두고 세계일보는 그해 7월 20일자에서 ‘박 후보가 법적 문제 알아서 한다고 해서 맡겼다’는 대목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답현해 실제로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넘어간 것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일보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왜 박 전 대표에게 성북동 주택을 지어 무상으로 제공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라며 “신 회장이 박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에 집을 줬다지만 다른 거래나 압력은 없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일보는 특히 “‘신 회장측에 법적 문제나 세금 문제를 맡겼다’는데 박 전 대표가 알고도 눈감아준 것인지, 정말 몰랐던 것인지도 불분명하다”고 의심했다.
김현 민주당 대변인은 최근 “박근혜 후보의 성북동 자택 무상취득 의혹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다른 의혹은 바로 박정희 살해 직후인 1979년 12월 청와대에서 ‘전두환한테 받은 6억 원’이다.
박 후보는 전국에 생중계됐던 지난 2007년 7월 19일 검증청문회에서 ‘전두환한테 9억을 받은 뒤 김재규 수사 격려금으로 3억 원을 돌려줬다는 얘기가 있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6억 원을 받았습니다. 수사 격려금으로 3억 원을 (되돌려) 준 사실은 없습니다. 경황이 없을 때였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측에서 심부름을 왔다고 하는 분이 저를 만나자고 해서 제가 청와대 비서실장실로 갔습니다. 거기서 저에게 봉투를 주면서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시다 남은 돈이다, 아무 법적 문제가 없으니까, 생계도 막막하고 하니까 생계비로 쓰라’고 전해줘서 감사하게 받고 나왔습니다”.
결국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돈 아닌가, 공금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당시 한나라당 검증위원들의 추궁에 박 후보는 “공금이라기보다 격려금으로 어디 주시기도 했던 돈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그런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쓰다 남은 것이고 유자녀가 쓰는데 아무 문제가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 나로선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사후 청와대 금고에서 나온 돈이 공금이 아니며, 법적인 문제도 없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신동아 2007년 6월호는 “(청와대 집무실) 책장 안 비밀금고엔 9억원의 자금이 있었다. 전두환은 이 돈을 유자녀 생계비로 박근혜에게 줬고 박근혜는 이중 3억원을 김재규 사건 수사 격려금으로 전두환에게 되돌려줬다”고 썼었다.
이렇게 받은 돈을 박 후보는 어디에 썼을까. 박 후보는 청문회에서 “부모님 기념 사업하는데 많이 썼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은 그 다음 날짜 신문에서 “당시 6억 원은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10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박근혜 후보의 23년 전 인터뷰 전문을 공개해 반향을 일으켰던 뉴스타파 제작진 최경영 언론노조 민실위원은 “1974년도 대통령 연봉 300만 원 정도 되기 때문에 박정희가 순수하게 봉급 만으로 6억 원이라는 돈을 모을 수가 없을 만큼 막대한 돈”이라며 “이런 막대한 돈을 받았는데도 ‘생활비로 쓰라 해서 받았다’는 것은 국가 돈이 아버지 돈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최 위원은 “2007년 경선 때의 발언은 박 후보가 여전히 ‘공사’ 구분이 안되는 사람임을 보여준 것”이라며 “이보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대선후보로 나선 이의 이러한 인식에 대해 공중파 방송을 비롯한 어느 곳에서도 따져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이상한 나라”라고 강조했다.
김현 민주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박근혜 후보가 10·26 직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청와대 집무실 제1금고에 있던 돈 6억 원을 받은 일에 대해서도 책임 있게 해명해야 한다”며 “당시 청와대 금고에 있던 자금은 불법적으로 조성된 통치자금이고, 6억 원이라는 액수 또한 현재의 시가로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에 달한다”고 비판했다.
김 대변인은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강탈된 장물인 정수장학회, 영남대, 육영재단 문제에 대한 책임회피, 5·16쿠데타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는 역사인식, 동생인 박지만-서향희 부부의 삼화저축은행 연루의혹에 대한 규명 거부도 동일한 잣대로 검증돼야 한다”며 “이 같은 문제들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꿈꾸기에는 중대한 결격사유이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