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들은 그 용어 딱 하나만, 그것도 사전적 의미로 읽기 보다는
그 용어들의 시사적 의미, 시대적 의미 등을 감안하고 읽을 때
더 정확합니다.
인도인이 영국 지배 시절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한국인이 일본 지배 시절이 차라리 복이었다고 말하는 것,
대만인이 일본 지배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고 말하는 것,
여러 아프리카 나라 사람들이 차라리 영국령, 프랑스령 시절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
그냥 글자 그대로 사전적으로만 읽으면 다 헛소리 같고 미친소리 같지만
콘텍스트 리딩을 하면 달라질 수도 있는 겁니다.
인도의 경우,
영국 지배 시절 이전에는 무굴제국이 약화되고 인도 각 지역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처럼 이놈 저놈이 다 내가 왕입네 여긴 무슨 공작령입네
하며 군웅할거 하던 시절입니다.
전기도 수도도 전화도 철도도 제대로 보급돼 있지 않아 어디 다니기도,
민초들의 경우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도 아주 어려웠던 시절이죠.
하지만 17세기 이후 영국령, 프랑스령이 된 곳들에서는 사회 기반시설이
개선되고 정기적인 관리 등용시험이 실시되고 관리들 또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용병이 된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게 되어 생활이 안정되고
교육기관 병원들도 늘어서 삶의 질이 나아진 곳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현재 인도의 중상류층을 이루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시절 그런 교육의 보급과 사회기반시설 보급에 의해 덕을 본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제국주의 지배 시절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제국주의 시절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은, 그 앞의 엉망진창 지역왕들 지역영주들
지방군벌들의 군웅할거 시대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고 왕조시대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말인 것이지 현대에 국민주권을 가지게 되고 보다 향상된 생활수준을 누리는 지금보다
오히려 그때가 나았다는 말은 아닌겁니다.
한국이나 대만의 처지도 비슷합니다.
워낙 제국주의 시대 이전의 정권 또는 왕조가 무능력했고 국민들에게 해주는 것이
없었다 보니, 20세기 초 태생이거나 그 시절에 젊은 시절을 보낸 노인들한테는
그 시절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겁니다. 그 앞 시대가 워낙에 한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들이 젊었던 그 시절에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시대보다는 사회가
훨씬 안정되고 교육 및 공직 진출 기회도 많아져 잘 사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병원도 갈 수 있고 수돗물도 나오게 되고 기차 타고 서울구경도 다녀올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전 시대보다'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지금보다 낫다는 말이 아니라요.
조선의 경우 몇가지 이유가 더 작용합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 19세기까지 종주권을 갖고 있던 상국은
중국이었고 이 중국은 자기 나라 수도에조차 상하수도 전기전화 보급을 해내지 못했던
전근대 왕조국가였습니다. 중국을 상국으로 섬겨서 뭐 그리 덕볼 게 없었죠. 뭘 그리
해 줄 능력도 없었고요.
하지만 청나라는 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위해, 마지막까지 자기들을 상국이라고
부르며 섬겼던 조선을 끝까지 쥐고 있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전쟁에 져서 놓은 거고요.
러시아는 여러 이유로 유럽에서뿐 아니라 북동아시아에서도 남하 정책을 폈고
조선반도를 무척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러시아가 러일전쟁에 이겼다면 아마
블라디보스톡은 지금보다 훨씬 쇠퇴한 작은 도시가 되었을 거고 흥남이나 원산항이
블라디보스톡 서너 배는 큰 거대 항구가 됐겠지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러시아의
문명 수준은 일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은 자력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는 나라였고,
중국의 속방신세를 유지하거나 러시아에 넘어가거나 아니면 일본에 넘어가거나였습니다.
거기서 '그나마'
청나라 속국 신세로 남거나 러시아에 넘어가는 것보다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겁니다.
영국령이나 미국령이 되었다면 더 나았겠지요.
물론 가장 나은 것은 스스로 문명개화해서 일본처럼 열강이 되는 것이었을 거고요.
하지만 당시 조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열강들의 리스트에 영국이나 미국은
없었습니다. 조선의 밸류가 그것밖에 안 되었던 겁니다.
지금 한국 국민들의 수준이 새누리당 박그네 뽑는 수준밖에 안 되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조선의 수준은 그것밖에 안되었고,
별다른 산물도 나지 않고 별 메리트도 없는 땅이었으나 러시아와 일본에게는
왕조의 운명을 건 전쟁을 할 정도의 가치가 있었기에 두 나라는 전쟁을 했고,
이긴 자가 조선을 차지한 겁니다.
세계사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우리민족 만세주의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더군요. 좀 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한국사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요.
이곳에 올리긴 좀 어울리지 않는 글이네요, ^^;
근데 쓰는데 들인 시간과 공이 아까와서 올리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