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흉한 세상이죠.
낯선 노크 소리도 무서워요.
제가 직접 겪진 않았어도 이런 저런 무서운 기사를 접하면서
낯선 사람은 무조건 경계하게 되고 어려운 사람도 쉽게 못 돕겠고 그래요.
그런데 방금 택배 하나를 받으면서 아.. 이 아파트.. 믿고 살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방광역시 구시가지에 있는 20년도 넘은 오래된 아파트에요.
지하 주차장도 없어서 밤마다 주차전쟁이고 엘리베이터고 어디고 씨씨티비도 없고
워낙 낡아서 어린이 놀이터도 삑삑 녹슨 소리나는 미끄럼틀 두어개가 다에요.
소-중-대형 평수가 골고루 있는 아파트인데 저 고3때 부모님께서 이 아파트 중형대에 이사오셨다가
한 5년쯤 지나 같은 아파트 대형 평수로 옮기셨고 그러다가 제가 결혼을 하게 됐는데
저나 남편이나 출퇴근도 쉽고 시댁도 이 근처라 마침 값이 맞는 소형평수가 나와서 여기서 신혼살림을 차렸어요.
그러다보니 저는 이 아파트 주민이 된지 벌써 20여년 되어가네요. ㅎㅎㅎ
재밌는건요, 이 아파트에 저와 같은 역사를 가진 가정이 꽤 된다는거에요.
3대가 한 아파트에 살기도 하고, 친척이 산다던가, 대부분 10년 이상 이 곳에 거주하신 분들..
저희 집만 해도 저희 친정, 저희 이모네, 외숙모 친정어머님, 이렇게 살고 있네요.
그러다보니 아파트에 살아도 한다리, 혹은 두다리만 건너면 아.. 몇 동 사는 누구누구네? 이렇게 알게 돼요.
그래서 때론 아파트에 살고 있음에도 사생활 보호가 잘 안되기도 하구요.
한번은 저희 남편이 밤 중에 술을 과하게 마시고 단지 엘리베이터를 잘못 탔다가 다시 내렸을 뿐인데!!
그 다음 다음날인가.. 저희 엄마가.. 김서방 엊그제 술 많이 마셨다면서..? 그러시는거에요. 컥..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도 좀 눈치 보이고, 심지어는 택배가 하루에 몇개씩 오는 날은 낯 부끄럽고 그래요 ;;;
이런 이유로 아.. 왠지 좀 불편하다.. 어디 신시가지로 이사갈까.. 알아보기도 했는데,
연달아 애 둘을 낳고 계속 이 아파트 살다 보니 그런게 또 장점이 되네요.
한번은 고등학생들이 놀이터에서 담배피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지나가시다가
그 중에 한 녀석 뒤통수를 턱!! 치시면서 야 이놈아 내가 너를 기저귀 찰 때 부터 봤는데
니가 언제 다 컸다고 벌써부터 담배질이냐, 너희 엄마아빠 알고 계시냐 어쩌냐.. 훈계를.. ㅎㅎㅎ
지방이라 그런지 택배기사님들이나 동네 음식점 배달 오시는 분들이 수년 째 거의 바뀜이 없어서
택배나 배달 음식 받을 때 경계를 좀 덜하게 되는 점도 있구요.
방금 택배 주고 가신 아주머니는 저희 둘째 보면서 아이고 갓난이가 벌써 이렇게 걷네~ 하고 가시네요.
그러다보니 밖에 나가선 좀 흉흉할 지언정, 아파트 단지 안에서 돌 때는 서너명에 한명은 아는 얼굴이라
아 다들 이런 이유로 그럭저럭 여기서 살다보니 장기거주자가 된건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베스트 글 읽으면서
저도 애기 둘이고, 남편도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고, 씨씨티비도 없는 아파트고 해서
움찔움찔.. 아 혼자 집에서 애기들이랑 있는거 무섭다.. 생각했다가
그나마 주변 환경이 이런 아파트라 좀 다행인가 싶기도 하구요.
저 어릴 땐 열쇠를 목걸이처럼 만들어 걸고 다니면서
저 혼자 문 여닫고 다니고 아무 집이나 문 열린 집 친구 있으면 들어가 놀고 그랬는데
그게 불과 한 30여년 전인데.. 그새 우리 사회가 참 많이 변했죠.
딸만 둘이라 세상 험한 뉴스 하나씩 접할 때 마다 우리 애들 무탈하게 잘 커야 할텐데 하는 마음도 들고..
믿고 살고 서로서로 보호하고 보호받는 사회가 되어야 할텐데 하는 마음도 들고..
가을 하늘 맑은데 택배 하나 받고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