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어제 농구를 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아침에 보니 어제보다 더 퉁퉁 부어있었다.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았다.
아내가 오늘 동사무소에 가야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병원에 갈 때 같이 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 오늘 동사무소에 간다고 했지? 몇 시까지 가야 돼?"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 말 한마디가 초래할 결과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아내는 눈빛이 변하면서 자기가 어제 실컷 한 얘기는 도대체 어떻게 흘려 들은 거냐고 언성을 높인다.
아무리 기억해도 몇 시에 간다고 얘기한 것은 기억이 안 나서 물어본 건데 어쩌라구...
알고 보니 아무 때나 가서 잠깐 투표하고 오는 거라고 한다.
그냥 "아무 때나" 라고 대답하면 될 일인데 아내가 나를 죽일 듯이 몰아 부치길래,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받아 버릴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눈 뜨자 마자 이게 무슨 짓이냐 하는 생각으로 이내 참고, 몰라서 물어본 것이라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그걸로 아내는 가라앉지 않았고, 계속 고성이 이어지길래 나도 그만 폭발했다.
도대체 왜 그게 화를 낼 일이냐?
난 정말 네가 오늘 몇 시에 가야하는 건지 얘기를 못 들었다.
아내의 주장은,내가 자신의 얘기를 흘려들은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별 관심없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들려 줄 때 귀만 열어놓고 정신은 다른 곳을 유랑하고 있을 때도
있기는 하다.
아내의 모든 얘기에 리액션을 해줄 만큼 나의 육체적 정신적에너지가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피곤한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생존방식이다.
평소에 아내가 말하는 방법은 나와는 좀 다르다.
나는 핵심만 간결하게 말하는 스타일이다.만약 상황을 바꿔 오늘 내가 약속이 있었던 거라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내일 중 아무 때 동사무소에 가서 투표해야 돼."
얘기의 핵심은 '아무 때', '동사무소', '투표' 이 세가지다.
그런데 아내가 이렇게 한 문장에 핵심어를 다 넣어서 간결하게 말하는 것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각 핵심어와 관련된 이야기가 한보따리 이상이고, 가끔은 가지치는 이야기도 한다. 말의 성찬이다. 나는 그중에서 하나씩 핵심을 끄집어 내는 수작업을 해야 한다.
내가 어제 잡아낸 핵심어는 유감스럽게도 "동사무소" 한가지 였고,
이것은 결국 나의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망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내와 언쟁 중에 하도 억울해서
"내가 너보다 공부 잘했다. 니가 말을 똑바로 했으면 내가 똘추가 아닌 바에야
그 쉬운 내용을 못 알아 들었겠냐?"라고 쏘아 부쳤다.
그런데 이 말이 새로운 불씨가 될 조짐이다.
어찌어찌 해서 아침 사태는 일단락 되고 오후에 같이 마트에 갔는데,
오늘 저녁에 뭐 먹을까? 하는 내 물음에 아내의 답변은
"내가 뭘 알겠어, 공부 잘하는 당신이 다 결정해"
아.. 이건 또 얼마나 갈려나.정말 복잡한 세상 ...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