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 읽어보시라고 퍼왔습니다.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1310911&cpage=2... =문재인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1310919&cpage=2... =문재인
‘돌출’ 노무현과 정반대 성격의 30년 知己
⊙ 1982년 노무현과 변호사 사무실 열어… 노동, 인권 변호사로 활약
⊙ 지난해 梁山 보궐 선거 때 釜山 재야인사들이 집 앞에서 텐트치며 농성
文在寅
⊙ 58세. 경남고, 경희대 법대 졸업.
⊙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변호사모임 대표, 노동자를 위한 연대부설
노동상담소 소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 現 노무현재단 이사장, 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조선일보》와 미디어리서치는 지난 6월 3일 내년 대선에 대한 설문 조사를 벌였다. 문재인 이사장은 처음으로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다음 대통령으로 누구를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전체 응답자의 3.3%가 문 이사장을 지지한다고 답변했다. 정동영(鄭東泳) 민주당 최고위원(3.2%), 김문수(金文洙) 경기지사(3.0%)와 비슷하고, 정몽준(鄭夢準) 전(前) 한나라당 대표(2.4%)보다는 앞선다. 그가 출마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 선거에 한 번도 출마한 적이 없는 정치 신인(新人)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주목할 만한 지지율이다. 정치권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는 것이 이해 갈 법하다.
문재인의 가능성은 노무현+ 反 이명박
여론조사 전문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중견 언론인은 ‘문재인의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노무현(이하 정치인들 존칭 생략), 김대중(金大中), 이명박(李明博), 박근혜(朴槿惠) 중에 어떤 유형의 정치인을 가장 선호하는가의 조사를 하면, 통상 노무현이 1등입니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비슷하고, 김대중의 지지율이 가장 떨어집니다. 노무현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그에게 심정적으로 끌리는 집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과 김대중 지지율을 합하면 절반이 넘죠. 노무현을 심정적으로 좋아하고 지지하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그의 후계자를 찾아 헤맵니다. 처음에는 정동영인 듯 보였지만 실패했고, 한동안 유시민(柳時敏)에 머물렀죠. 하지만 유시민의 삐딱한 이미지와 4ㆍ27 재보궐 선거 패배로 그에게서 돌아섰습니다. 손학규(孫鶴圭)를 노무현의 연상선상에서 보자니 무리가 있고, 안희정(安熙正), 김두관(金斗官)은 현역 지사인지라 현실적으로 내년 대선에 나올 수 없습니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찾아다니다가 ‘문재인 어때?’라는 시선이 생기는 중입니다. 전국적인 지지도는 턱없이 낮지만, 노무현의 계승자라는 점에 이의를 달 수 없는 인물이니까요.”
하지만 문재인이 단순히 ‘노무현세력의 계승자’에만 머문다면 정치권의 시선이 이렇게 쏠릴 리가 없다. 그에게는 ‘거제(PK) 출신’이라는 무시 못할 장점이 있다.
정치 컨설팅을 하는 한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부산 출신이다.
“문재인이 단순히 노무현의 계승자라면 이 정도의 관심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에게는 PK 출신이라는 강점이 있습니다. 부산은 그 어느 때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TK여서 우리가 밀렸다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PK 출신이 나서면 소속 정당에 상관없이 그 후보를 지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문재인입니다.”
“(정치)도움이 된다면 피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기류 때문인지 문재인 이사장의 언행(言行)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문 이사장의 최근 행보 중 4ㆍ27 재보궐 선거 때의 일이다. 그는 김해을 후보단일화 문제가 난관에 부딪히자, 직접 나서서 극적인 단일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 이사장은 “내가 직접 정치는 하지 않더라도 (야권통합의) 촉매 역할을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지난 5월 1일 봉하마을 기자 간담회에서는 본인이 야권의 통합 후보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답변하기 난감하다”고 했다. 지난 5월 2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대선후보가) ‘짠’하고 나타나서야 되겠느냐”는 우회적인 표현으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열흘 뒤인 지난 5월 30일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망론’이 부상하는 것과 관련해 “혹시 도움이 된다면 피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해온 그로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다. 자신의 발언이 뉴스거리가 되는 것이 영 부담스러운 탓인지, 그는 요즘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있다.
기자는 지난 6월 7일에 그가 근무하는 부산 법무법인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법무법인 관계자는 “문재인 이사장이 당분간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며 조심스러워했다. 거듭 요청하자 잠시 시간을 달라더니, 이 관계자가 문 이사장의 방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문 이사장이 거기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방문을 두드린 지 10초도 되지 않아, “어렵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고민 중일 것’이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청와대 출입기자로 그를 알고 지낸 K씨는 “그 양반 성격에 저 정도 말을 하는 것이 놀랍다. 조심스럽지만,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마음에 이미 변화가 생긴 것으로 봐도 좋다”고 말했다.
점잖은 신사의 전형
정치에서 2인자는 늘 1인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당연히 그의 프로필이 대중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문재인 이사장 역시 노무현이라는 거대 그늘에 숨겨져 왔다.
문재인은 어떤 사람일까.
문 이사장과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사람, 청와대 재직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 부산에서 활동 중인 선배 변호사, 고등학교 동창 등 그의 지인(知人) 십여 명으로부터 그에 대해 알아봤다.
그의 인생을 간추려 말하면 이렇다.
경남 거제 출신으로 경남고를 졸업하고 경희대 법대 졸업 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 무렵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30여 년을 함께 지냈다. 인권ㆍ노동 변호사를 같이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자 청와대에 따라 들어가 비서실장까지 지냈다. 노 대통령 퇴임 이후 낙향해 변호사 생활로 복귀했고, 노 대통령 장례 후에 만들어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 자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
취재를 해보니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은 대체로 일치했다. ‘문재인은 합리적이면서 똑 부러지고, 교과서적이며, 정치 야욕이 없고 내성적’이라는 것이다.
그와 20여 년 이상을 함께 지낸 C씨는 익명 보도를 요청했다. C씨는 문재인 이사장은 물론, 부인, 아이들의 근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최측근 인물이다.
C씨는 ‘점잖은 신사’라고 표현했다.
“문재인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사람입니다. 여태까지 그가 흥분하거나 목소리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는 꼿꼿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죽음으로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문재인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에게 문재인은 친구이자 동지 중 한 명이었지만, 인간관계가 노 대통령보다 좁은 문재인에게 노무현은 전부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노 대통령의 장례를 치른 사람이 문재인입니다. 그는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은 언제든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고, 교과서적인 사람입니다. 개인 생활도 꼬박꼬박 챙깁니다. 외박을 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정적이고, 틈틈이 음악, 미술 감상을 하는 등 사생활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점잖은 신사의 전형입니다.”
고교 졸업 40주년 행사에도 불참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를 출입한 《조선일보》 신정록 기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총평했다.
“문재인은 담백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죠. 소신이 확실하고 말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언(直言)을 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정치적 야욕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청와대에서 근무를 하던 시절에도 본인의 훗날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답답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균형을 중시하지만, 리버럴(자유스러운)한 부분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의 자서전을 출간한 가교출판의 정해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은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책 출간 과정에서 만날 때마다 그는 늘 젠틀(Gentle)했고, 저녁식사를 겸한 술자리에서조차 농담하거나 실수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자서전을 내면서 원고의 토씨 하나하나까지 본인이 일일이 체크할 정도로 꼼꼼한 성격입니다.”
문재인 이사장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제한적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취재에 응한 사람 중에서 문 이사장의 모교(母校)인 경남고등학교 출신들과 부산 지역의 변호사는 그에 대해 좋은 평을 하면서도 약간의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문 이사장의 경남고 4년 선배로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J씨의 얘기다.
“문 변호사는 착실하고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법정에서 변론을 할 때에도 할 말만 딱 하고 그만둡니다. 어떤 변호사들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지만 그에게는 그런 면이 전혀 없습니다. 한마디로 깔끔합니다. 부산에 연고를 둔 법조인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습니다.”
문재인 이사장의 경남고등학교 동기인 H씨는 “모범생 스타일인데 친구 관계가 넓지 않다.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로 동창회를 챙기지 않고, 만나는 사람하고만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강제징집당했지만 군 복무 중 모범사병으로 賞도 받아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 잘 알고 있는 C씨의 말에 따르면, 문재인 이사장의 부친은 함경남도 흥남시청 농업과장을 하다가 6ㆍ25 전쟁통에 빈손으로 남으로 내려온 피란민이었다고 한다. 이들 가족은 거제에 머물다가 다시 부산 영도 청학동에 자리를 잡았다. 문 이사장은 경제적으로 무척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C씨는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고 전해들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경남고에 입학했다.
문재인 이사장의 고교 동창이자 3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옥동훈씨는 그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범생이고, 조용한 친구였습니다. 남학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다니고, 장난이나 사고를 치는 경우가 종종 있잖습니까. 문재인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친구였습니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학생 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설마?’ 싶었을 정도로 정말 조용하고 공부만 하는 친구였습니다. 부산스럽다거나 교우 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었고, 늘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만 다녔습니다. 상당히 내성적이라고 해야 맞죠.”
그의 경남고 25회 동기 중에는 유명인사들이 더러 있다. 서병수(徐秉洙)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맹우(朴孟雨) 울산 시장, 박종웅(朴鍾雄) 전 한나라당 의원, 2011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인 건축가 승효상(承孝相)씨 등이 그의 동기 동창이다.
C씨는 “그해 졸업생들에게 물어보니 학교 다닐 때 문과에서는 문재인, 이과에서는 승효상이 톱이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고교 시절 꿈은 역사학자였지만, 그는 경희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장학금이 보장된 경희대를 택했다. 대학 시절에 학생 운동에 관여를 하게 됐고, 학생회에서 선언문 쓰는 일을 주로 했다고 한다. 당시 학생회장은 강삼재(姜三載)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
문재인 이사장은 유신반대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구속,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이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제징집이었다. 그는 특전사 제1공수에서 수중폭파조로 군생활을 했다. 문 이사장이 사병(士兵)이었던지라 눈여겨볼 대상은 아니었겠지만, 그가 특전사를 할 때 사단장이 전두환(全斗煥), 대대장은 장세동(張世東)이었다.
문재인 이사장은 사석에서 군생활 얘기를 할 때 “억지로 끌려간 군대였지만 (군대에서) 잘해서 상도 받고 했다. 군생활이 체질에 잘 맞았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고교 동창들은 문재인 이사장의 취미 중 하나를 ‘스킨스쿠버’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이는 군생활 중에 수중폭파조 훈련을 받으면서 관심을 갖게 된 때문이었다.
그의 경남고 동창 H씨는 “문재인은 상가(喪家)에서나 가끔 부딪힐 정도로 모임에 자주 나오지 않는데 스킨스쿠버를 좋아하는 친구들과는 자주 어울렸다. 부부동반 모임을 가질 정도”라고 했다.
사법고시 次席 합격
믿었던 아들이 대학에서 제적당하고, 군에 끌려가고 복학이 되지 않자 가족은 애를 태웠다고 한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문재인 이사장은 다시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제22회 사법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전달받았다. 경희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부인과는 캠퍼스 커플로 몇 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당초 문재인 이사장은 판사의 길을 걷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는 될 수 없었다. 김&장에서 변호사 제의를 받았지만, 그 역시 탐탁해하지 않을 무렵에 노무현 당시 변호사와 만나게 된다.
C씨의 얘기다.
“문 이사장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박정규(朴正圭)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노무현 대통령과 고시 공부를 같이했고, 나중에 같이 일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둘이서 사무실 준비까지 마쳤는데, 박 전 수석이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무산됐지요. 박 전 수석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문재인 이사장을 추천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문재인 이사장은 첫 만남에서 ‘통했다’는 말을 종종했습니다.”
변호사 때 쉽고 논리적으로 말해 승소율 높아
1982년에 만난 두 사람은 부산 부민동에 ‘부민’(나중에 부산종합법률사무소로 이름을 바꿨다)이라는 이름의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노무현 당시 변호사는 노동 전문 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해 아예 노동상담소를 열었고, ‘부민’ 사무실의 안살림은 문재인 변호사가 책임을 졌다. 이 시절에 문 변호사와 알고 지낸 부산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문재인 변호사의 승소율이 굉장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변론이 쉽고 조리 있어서 지역 판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기억했다.
노무현 변호사가 유명해지면서 사건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재인 변호사도 학생사건이나 시국사건을 맡는 횟수가 늘었다. 그는 밀려들어 오는 소송 요청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때가 ‘변호사 문재인’의 전성기였다.
노무현 변호사는 지난 1988년, 부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 당선돼 제13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반면 문재인 이사장은 법조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인권변호사라고 해서 무작정 노동자의 편에서만 변호를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는 대목 중 하나는 ‘페스카마호 사건’의 변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몇 명의 법조인은 “페스카마호 사건을 보면 문재인이 내성적이지만, 남의 이목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페스카마호 사건’은 1996년에 남태평양 참치잡이 조업에 나간 원양어선에서 벌어진 선상(船上) 살인사건이다. 근로자로 승선한 조선족 선원들이 한국인 선원 7명을 포함해 11명을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족들은 ‘코리안드림’을 찾아 한국에 왔다가 상급자들로부터 가혹 행위와 폭행 등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우리 국민을 잔인하게 살해한 조선족의 변호를 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제대로 된 변론을 받지 못했고, 결국 피의자 전원이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들의 항소심에 변호인으로 나선 것이 문재인 이사장이었다.
문 이사장은 지인과의 대화에서 “범행 자체가 잔혹하고 유죄(有罪)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과정을 참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론을 떠맡았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항소심에서 한 명만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머지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정치에는 원래 관심없어
문재인 이사장은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이름이 높아졌지만, 유독 정치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익명을 요청한 그의 지인은 “문재인이 무작정 정치를 싫어했다기보다는 선배들의 선례를 보면서 정치와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했다.
그의 눈에 비친 ‘노무현 선배’는 초선 의원을 지낸 이후 정치 부침에 시달리는 모습이었다. 노무현 국회의원은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지만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 헤어진 뒤 우울한 길을 걷고, 총선에서 내리 낙선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다.
또 그의 경남고 선배로 역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던 고(故) 김광일 변호사 역시 민주당 국회의원을 하다가, 다시 무소속으로 나왔다가 통일국민당으로 이적하는 등 갈팡질팡 행로를 걷고 있었다.
문 이사장의 지인은 “선배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끝이 별로 좋지 않구나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문 이사장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 부산NCC 인권위원회 위원 등 정치와는 다른 사회적 참여활동을 시작했다.
선거 사무실에서도 사람 응대하는 일엔 서툴러
그런 그가 청중 앞에, 그것도 선거대책본부장 자격으로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생겼으니 2002년이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의 부산지역선대위원장을 맡은 것이다. 부산 지역에서 연설을 하게 됐는데, 모습이 참으로 독특했다는 것이 참석자의 증언이다.
“문 변호사가 처음으로 선대위원장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습니다. 정치인들은 으레 대중을 바라보면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연설을 하게 마련인데 문재인은 180도 달랐습니다. 자신이 준비한 원고를 들고 와서, 그 원고를 바라보면서 그냥 줄줄 읽더라고요. 대중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냥 읽어내려갔습니다. 그의 연설은 서툴렀지만, 원고의 내용은 날카로웠습니다. 민주당이 자기 당 후보로 노무현 후보를 뽑아놓고, 정작 돕지 않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분개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후 문재인 이사장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인 노무현’을 위한 것이지, ‘정치인 문재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문재인 이사장이 선거대책본부에 뛰어들었을 때, 황당한 장면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문재인 이사장이 노무현 후보를 돕느라 선거본부로는 출근했지만, 당시까지도 그는 법정에서 변론을 하는 변호사였다. 문 이사장이 자신이 맡고 있던 사건을 후배 변호사에게 위임을 하지 않고, 서류를 몽땅 들고 선거본부로 출근한 것이다.
선거본부에 출퇴근했던 관계자는 “회의할 때 중요 판단을 하는 것이 주로 문재인 몫이었다. 선거 사무실에서 사람들을 응대하는 일에는 익숙지 못했다. 중간에 틈이 생기면 자기가 변론을 맡고 있는 재판 자료를 검토했다. ‘빨리 털어야 하는데 안 털어지네’라고 머쓱해한 적이 여러 번이다. 선거를 할 줄 모르지만, 노무현에 대한 진정성 하나로 정치판에 뛰어든 셈이다”고 전했다.
문재인 이사장은 대선이 끝나면 히말라야로 놀러갈 계획을 세울 정도로, 현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청와대 입성 초기에 갈팡질팡
하지만 노무현과 문재인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문 이사장에게 처음에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차관급)을 제의했다. 이 대목에서는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의견이 다소 엇갈렸다. 어떤 이는 문재인 이사장이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결국 받아들였다고 했고, 어떤 이는 곧장 제안을 수락했다고도 했다.
어찌되었건 이리하여 문재인 이사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로 입성했다. 처음에는 실수도 여러 번 있었다.
당시 청와대에 출입했던 L기자는 “초창기에는 대통령 비서관으로 서툰 행보가 있었다”고 했다.
그의 얘기다.
“초기에는 민정수석실이 나서면 안 되는 사건에 직접 개입을 하는 등 사리분별을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청와대가 나서면 일이 오히려 복잡해진다는 것을 모르는 등 전혀 권력이나 ‘청와대의 힘’을 모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고, 후반기에는 안정된 모습을 보였죠. 비서관답게 튀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고, 사건에 대한 판단력이 무척 빨라 보였습니다.”
문재인 이사장은 지난 2004년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훌쩍 안나푸르나로 트레킹을 떠났다. 김 모 목사 외에 또 한 명과 함께였다. 겉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청와대를 나왔지만, 실은 열린우리당의 총선 출마가 부담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잠시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고, 문재인 이사장은 ‘노무현의 변호사’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줄곧 노무현 대통령 옆을 지켰다.
‘돌출’ 노무현과 ‘신중’ 문재인 친하다는 게 신기
문재인 이사장과 노무현 대통령을 모두 잘 알고 있는 지인은 “그들의 관계는 참 독특했다”고 기억했다.
그의 얘기다.
“두 사람은 너무 달라서 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노 대통령에게 문 이사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완재였습니다. 문 이사장이 후배이기는 하지만, 노 대통령은 그를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엄밀히 보자면 노 대통령은 문 이사장을 좀 더 편하게 대하고 싶어했지만, 문 이사장의 지나치게 반듯한 태도가 그를 주춤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성격이 급하고 언행이 돌출적인 노무현 대통령과 신중하고 합리적인, 전형적인 신사인 문재인 이사장이 친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를 듣고 따르는 자리가 비서실장 자리 아닙니까.
“지시를 듣고 따랐다기보다는 노 대통령이 많이 의지하고, 의견을 구하는 식이었습니다. 함께 가는 사이라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르겠군요.”
청와대를 출입한 《조선일보》 신정록 기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신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에 대연정을 시도했을 때 문 이사장이 면전(面前)에서 반대를 했다. ‘그렇게 가면 안 된다’는 직언까지 했다. 노 대통령이 민주평통의 행사에 참석해서 한 연설을 두고 여러 논란이 일자 ‘그런 연설법은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발언했다는 얘기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그 정도로 말을 하고, 또 노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정도의 사이였다”고 했다.
사생활엔 끔찍, 공적 활동엔 소극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노무현 정부가 막을 내리고, 문재인 이사장은 경남 양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부분적으로 2층으로 지어진 개인주택인데, 외진 시골마을에서 부산(그는 여전히 부산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다)으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 SUV인 ‘렉스턴’을 구입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응한 지인 중 몇몇은 “문재인 이사장이 개인주의로 비칠 정도로 사생활을 잘 챙기고,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그의 취미는 음악 감상과 미술 관람 등 정(靜)적인 것들이다. 아마추어 4~5단의 바둑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술자리에서는 1차가 끝이고, 2차는 일절 가지 않는다. 주량은 소주 반 병. 폭탄주는 잘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해서는 끔찍한 편이다. 가족은 부인과 몇 달 전에 아이를 출산한 장녀와 설치미술을 전공한 장남 등 셋이다. 모태신앙으로 가톨릭 신도다.
직업이 변호사이지만, 경제적인 여력은 충분치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C씨의 얘기다.
“요즘 본인에게 사건이 오지 않아서 힘들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같은 법무법인에 소속된 후배 변호사들 덕분에 먹고사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얘기지요. 예전에는 노동사건을 많이 맡았는데 청와대에서 나온 다음에는 이런 것들도 마음 놓고 맡기가 뭐하다는 말이지요. 부인이 단정한 편이라 옷을 깔끔하게 입혀주는 정도이지, 사람들을 모아놓고 밥 사고 술 사는 것도 없어요. 그만한 재력도 되지 않고요. 밤에 술자리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친한 정치인도 없습니다. 누구한테 줄을 대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야권의 사람들과도 공식 행사 이외에는 만난 적이 일절 없을 겁니다. 간혹 정치인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참 어려운 직업을 갖고 있다’고요.”
외부에 비치는 대로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이지만, 주위에서의 ‘러브콜’은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에 치러진 양산 재보궐 선거 때에는 희한한 풍경이 있었다. 문재인 이사장의 집 앞에 텐트 하나가 쳐진 것이다. 알고 보니 고 박종철씨(1987년에 고문으로 사망한 서울대생)의 부친 등 부산 지역 재야인사들이 그의 보궐선거 출마를 권유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주변의 强勸 외면하기 어려울지도
이때 문재인 이사장은 “나는 지금의 내 삶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이렇게 강요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다”며 본인 식의 강력한 화를 내고 돌아섰다고 한다.
그에게 쏟아지는 야권의 관심이 비단 몇 달 만의 일은 아닌 셈이다.
문재인 이사장의 현재 직함은 법무법인 부산의 대표 변호사 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그가 야권의 바람대로 내년 총선, 나아가 대선에도 ‘깃발’을 꽂을지는 미지수다. 한 관계자는 “대선은 모르지만 내년 총선에는 절대 나가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청와대에 오랫동안 근무했다고 해서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정계에 쉽게 입문시킬 것으로 생각하면 아주 큰 오산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 권력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있었지만, 문재인은 전혀 없다. 관심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고도 했다. 반대 의견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가 설령 총선 혹은 대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히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의 한 관계자는 “공직(公職) 경험의 전부가 2인자이자, 참모 역할이었다. 그가 야권이 원하는 대로 떠오르는 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지역 한 신문기자는 “전국적인 지지도가 약하다. 국회의원 선거 한 번 출마하지 않은 사람이 깨끗한 이미지, 부산 지역에 연고가 있다는 것만으로 대선에 나가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총선에서의 영향력은 혹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재인은 과연 정치판에 뛰어들 것인가. 주변에서 워낙 강권하는 것으로 알려져 돌부처 같던 그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당장 최근 미묘한 정치 관련 발언이 이를 입증한다. 신중하고 치밀한 사람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행보를 갑자기 유턴(U turn)하지 않고 5도씩 방향을 바꾼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재인은 ‘정치 입문’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벌써 첫발을 내디딘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