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전제를 하자면, '엄마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과정이 아니라 아기가 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엄마를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도가 엄마를 인정하는 모습은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를 인정하는 과정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인간은 배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궁 밖으로 '밀려나' 세상밖으로 떨어집니다. 세상엔 온통 낯선것만 있습니다.
아기에겐 세상이 한번도 자기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하고 가족을 먹이고, 먹고, 때로는 가족과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고 그럼에도 사랑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강도와 상관없는 것처럼요. (심지어 옷을 벗고 자신을 유혹하는 여자조차 관심없습니다)
그런데 엄마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안고, 어르고, 밥을 먹입니다.
아기는 모든게 싫고 이상해서 울고 또 웁니다.
기질이 예민한 아이는 아이를 낳고 처음 먹이는 모유, 즉 엄마의 초유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돌봄이 반복되면서 아기는 비로소 엄마를 믿습니다.
주는 밥을 얌전히 먹게 되고, 이 사람이 내게 호감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한켠엔 계속 의심이 듭니다. 그래서 엄마를 시험합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내 편인가. 이 사람의 인내심은 어디까지인가.
그래서 끊임없이 모자는 부딪칩니다. 아기때부터 미운5살, 죽이고 싶은 7살 정도의 단계입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안간힘을 내며 그 단계를 지내오듯 강도의 엄마도 강도의 생 살을 씹으며 그 단계를 넘어갑니다.
동시에 그 단계는 엄마를 이성의 한 모델로 생각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흔히 '나 커서 엄마랑 결혼할래'단계입니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오이디푸스 단계, 소위 말하는 남근기와도 관련이 있죠.
강도는 '엄마'를 추행함으로써 그 단계에 도달, 자각하고,(강도가 '엄마'를 추행하는 것은 응석인 동시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인 것같습니다.)
그렇게 30년동안 정체되어있던 강도의 남근기는 몽정을 도와주는 엄마에 의해 비로소 성장이 시작하고 모든 발단단계가 충족된 아이는 고분고분해집니다.
엄마품이 그리워 나란히 눕자 날벼락같이 뺨을 맞고서도 '내가 뭘 잘못했어?'라고 묻는 강도는 이미 사랑을 충분히 받아 성숙해진 아이입니다.
그 기간이 지난 아이는 이미 엄마의 자식이 아닌 한 사람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가기 시작합니다. 친구를 만든다거나,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라는 식으로요. 사춘기라 부르기도 합니다.
강도는 점차 자신을 둘러싼 청계천 사람들이 '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강도는 성장은 이어지고, 엄마를 사랑하는 동시에, 독립적 개인으로 인식합니다. '내 엄마' '나를 버린 엄마' 같은 것은 어찌됐든 상관없어지고, '엄마는 괜찮아?' '엄마는 어때?' 등등 '엄마를 지켜줘야한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보통 책임감있는 아이들이 부모의 노후를 생각하며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모실지' 생각하는 단계처럼요.
즉, 인간이 제대로 엄마에게서 떨어져나가기 위해선 그 이전에 무조건적인 사랑과 충분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역설적으로 구세대에 대한 반감,반항, 열등감같은 부정적인 감정조차 성장과정에서 정서적인 기틀이 형성된 후에 만들어지는 감정입니다.
또한 습관적인 학대에 길들여지거나 제대로 세계관 형성이 되지 않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동물적 본능에 기대 타인을 대하고, 인간사회를 정글같이 인식하며 비양심적인 행동에 거침이 없습니다.
그처럼 강도에겐 처음부터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규범, 금기, 친구, 짜증 등 아무것도 없습니다.
친구도, 감정을 구분할 방법도 모르고, 가족이니 알수 없는 것들에 매여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곳의 감상글 중에 '악마'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엄마를 사랑하냐 는 요지의 말도있는데 사실은 강도는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라 그냥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마는 선을 이해하기에 그에 반대하는 악을 실천하지만, 동물은 처음부터 선악의 구분이 없듯이 말입니다. 강도는 살기위해 삽니다. 그 산다는 행위는 타인을 죽이거나 때리는 것도 포함입니다.
우리는 사자가 가젤을 잡아 내장을 후벼파먹는 모습을 보고 끔찍해하지만 사자에겐 그것이 생활이듯이. 강도에겐 그것이 생활이었던거죠.
강도가 맹수와 다른점은 그저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다는 것 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는 강도는 30살이 넘어 엄마를 만난 동시에 압축성장을 한 셈입니다.
강도가 '엄마'라는 존재에게 빠져드는 속도와 진행은 낭만적인 시선도아니고,
다른 여느 인간들과 똑같은 패턴의 성장을 했을 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초반 강도가 엄마를 '밀어낸다'라는 과정에서조차 사실은 강도는 엄마를 인정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인간도 강도와 마찬가지로, 태어난 즉시 부모라고 주장하는 존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한다고 강요받고, 몇번의 실랑이를 통해 결국 가족을 인정해가는 것 처럼요.
그냥 제 생각이고, 강도가 왜 그렇게 쉽게 엄마를 믿게 되었나? 라는 의문에 대한 제 나름의 추측글입니다.
결국 피에타에 나오는 '신' 이란 '남과 다를 것 없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을 있게 만드는 것,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은 도구의 사용이나 불의 사용이 아니라 양심이나 측은지심의 유무이며,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엄마에 의한, 혹은 그 정도의 역할을 대치할 사랑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의 강도는 사실 죽어있었고, 죽음을 선택한 강도는 사실 그것이 삶이라는..이중적인 의미, 피에타 석상과도 맥이 닿는 결말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하는 것은 혹시나 그 부분이 줄거리나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그러려니, 그렇다 치고' 넘어가는 진행이라고 느껴지는 분이 계실까봐 나름 이야기를 적어보았네요.
* 아참, 추가하자면 반대적인 의미로 강도의 '엄마x' -> '엄마o'가 되어가는 엄마 성장과정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요. 다만 '엄마'에겐 상구라는 앞선 '아들'이 있었기에 그런 감정의 자각이 더욱 빨랐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