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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성으로부터의 자유 (장춘익)

존중의연습 조회수 : 1,782
작성일 : 2012-09-14 19:30:09

*파일들 정리하다가 발견한 글인데,

82 회원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해서 스크랩합니다.

 

--한림대 철학과에 계신 장춘익 선생님 글입니다. 독일에서 헤겔로 학위를 받으셨고 최근 하버마스의 대작을 완역출간 하셨지요. 2000년 7월 말에 www.urimodu.com에서 퍼둔 것인데, 그 안의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1
성적 충동을 모든 인간활동의 추동력으로 본 프로이트는 이론에서는 반박된지 오래지만 현실에서는 점점 승리의 정점을 향해가는 듯하다. 모든 진지한 것의 색이 바랜 시대에 재치와 활기와 실험정신은 성의 담론과 미학에로 이주하고 있다. 이제 평등, 인권, 연대, 의미를 말하는 자는, 청학동 소년이 자신이 익힌 전통문화와 도덕에 대한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화려함 앞에서 아무래도 자신감이 엷어지는 느낌을 갖듯이, 자신이야말로 고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형편이다. 사실 성적 욕망의 표현과 충족방식을 규제하는 것이 각 문화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성에 가해진 금기를 어기는 자에게는 가장 가혹한 처벌과 일생을 따라 다니는 경멸이 부과되었던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성의 금기에 도전하는 것은 억압의 가장 예민한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이런 해방적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성이 시장의 무한확대를 가능케하는 비밀의 열쇠임을 간파한지 오래되었다. 성적매력은 끊임없이 관리되고 재생되어야 유지될 수 있기에, 성적 매력을 상품과 결합시키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상품을 구입하려는 충동을 가지게 된다. 상품의 소비기간과 상품의 내구성은 관련성을 잃은지 오래되고, 보드리야르가 말하듯이 상품소비는 기호소비로, 그것도 점차 신분기호에서 성의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 된다. 이에 더하여 오늘날 성은 친밀성을 느끼고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대가족이 해체되고 핵가족마저 위협받는 현대사회에서 친밀성에의 욕구는 과거 구원에의 욕구에 버금갈 만큼 절실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은 홀로 있는 시간에조차도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몰두시키는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해방과 자본주의, 친밀성에 대한 욕구가 함께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성은 그래서 이 시대의 주제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어느 정도 고리타분한) 나는 요즈음 성에 대한 관심과 담론에는 동경과 신화, 조작이 얽혀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푸코가 지적했듯이 성에 대한 금기는 성을 억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 권력의 관심에 맞는 방식으로 성을 부추켜 왔다.

권력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통제였고 억압만을 채택하는 것은 통제의 초보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일 따름이었다. 또 나는 성이 친밀성의 유일한 터전인 것처럼 여겨지는 데에는 소비자본주의의 자만과 허위의식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성을 친밀성의 표현으로 보는 것에 대해 청교도 윤리를 들이대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성이 다른 친밀성의 다른 표현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에 이의가 있을 따름이다. 상호존중과 우정, 공유된 경험에서 비롯되는 친밀감, 동정심에 기인한 유대는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 어린 시절 나의 집에 못지 않게 척박한 삶을 꾸려야 했던 윗집의 아주머니가 나에게 공책과 바꾸어 쓰리고 나의 손에 쥐어 준 달걀의 따스한 느낌은 친밀성에 대한 나의 기억의 보물함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나의 기억까지 들추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존중과 우정, 동정 등에 바탕한 친밀성이 우리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에 중요하며, 또 그런 친밀성을 느끼고 표현하고 평가할 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성은 때로 벗을 수 없는 옷처럼 거추장스럽다. 성적 매력은 분명 상대에 대한 관심의 한 발단이 되긴 하지만, 다른 점들 때문에 관심을 갖는 데에는 종종 넘을 수 없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이미 젊음의 절정을 넘긴 탓인지) 나는 나의 자유를 위하여 성의 자유가 아니라 때로 성으로부터의 자유를 동경하고 있다.


2
온 나라가 성유흥, 성추행의 문제로 시끄러웠다. 이번의 경우는 특히 정치적 기대와 도덕적 신뢰를 받았던 사람들이 추문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세인의 주목을 더 끄는 것이었다. 논쟁은 금세 도덕에서 정치로 옮겨져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누구에게 유리한가를 따지고 있다. 통신상에는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한 고려없이 386 정치인의 행태를 공개했다 하여 임수경을 비난하는 글도 종종 보인다. 진보신문을 자처하는 한겨레 신문은 정확한 보도와 심층적인 분석보다는 보수세력과 보수언론의 악의적 반응을 경계하는 데에 더 주안점을 두는 인상이다. 한겨레 21은 임수경과의 인터뷰를 실으면서 인터뷰 싣는 것 자체를 고뇌에 찬 결단이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이 과연 보수의 "내 그럴 줄 알았다"와 진보쪽의 "똥뭍은 개가 겨뭍은 개를..." 라는 식의 상호비방으로 그칠 일인가. 나는 이번 일련의 사건들을 진보와 보수의 문제로서보다는 성에 대한 남성적 시각의 문제로서 다루는 관점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성의 불평등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아주 심층적인 성적, 심리적, 문화적 빈곤과 부도덕성을 부추기는데, 그런 빈곤은 바로 성적 즐거움을 찾는 방식에서도 표현된다. 나는 386정치인들, 장원 사건, 교수들의 제자 성추행 등은 심층적으로는 성불평등에서 비롯된 '빈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의 문제에 관련하여 남성이 어떤 빈곤을 겪는다고 말하면 실소失笑를 머금을 사람도 있으리라. 우리는 남성을 위한 성이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나의 생각으로는 바로 넘쳐나는 성은 어떤 심층적인 빈곤을 겨냥한 산업이다.

성적 불평등의 사회는 대개 여성들에게 극도의 안전의식을 발전시킨다. 어떤 남자를 선택하는가가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조건에서, 또 자신의 선택을 수정할 기회가 적은 조건에서, 그리고 남성이 일반적으로 폭력적일 수 있다는 염려를 하는 여성들이 어떤 남성을 친밀하게 대하는 데에는 조심성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는 소위 소수의 조건 좋은 남성들에게 여성의 선망이 집중되게 한다. 이런 선망의 집중의 이면은 다수의 남성에게 자연스럽게 성적 친밀감을 느낄 기회가 박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밀감의 결핍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 소위 성공한 결혼을 한 남성의 경우에도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는 부부간을 제외한 이성간의 관계는 그야말로 거의 모두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성간에는, 특히 한편이 혹은 양쪽이 모두 기혼일 경우, 동료라 할지라도 친밀하지 많도록 조심해야 한다. 도대체 정말 다른 의도가 없더라도 타인의 시선 때문에, 그리고 그 시선을 의식하면서 행동하기가 불편해서, 이성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태도 이상을 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자신의 친밀감을 관리하는 특별난 재능이 있어서 자신의 동료와 주변의 사람들에게 일체 표현하지 않은 친밀감을 모았다가 자신의 배우자에게만 쏟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친밀감은 그렇게 의식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겪었고 성인의 삶에서도 반복되는 친밀감의 결핍은 대부분의 남성에게 자신을 선망하고 최고라고 해 줄 여자에 대한 동경으로 깊이 자리를 잡게 된다. 이 동경은 많은 변주곡으로 표현된다.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는 사람에게 성적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추구하는 태도나 술집 여종업원의 애교가 립서비스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매력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 그런 변주곡의 하나다. 배고픈 시절을 겪은 사람이 거의 불가피하게 배불리 먹고 싶은 소망을 반복하듯이 성적 결핍을 겪어 온 남성들도 여자와 '화끈하게' 놀아보고 싶은 환상을 발전시킨다.

이 환상의 힘이 얼마나 큰가는 단적으로 성적 서비스를 위하여 기꺼이 지출하는 돈의 액수를 보면 안다. 평소 물건값을 잘도 깎고 식당에서 무거운 설렁탕그릇을 한 번에 6인분씩 나르는 아주머니들에게는 단 한 푼도 웃돈을 주지 않는데 양주 두 어병에 수십만원을 지불하고 게다가 병 따주고 술 따르는 것 외에 정말 일이라고는 한 것이 없는 여자들에게 따로 고액의 팁을 주는 것은 무엇에 대한 대가인가? 논다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생각은 없다. 도대체 그 정도 놀고 그 정도 돈을 지불할 용의가 생기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땀흘리는 노동에 대한 모독 아닌가? 그런 불균형적인 지출은 어떤 뿌리깊은 동경을 충족시키는 것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노동을 노래한 이마저 노동을 모독하는 행위를 할 만큼 저 환상의 힘은 큰 것이다.

나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추정한다. 만일 남성들이 친밀감의 욕구를 자연스럽게 충족할 수 있었더라면, 대등하며 존중할만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재미를 경험하였다면, 아마 그런 술자리가 재미없을 것이다. 도대체 립서비스 애교가 낯간지럽고 별 재치없는 농담주고 받기도 시시하고. 그러니 그런 놀이에 그런 거액을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나의 주문은 무엇인가? 여성들에게 남성들을 좀더 친밀하게 대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성불평등의 해소없이 그것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이다. 남성들이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은 존중의 연습이다. 정말 여성의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아니오'가 존중되고 여성들이 지금과 같은 안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면 아마 친밀감의 표현은 지금보다 훨씬 풍부해질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되면 정말 저 친밀감의 대체물 - 지위나 화대를 바탕으로 한 친밀감 - 은 너무 초라한 것이라서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친밀감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늘어야 한다고 해서 연인이나 부부관계라는 것이 어떤 배타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종류의 친밀감의 표현을 어떤 사람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과 성실성에 들어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자기 외에 다른 이성과는 아무런 친밀감을 느껴서는 안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의 상대가 불구가 되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즉각적으로 친밀감의 급속한 개방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작정 친밀감을 개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관습의 무게와 가정에 매어 있어 연인이나 배우자 외의 다른 이성 접촉 기회가 없는 여성들에게 불리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남성들이 동경하는 친밀감도 여성들의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밀은 "진정한 도덕감을 배우는 학교는 동등한 사람들간의 사회"라고 하였다. 진정한 즐거움을 배우는 학교 역시 동등한 사람들간의 사회이다.

 

 

 

 

 

 

IP : 121.131.xxx.3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천년세월
    '18.7.11 6:29 AM (110.70.xxx.187) - 삭제된댓글

    일단저장부터

  • 2. 우쒸
    '19.6.7 7:02 AM (175.223.xxx.81) - 삭제된댓글

    썩을년의훼방을 무릅쓰고서야 흔적을 남길수 있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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