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측은 유족들에게 사형수들의 시신을 다음날인 4월10일 인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천주교 측과 함께 희생자 8명에 대한 장례식을 명동성당에서 치르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튿날 오전, 사형수들의 시신을 실은 장의차 행렬이 명동성당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경찰이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장의차는 성당 안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경찰에 의해 강제로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화장터로 이끌려갔다.
시신들은 유족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화장되었다. 중앙정보부의 혹독한 고문으로 사형수들은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고 탈장도 된 참혹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모습 못 보게 하려고 강제 화장 시킨 것이었다고 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과 유족들이 정부에 진상공개를 요구하자 저명한 교수 출신의 황산덕 당시 법무부 장관은 "더 이상 문제 삼으면 반공법 위반으로 처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중략...
어디까지나 박근혜 후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이야기지만, 만의 하나 사실이라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집권 여당의 확정된 대선 후보로서 치명적인 '법률적 무지'에 경악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알다시피 2차 인혁당 사건은 1975년 4월 죄 없는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2007년 1월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사건이다. 교수형에 처해진 8명의 유족에게 국가는 247억 원을 주라는 배상금 지급 판결도 내려졌다.
- 2007년 8월21일의 하급심에서는 원금 245억 원에 이자 392억 원해서 637억 원을 배상토록 했으나, 대법원 판결에서 '신영철 대법관'이 지연 손해금등을 조정해 247억 원이 되었다 -
"1975년의 유죄판결과 2007년 1월의 무죄판결 등 서로 다른 두 개의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는데 아버지는 왜 '사법살인'이라는 비난을 받느냐"는 게 박 후보의 항변이었다. 그게 2007년 무죄판결 이후 박 후보가 지녀온 불만이었다. 2007년 재심 판결 직후 박 후보는 말했다. "법원에서 정 반대의 두 가지 판결을 내렸다. 역사적 진실은 하나밖에 없으니 역사가 밝혀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말인즉은 그럴 듯 하지만 무지의 극치요 비극이었다. 박근혜 후보의 비극은 '재심'의 뜻을 몰랐던 데서 시작되는 듯하다. 재심은 한마디로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이다. 유무죄 확정 판결이 내려졌더라도 중대한 사실 오인 등이 드러났을 때 과거의 판결을 시정하는 비상구제 절차다. 1975년의 유죄 판결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32년 뒤 재심 절차가 이루어졌고, 그 재심에서 억울하게 교수형을 당한 8명이 사실은 무죄였다고 판결한 것이다.
한명도 아닌 8명의 억울한 목숨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판사의 잘못이라고 몰아칠 수도 없게 되어있다. 지금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다 없다. 유신의 한복판에서 아버지의 장기집권을 위해 몸을 던지던 딸이 남아있다.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