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을 무한 반복해서 보고 있는 아짐입니다.
남편도 내가 보고 있으면 머리 들이밀고 같이 보는 주제에 드라마만 본다고 타박입니다.
이 남편이 제 첫사랑이에요.
결혼 16년짼가...
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남편 머리 뒤에서 후광을 봤습니다.
순간 주변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남편 얼굴만 보이는 초현실적 착시가 생기더군요.
더 놀라운것은 이 남자도 보자마자 티를 내며 소개팅 중매장이 내 친구를 구박해서 빨리 내 쫒았습니다.
그러더니 '애프터'로 만나서는 심호흡 한 번 하더니 자기 집의 어려운 이야기를 다 하더군요.
우리 부모님은 이혼하셨다...부터 시작해서 주저리 주저리...
저는 뭥미...하면서 계속 만났습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있지만,
우린 헤어졌습니다.
그 사연이야 쓰기로 한다면 읽는 분들이 한 양동이 오바이트 할만큼 진부한 영화 속 그런 장면들이니 생략합니다.
헤어진 후 몇 년이 지나 주변의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계속 받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대학 졸업하면 몇 년 안에 결혼을 하는 분위기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잌'이다 - 라는 말이 뭐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때 였습니다.
23일부터 케잌이 팔리기 시작해서,
24일에 피크로 많이 팔리고,
25일은 크리스마스 당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26일 부터는 당장 재고 떨이에 들어가야 한다.
27일은 당연히 폐기 처분이다....
폐기 처분할 나이에 도달하니 좀 마음이 급해지기도 해서
친구들 결혼식에 열심히 쫒아다니며 친구 남편의 친구들을 찝쩍여 보기도 하고,
회사 선배 동료들을 소개팅 해내라고 갈구기도 하고, 거래처 사장님 한테 까지 소개팅 해내라는 협박까지 했더랍니다.
결혼을 목표로 정말 무수하게 많은 사람은 만났지만,
설레기는 커녕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어요.
때는 휴가철...다들 휴가를 떠난 작은 사무실에 저만 혼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밖에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혼자 출근한 사무실에 달랑 대리 주제에 뭐 할 일이 있겠습니까.
멍 때리기를 한나절,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용기를 냈습니다.
첫사랑 남자에게 연락해 보기로.
소개팅 해준 친구는 유학을 가서 연락처도 모르고 (요즘처럼 이메일, 카톡, 이딴게 어딧습니까!)
설령 옆에 있다고 해도 쪽팔려서 물어보지 못했겠지요.
유일하게 생각나는게 그 남자가 자취를 같이 하던 선배 형이 OO회사에 근무한다는 것과 그 선배 이름이 기억났습니다.
죽기아니면 까무라치기니까 전화를 돌렸습니다.
114로요.
요즘도 회사 대표전화로 전화해서 거기 직원 아무개 바꿔달라고 하면 그냥 연결을 해 주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때는 잘 바꿔주더군요.
"아...OO 말입니까? 지도 만난지가 한참되서...XX회사 다닌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모, 이왕 된 김에 또 XX회사 대표 전화를 114에 물어보았고, 또 순조롭게 연결이 되었습니다.
"여보세요." 내가 말하는 순간,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여태 낸 용기는 어디로 가고 전화를 끊을까 말까 갈등해야 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제 목소리를 알아듣는 거였습니다.
그것도 활짝 갠 목소리로요.
그리고 바로 그 날 저녁 재회를 했습니다.
몇 번의 만남 후, 또 이 남자가 우물쭈물 하는 겁니다.
집안에 대한 컴플렉스, 결혼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점 등등...
부산남자들이 터프한 것 처럼 보여도 영 중요한 상황에서는 자신없어 합니다.
또 용기를 한 번 더 내서....너 나랑 결혼하자. 그것도 올해 내에 하자. 선언을 했더니 좋아서 비실비실 죽더라구요.
그렇게 결혼해서 지금껏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내 happly ever after...는 아니구요, 남들 하는 거 다하고 그러고 살았습니다. 부부싸움도 뭣 같이 하고, 이혼하자고 쥐 뜯고 싸우기도 하고...)
드라마나 영화는 환타지죠, 환타집니다.
어디 넓은 시내에서 우연히 만나집니까!
절대 만나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나이 40되서 긴가 민가 하면 만나질 수도 있어요.
절대 만나지지 않는데 드라마/영화에 속아서 우연만 바라고 용기를 내지 않는 것 - 이게 첫사랑에 실패하는 이윱니다.
그 때 연락한 남편 선배, 결혼식에 뵙고 아직 한 번도 못뵜습니다.
남편과 만나지 못했었더라면...더더욱 한번도 뵐 일이 없었겠죠.
쪽팔려서 죽는줄 알 뿐이지 실제로 사망하지는 않습니다.
잠깐 미친척 용기를 내면 사랑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주말에 잠깐 잠이 안와 뻘 글 써봤습니다.
응답하라 보다가 미쳤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