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이니
야밤에 치킨 먹고 배 두드리면서 뻘글 하나 올려봅니다.
어려서 남들이 제게 곱게 큰 느낌이라는 말을 종종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곱게 큰 = 부자집 외동 딸
이라는 단순한 등식을 갖고 있던 저는
엥? 사람 보는 눈 없네~ 이러고 말았죠.ㅎㅎ
저희 집 가난합니다.
생계에 바쁘셨던 엄마와
병 걸린 아버지와
주렁주렁 자식들이 딸린...
차마 익명게시판에도 털어 놓지 못하는
이러저러한 상황들로 아주 일찍 철이 들어 버렸죠.
철이 들었으니
집안 형편 생각해서 알아서 포기도 해가면서 살았습니다.
억척 아줌마인 엄마 덕분에 교육은 제대로 받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살아가는 것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속울음도 많이 울었고
절망도 많이 했고요.
정말 죽어라고 처절하게 온몸이 다 고장이 날 정도로 살았지만
인생이 쉽게 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 늙은 지금도 곱다는 소리, 인상 좋다는 소리 듣습니다. 가끔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제가 그냥 어느 정도 유복한 집에서 편하게 편하게 지금의 위치로 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자게의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 곱게 큰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해주셨으며
악다구니 쓰는 엄마와 무력한 아빠지만
부모님이 날 아낀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일자무식의 부모님이지만
어리다고 자식들 의견을 무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 못해도
사람된 도리는 하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명품 하나 없지만
고운 마음을 믿고 살아가는 힘을 주셨으니, 곱게 컸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완벽하지는 않지만 전 제가 마음에 듭니다.
이제까지 지켜왔던 내 고운 마음이 아까와서
힘들지만 남은 인생도 마음 곱게 쓰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제가 마음에 듭니다.
이게 정말 곱게 큰 겁니다. ㅡㅡ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