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수녀님 때문에 공포에 떨며.... 글을 올린 사람입니다.
12 월 중순에 보육원은 크리마스 때 쯤이라 한창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 6 살인 저와 원생 몇명은 심한 열병으로 몇 일을 침대에 드러누워 지내야 했습니다 . 그 당시 모두 감기로만 알고 별로 신경을 안썼는데 , 열이 내리지 않자 의사선생님의 진단을 받게 되었고 , 진단 결과는 소아마비 였습니다 . 저는 다행히도 심하지는 않았지만 , 같이 앓았던 원생들은 지팡이 없이는 못걷는 심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
초등학교 1 학년 운동회때 천진난만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달리기를 하는데 , 꼴치로 절뚝절뚝 뛰는 저의 모습을 보고 많은 학부형들이 깔깔거리며 웃더군요 . 어린 나이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한참 울었습니다 . 그 다음부터는 운동회에 참석을 안하게 되고 , 학교 체육시간에도 혼자 교실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 지금도 그 때 웃음들이 아직까지 제 귀에서 생생하게 울리곤 합니다 .
그렇게 한국에서 동네 어린애들의 놀림을 받으며 지내다가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럽에 나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
어느날 보육원의 용산 미군부대와 외국인 후원자 관리 및 재정을 맡으신 외국인 수녀님께서 저한테 해외로 나가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 이미 서류는 다 준비되었으니 2 주 후면 해외로 떠날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 그러시면서 « 한국에는 고아들에 대한 편견이 심하고 , 더군다나 불구인 너는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사회에서 너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 그러니 장래도 희망도 없는 한국을 떠나 어느 외국인 가정집에 입양되어 공부하면서 사는게 좋지 않겠느냐 » 고 하시더군요 . 그 당시 저는 미래에 대한 욕망도 꿈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떨결에 유럽의 작은 나라로 오게 되었습니다 .
입양될 가정집에 처음 도착한 날 , 양부모될 사람이 여권을 보면서 제나이가 몇이냐고 물어 보시길래 , 한국 나이로 18 살이라고 했더니 , 여권을 저에게 보이시면서 나이가 위조됐다며 , 아주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 여권을 보니 제 나이가 10 살로 적혀 있었습니다 . 하기는 입양될 가정집에 먼저 입양된 한국인 아이가 6 명이나 있었는데 , 제일 나이 많은 애가 12 살이었으니 , 그들이 보더라도 제가 더 성숙해 보이는 것은 당연했지요 . 여권은 저 떠날 때 외국인 동반자가 지참하고 있었기 때문에 , 저는 제 나이 고친 것을 못보았던 것입니다 .
위조된 나이때문에 입양 절차가 지연되자 , 실제 저의 나이를 알면서도 양부모될 사람은 여권상의 나이대로 저를 초등학교에 등록시켰습니다 . 몇주간 다니게 하다가 다시 고등학교 2 학년에 등록시켰으나 , 언어문제로 2 달만에 중단하게 하고 불어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
양부모될 가정집에서 지낼 때 TV 에서 아프리카에서 굶주린 아동들 다큐멘타리가 나오면 저희들 보고 « 우리가 너희들을 가난에서 구제했다면서 이 집에서 먹고 지내는 것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 « 한국에서 굶주리는 아동들을 보고 불쌍해서 너희들을 입양한 것이다 » 는 등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되었으며 , 또한 한국 입양아들과 현지 입양아들이 먹는 음식도 달랐습니다 . 그 집에서 강아지 한마리를 키웠는데 , 저희보다 더 호강하는 강아지를 보고 짐승인 너가 나보다 났구나 하면서 부러워한 적도 있었습니다 .
나이 정정할려고 대사관에 갔는데 , 제가 현지어를 좀 구사할 줄 아니깐 영사님께서 대사관에서 여직원을 구한다면서 저보고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하시더군요 . 순종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양부모될 사람들과도 갈등이 많았던 참이라 , 그들에게 빨리 구속되고 싶어 조건도 물어보지 않고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면서 일부를 양부모 가정집에 생활비 보태주고 나면 제가 쓸 돈은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
위조된 나이 때문에 입양뿐만 아니라 체류문제가 복잡해지니깐 , 하루는 퇴근해서 저녁 8 시쯤 집에 들어가니 양부모될 사람이 « 내일 아침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새벽 비행기표를 끊어났으니 떠날 준비하라 » 하시더군요 . 이제 한국 돌아가면 보육원에는 다시 못들어가고 , 기숙사 생활하면서 공장에서 일하게 될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해지면서도 , 이 집을 떠나게 될 생각을 하니 섭섭한 생각도 없고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졌습니다 . 공항으로 출발하면서 대사관에 메모 남겨야 하니 잠깐 둘러달라고 했습니다 . 그리고는 대사관 공람란에 감사의 인사 및 직접 인사못드리고 떠난다는 내용과 비행기 시간표를 적어서 사무실 열쇠와 같이 붙여 났습니다 .
공항에 도착해 여권검사를 마치고 출국문을 지날려고 하는데 , 대사관 직원들이 뛰어오시면서 한국인으로서 저를 대사관에서 보호하겠다 하시며 양부모가 될 사람이였던 자들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 그 것을 지켜보고 있던 경찰들이 대사관 직원들과 양부모될 사람의 얘기를 듣고 양부모될 사람들에게 입양포기 각서를 쓰게 하고 , 저는 대사관에 맡겨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대사관으로 돌아오는데 정문앞에는 대사님 및 사모님 그리고 전 직원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 그런 저는 사모님을 붙들고 서글프게 울고 , 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직원들도 같이 울었습니다 .
몇분만 늦었어도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될뻔 했습니다 . 약 9개월만에 양부모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나니 , 제 인생이 너무 서럽더군요 .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제가 감당하지 못할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걸까 하고 , 고아로 태어 난 제자신이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웠습니다 .
대사관 근무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안했습니다 . 때로는 몇몇 일부 직원들 및 교민들로부터 고아라는 이유 하나로 굴욕적인 말도 수없이 들어야 했고 , 수모와 멸시도 많이 받았습니다 . 어떤 때는 투쟁하며 살아야 되는 제 삶이 지치고 고되어 많이 울기도 하고 , 자살도 시도해 보았습니다 .
많은 결점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미혼으로 혼자 살 생각을 했는데 , 지인의 소개로 나이 차 많고 이혼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고아에다 불구인 제가 조건을 따질 형편이 못되었기에 , 남편될 사람이 고등학교 교장이라는 타이틀만 보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 남편에게 전처의 자식이 있는데다 , 저역시 아이를 바르게 키울 자신이 없었고 , 또한 제가 불구 라는 이유로 아이가 힘들어 하고 , 저처럼 외로운 아이가 될 것같아 아이를 안낳았습니다 .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 남편도 그렇고 저도 아이 안낳은 것을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제가 받은 것중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입니다 . 이렇게 저를 구제해 주고 헛점 투성인 저를 받아준 남편한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 제가 가끔 남편한테 « 내 불구때문에 남들한테 부끄럽지 않느냐 » 고 물어 보면 ""저를 장애인으로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고 , 오히려 더 자랑스럽다" 고 합니다 .
유럽에서는 장애인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없고 , 저를 바라보는 동정어린 시선도 느낄 필요없이 정상인 같이 생활할 수가 있어 좋더군요 . 단지 제자신이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짐으로 , 아직도 열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
대사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라는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 또한 , 제 나이를 조작하면서까지 해외로 입양보내 주신 외국 수녀님께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 저에게 이런 도움들이 없었다면 저라는 인간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을 많이 해봅니다 .
저는 그래도 축복받은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 ,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