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갑갑해서 오랜만에 82에 글을 쓰네요.
풀어내다 보면 글이 좀 길어질 수도 있으니 이해해주세요.
재작년 시월에 만났던 남자가 있어요.
이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구나.이제야 내 짝을 찾았나보다. 하며 단꿈에 빠져 있었죠.
그 때 제 나이 28세.
결혼 적령기이기도 했고 그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만난지 세달만에 결혼 얘기까지 오고가게 되었어요.
진지하게 집안끼리 오고가는 정도는 아니구요. 그냥 둘이 집에다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 이 정도까지.
그런데 그 직후 그 사람이 아팠어요.
몸살 비슷하게 앓다가 며칠 후 술이 좀 취해서 저에게 뭔가 흘리듯 말하더라구요.
예감이 안좋아서 다음 날 꼬치꼬치 물어보니 그 사람 부모님이 절 마음에 안들어하신대요.
제 이름 세글자 한번 안들어보시고, 단지 맞벌이를 할 수 있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은 지방에 살고 저는 서울에 살고 있었어요.
결혼을 하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하는데,
그 곳은 일자리가 별로 없어서 제가 마땅한 직업을 갖기 힘들고 그러면 맞벌이가 불가능하니 곱게 키운 아들 혼자
고생하는 꼴 볼 수 없다 이런 논리였어요. (그 사람은 교사)
저는 이유가 참 기가막히고, 뭔가 억울하고, 자존심도 상해서 헤어지자고 했어요.
만나고 싶으면 부모님 설득해서 오라고. 나는 이런 대접 받으면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집안 형편도, 학벌도, 외모도 제가 더 낫다고 그 사람도 인정했구요.
그 사람 직장에 연차까지 내고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 설득하고 저에게로 달려왔어요.
저는 감격해서 눈물까지 펑펑 흘리며 안아주었구요. 이 사람이 날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구나.라는 착각에.
그게 착각이었다는 건 한달이 지나지도 않아 알 수 있었어요.
내년에 결혼하라던 그 사람 아버지였는데 이번엔 어머니가 내 귀한아들 고생 시킬 수 없다며 들고 있어나셔서
아버지까지 합세하셨구요.
그 사람 굉장한 효자였고, 부모님 뜻을 두번 꺾을 수 없어서 저에게 점점 냉랭하게 대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을 상상도 못했고 (그 사람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파악 못했기에) 그 사람이 일부러 정 떼려고 할 때마다
내가 뭘 잘 못 한걸까? 이 말을 수없이 되뇌이며 고민하고 울고 아파하고. 하지만 그 사람은 좋고.
그렇게 반복하다 한달 쯤 지났을 때 저에게 실토를 하더라구요.
미안하다고. 그렇게 전화로 이별통보...
미칠 것 같았어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본심은 이제 아닐꺼야.
나를 사랑하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거야. 스스로 합리화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수 있다던 사람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돌아선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 때 놓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매달려서 붙잡았어요. 부모님이 내 존재를 몰라도 좋으니 헤어지지만 말자고.
다시 만나는 세달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자처한 일이니 누굴 원망 할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그 사람은 버티고 버티다 부모님 등쌀에 못이겨 선보기 하루전 저에게 이별을 통보하더라구요.
그 땐 마음 굳게 먹고, 일찍 보내줬어야하는데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건강하게 잘지내라고.
문자로 통보한 이별에 문자로 대답해줬어요.
그 사람에게 정말 미안했고, 잘되길 빌었어요.
그런데 너무 아프더라구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한밤중에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샤워기 소리에 소리내서 펑펑 울기도 하고. 밥도 먹기 힘들고.
그렇게 세달을 참아냈는데 연락이 왔어요.
네 말대로 너같은 사람 다시 못 만날거 같다고. 부모님 허락 없어도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머릿 속으로는 수천번 밀어냈는데 마음으로는 그게 안됐어요.
그리고 만나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는 그 사람 앞에서 또 약해지는데,
일단 부모님 허락부터 받아와라. 그 때 다시 내가 결정하겠다.라고 말했어요.
그 사람은 너희 부모님도 우리 부모님도 내가 다 알아서 하겠노라고, 나만 믿으라고 그러면서 헤어졌어요.
울면서 얘기하는 내 손 한번 꼭 잡아주지 못하고
(그 때 이미 본인 아버지에게는 거의 허락을 받은 상태. 혼자 멋대로 결정해서 나한테 올 수 있는 사람이 못 됨)
그렇게 일주일. 여전히 애써 냉랭한 척 하는 저에게 또 세상에서 제일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남자인 것 마냥 다가왔어요.
그런데 이 남자 어느순간 또 연락이 뚝.
어이가 없어서 먼저 연락해서 물었더니, 너에게 두번 상처주기 싫다고. 네가 부모님 허락 받아서 오래서 그렇게 할 거라고.
그 얘기를 듣는데 아, 사람은 안변하는구나. 단념하고 저도 연락을 끊었어요.
그런데 두 달 후 저한테 오기전 선봤던 여자를 만난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저는 너무 가증스러워서 전화해서 물었어요. 나 가지고 논 거냐고. 그 여자 만나는 거 맞냐고.
대답은 여자친구도 아니고, 결혼할 사이도 아니라고, 그냥 만나긴 한다고.
헛웃음이 나오더라구요. 다신 나한테 연락 할 생각하고 말고, 나 이렇게 아프게 한거 평생 갚으며 살라고 악담을 한 뒤
연락을 끊었어요.
끝까지 자기 말에 휘둘려주길 바랐는지 태연하게 거짓말에 또 거짓말.
그렇게 연락을 끊고 지금 딱 팔개월째.
친구한테 그 사람 소식을 들었어요.
올 해 일월 초에 급하게 결혼하더니, 5월 중순에 아이를 낳았대요.
그 전에 선봤던 여자랑.
저한테 온 게 8월 달인데 그럼 7월에 이미 애를 만든건가요?
그러고서 가증스럽게 저한테 다시 만나고 싶다고 온 거네요.
전후 상황은 저도 몰라요. 원래 양다리를 하려고 했던건지. 저한테 오고나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된건지.
금방 친구한테 이 소식을 들었는데 비 오는 밤에 그냥 어처구니가 없네요.
짐승인가싶어요.
그런 사람을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 보는 안목도 지지리 없는 저 자신을 탓해야겠죠?
자신이 없어요. 다시 누군가 좋아하게 되더라도 그 사람의 진심을 진심으로 볼 자신이 없어요.
그 사람은 내 생각 한번 안하며 신혼 단꿈에 빠져 있을텐데 혼자 이렇게 청승 떨고 있는 제 자신이 처량하기도 하구요.
제게 어울리는 진짜로 좋은 사람이 언젠가는 올까요? 만나게 될까요?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빗소리 들으면서 자려고 노력해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