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인 축출과 천주교 박해
천주교 박해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성리학을 버리지 않는 이상...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고 외국 군함을 끌어들여 조선 정부를 무너뜨려 달라는 집단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고요
남인 축출은
이 천주교 박해에 남인학자들이 연루되면서 같이 들어간것 뿐이죠
2. 사도세자 모함
사도세자 죽을 때 정순왕후는 겨우 십대고 궐에 온지 몇 년 되지 않았죠
한중록에서도 정순왕후 집안의 행동은 사도세자 죽음 이후라고 했죠
정조 보호권과 그와 연루된 정권 문제 때문에 싸운 거죠
정조 보호자로 자청했고
정조는 적적히 이용하다 버려 버립니다
3. 정조와의 관계
정조의 서동생인
이찬 사사 이인 유배등에 큰 관여를 했지만
역모 사건에 관련된 지라 욕 먹을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 말고는 정조와 딱히 척을 지은 것도 없습니다
4. 정조 독살?
이덕일의 개소리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아는게
노론 벽파는 소수파였습니다
정조의 학문적 동지로서
정순왕후의 보호로 인해
힘을 유지했떤게 노론 벽파입니다
이런 노론 벽파가 자기 보호자를 죽입니까?
실제 벽파는 정조 죽고 정순왕후 죽고 바로 몰락해버리지요
노룬 다수파는 노론 시파...
긍정적 이미지의 노론 시파가 실은 조선을 말아 먹은 일등 공신이지요
그리고 그 배경인 세도정치는
정조의 착상이었죠
척신은 싫어했지만 방법이 없으니
자기는 양위하고 수원 화성에 물러가 살면서
아들 원격조정해 자기 맘대로 정치 하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으니 끌어 들인게 안동김씨입니다
모두 정조의 문제였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치력이 부족해 몇 몇 후유증을 보인 정도일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