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봐 주세요..
일단 한중록 관련 글을 보고 가입했습니다
한중록이 노소론 갈등에 희생된 남편 정신병자 만들었다는 허황된 주장이 아직도 설득력이 있다고 하니..
일단 한중록 읽는 사람들 가장 크게 하는 실수가 있어요
바로 한중록이 혜경궁이 당시 정치적 격변에 따라 쓴 여러 기록들을 묶은 책을
혜경궁이 연대기적으로 저술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중록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죠
서문
혜경궁 자기 인생담
읍혈록이라 불리는 영조 후반부에서 정조 시기 격변기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
이중 가장 나중에 쓰여진게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이고
혜경궁은 남편이 죄인이어서 죽었다와 무함당했다
모두 반대하고 있습니다
저 시기는 이미 사도세자 추숭은 물 건너가서 혜경궁도 이제 기대를 접고 있는 사실 그대로나 전하자 심정으로 쓴 거고 가장 역사적 사실성에 가깝습니다
한중록 중 가장 문제가 없는 부분이 사도세자 관련 기록입니다
오히려 가장 문제가 심하다는 읍혈록 부분에는 사도세자 무함론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 정치상황을 보면 재미있는데
노론이 오히려 사도세자 편들기도 하고 소론이 사도세자 공격하기도 합니다
당시는 이미 노소론 갈등이 없고
영조의 완론탕평-이라 읽고 그냥 내 편 드는 놈 충신 구도-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로 갈라졌고
김재로 홍계희 같이 사도세자 무함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탕평파였습니다
비탕평파들은 철저히 사도세자 보호했죠
이쯤되면 계산 나오시리라 보시죠..
사도세자 죽음과 당시 정치 판국은 별 영향 없다는 것과
정조 역시 비탕평파-정확히는 반완론탕평파-를 매우 중시했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실지로 노론 대다수 소론 대다수가 사도세자 죽음 반대했고 정조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정조가 반대한 것은 탕평이라는 이름하에 외척들이 득세하는 것이고
실제 정조가 숙청한것도 이들이었죠
더구나 죄목에는 아버지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죠
소위 사도세자 모함당했다는 사람들은-특히 노론에게
이런 정황을 무시하고 주장하는 거라 설득력이 떨어지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영조는 사도세자 정말 싫어했습니다
사도라는 의미가 -절대 이거 한자 문자 그대로 풀지 마세요
아들에게 붙이는 최악의 시호
정말 자식 인증만 해준 겁니다
그래서 정조가 장헌세자라 격을 높여준 것입니다
흑백논리가 강하고 강박증 성격이 매우 강했던 영조는
맘에 안들었던 아들을 자식 취급도 안 했고 손자만 자식 취급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속 졸이며 살았던 여인의 기록을 너무 이상하게 해석하는게 최근해석이지요
님이라면
남편이 환관의 머리를 베어 자기 앞에 던지고
바둑판에 맞아 눈이 빠질뻔한 남편이 곱게 보이시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