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에 남편이 술을 마시고 사고를 쳤죠.
사고도 사고지만 입에 대지 않겠다고 아버지 애들까지 들먹이며 약속한 사람이
결국 또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저는 더 화가 났죠.
결혼하고 일년에 서너번 그러다가 술 마시고 그러는데 질려서
제가 난리 난리 친 이후로는 일년에 한번 그래요. 네, 일년에 딱 한번이네요.
큰애만 있을 땐 그래 이렇게 사느니 이혼하자, 쉽게 생각했지만
둘째까지 있으니 그게 생각마저도 쉽지 않아요.
늘 이혼 얘기는 남편이 술김에 먼저 꺼내놓고 정신 차린 후에 제가 이혼하러 가자 하면
잘못했다 다시는 안그러겠다 싹싹 비는 남편이라 제가 이혼하자고 한들 하네마네 실랑이 벌일 힘도 없구요.
이번엔.. 화가 나지는 않고 그냥 마냥 슬프더라구요. 지금도 그냥 슬퍼요.
이 상황을 어쩔 수 없다는게 슬프고, 이 상황을 끝내려면 내 마음만 다잡으면 된다는 생각에 슬프고,
천진한 큰애 웃음소리 들으면 슬프고, 제 언니에 치이고 엄마 감정에 치여 제대로 보살핌 못 받는 둘째 생각에 슬프고.
남편은 원래 점심먹고 나가서 일하고 밤에 들어오는 사람인데
보름 전에 그렇게 사고를 친 이후로는 아침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네요.
자기 사무실이 있으니 일찍 나가 있다가 밤에 일 끝나면 pc방 가서 게임하고 오던가 그럴거에요
저는 아침에 큰애 등원시키고 남편이 일찍 나가고 나면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둘째랑
종일 있다가 큰애 하원하면 애 둘 뒤치닥거리하고 밥 먹이고 씻기고 해 지면 재우고.
애들이 자면 제 시간도 그대로 멈춰버리죠. 캄캄한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있기도 하고
하릴없이 블로깅하면서 다른 사람들 사는 모습 보기도 하고 쓸데없는 인터넷 쇼핑을 하기도 해요.
그러다 12시가 되면 저도 애들 옆에 가서 눕고.. 한시간 쯤 후엔 남편이 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들리면 저도 그대로 잠이 들어요.
제가 지친만큼 남편도 지쳤겠죠.
남편 말로는 그렇게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게.
자기가 있으면 제가 불편할테니 그런다고는 하는데.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 그럼으로써 자기도 불편한 순간은 피할 수 있는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남편도 저도 대화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고 지난 일을 잊고.. 하는 그 모든 과정들에 쏟을 기운이 없나봅니다.
그랬는데 어젠가 그제 아침엔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자기는 우울하거나 그렇진 않지?' 그러네요.
최근에 직장 동료 한분이 우울증이 있어서 퇴사까지 했거든요. 남편 생각엔 우울증이 그렇게 무서운거구나 싶었나봐요.
이 사람아,
우울증이 뭔지나 알고 그렇게 묻니..
우울하다는게 뭔지나 알고 그렇게 묻는거니.
내가 지금 우울하지 않으면 어떤 기분이겠니.
하루 종일 일반 성인과는 말 한마디 섞을 기회도 없이 애들 돌보다 보면 어느새 아무도 없는 밤이 되어 버리는데.
컴컴한 집에서 나 혼자 무슨 생각을 할거같니. 애들 잠자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어떤 눈물을 흘리는거 같니.
아빠 엄마 아이들이 다정하게 유모차밀고 자전거 타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가 어떤 기분일거 같니.
내가 우울하지 않냐고 물었지.
내 우울의 근원이 당신이라는건 모르겠지.
그걸 알면 당신은 또 당신 나름대로 슬퍼지겠지.
우리는 그냥 이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이렇게 말 없이 사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
저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슬픔이 결코 우리 서로에게 닿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