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서신 저자 김영환 반성문 (사상전향서)
저는 중,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나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또 유신체제와 5공 체제에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부모님의 영향도 받고 해서 당시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던 82년경에 이미 서울대 운동권에서는 광범위하게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도 느꼈으나 곧 역사와 사회현상들에 대해 명쾌하고도 정교한 해석을 내려주는 마르크스주의에 매력을 느껴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운동의 길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각종 영어책, 일어책들을 구해다가 동료들과 같이 공부하고 후배들을 의식화 교육시키고 시위에 적극 참가하는 등 열심적으로 활동을 벌였습니다.
저는 3~4학년 경에 기존 학생운동에서 '민족자주'나 '미국'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나오는 것에 불만을 품고 민족문제에 대해 적극 연구하기 시작하여 제가 4학년이던 85년 하반기부터 학생운동에 '반미운동'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러한 '반미운동'을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대학생들의 정서에 호소해 순식간에 학생운동의 대세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학가의 반미운동을 이끌면서 반미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할 필요성을 느껴 미국이나 일본, 심지어 제3세계권 자료까지 닥치는 대로 모았는데 마침내 북한과 관련된 자료까지 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우리 처지로는 통일원이나 극동문제연구소 등 정부나 관변단체 등에서 나오는 자료밖에 구할 수 없었는데 그러한 자료들에는 '미국'문제나 '민족해방'에 관한 것도 나오지만 그보다는 '주체사상'과 관련해서 더욱 자세히 서술해 놓고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민족주체의식'을 교육받아오고 '인본주의'를 강조하던 우리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내용이었으며, 계급투쟁 선동 일변도의 내용이고 빈정거리는 식의 말투로 차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들에 식상해있는 우리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저와 동료들은 주체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저는 '강철서신' 등의 글을 써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았고 그 결과 소위 '주사파'라는 운동권 최대의 세력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활동과정에서 체포되어 2년 정도 형을 살고 나왔습니다.
교도소에서도 생각이 별로 바뀌지 않았던 저는 출소 직후인 89년 2월 주사파 조직인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해서 활동했으며 그러는 도중 89년 7월경 남파공작원에 포섭되어 북과 연계를 맺고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1년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나고 각종 교유을 받고 돌아왔으며 그 후에도 북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습니다.
밀입북했을 때 보니 북한의 경제실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고 당간부들이 하급관리나 일반 주민에게 아주 고압적인 자세로 대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고 김일성은 사고가 30~40년 전의 상태에서 박제화되어 조금도 변화발전하지 않는 듯한, 그리고 남한의 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한 발언만 하였는데 이 모든 것들은 저를 많이 실망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때까지는 그 모든 문제점들을 주체사상을 무기로 해서 극복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북과 계속 연계를 갖고 활동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실망스럽기만 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과 관련해서 북에 도움을 받을만한 것은 없었고 유일하게 도움이 필요한 것이 통일운동이었는데 바로 이 통일운동에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일관되게 방해만 하고 나왔습니다.
93년 초에 우리는 당시 통일운동이 일반대중으로부터 심각히 유리되어 있고 아무런 발전전망이 없으며 통일운동 발전의 결정적 걸림돌로 되고 있는 것이 범민련이라고 보았으며 범민련을 해체하고 북과 직접 연계되지 않은 새로운 대중적인 통일운동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러한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북에도 이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북에서는 이를 도와주지 않을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오히려 방해하고 나섰고 그로 인해 남한 운동권이 심각한 분열상황에 빠지게 되고 분위기가 극도로 혼탁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며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범민련을 해체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번번이 묵살되었습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과연 그들이 남한 진보운동의 발전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의심하게 되었고 우리를 단지 그들 체제유지의 소모품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92년에 넘어온 강철환, 안혁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이어진 탈북자들의 증언들은 북한 사회의 비참한 실상을 깨우쳐주었습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잘 믿지 않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는데 그러한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각본에 따라 외워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재차 삼차 이야기할 때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거짓말일 경우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탈북자들의 증언이 일관되고 꾸며서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며 또 탈북자들이 정착한 다음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것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면 그 중 일부는 반드시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탈북자들의 증언이 대체로 진실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한 탈북자들의 처절한 증언으로 94~5년경에는 북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굳히게 되었고 96년의 이한영의 증언이 나오면서 북한 김일성, 김정일 정권이 극단적으로 부도덕한 정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만인평등의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한편으로는 엄청난 특권과 사치생활을 즐겼으며 일반 주민들이 사소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가차없이 처벌하면서 자기들은 첩을 몇 명씩 두고 남의 아내를 빼앗는 등 갖은 부도덕한 짓들을 서슴치 않았으며 인민의 자주성을 외치는 주체사상을 내세우면서도 인민의 자주성을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주체사상은 그들에게 단지 지배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92년 2월, 북한의 황장엽 비서가 망명하고 식량난으로 북한 주민 수십만,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구체적으로 전해져 오면서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같이 활동을 해오던 사람들에게 북한 김정일 정권은 남북한 민중 모두에게 적이며 우리 민족 제 1의 과제가 북한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민혁당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민혁당 해산 결정을 하고 민혁당 하부의 각급 조직들에도 해산을 지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사상을 완전히 전환하고 지금은 북한 민주화운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제가 과거에 했던 활동들로 인해 생긴 여러 나쁜 영향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제 잘못 중 큰 것들만 따져보면
첫째, 운동권 전반에 걸쳐 친북적인 분위기를 확산시킨 것입니다.
이 잘못은 다른 어떤 잘못보다 치명적이며 사회 각계각층에 좋지 않은 영향을 오랫동안 미쳤고 국론분열과 사회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대학 다닐 때 잘못된 방향의 운동에 시간을 허비하고 또 사회에 나가서는 꿈꺾인 청춘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그 수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북한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있으며 이들이 남아있는 한 저는 죄책감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 북한의 대남전략에 말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비밀리에 내려온 공작원과 만나 그에 포섭되어 북한에 까지 가서 김일성과 노동당 간부들을 만나 혁명운동전략에 관해 토론하고 남한으로 내려온 이후에는 그들과 연계를 가지며 운동방향 등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노선이나 전략도 있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북한과 그런 식의 연계를 갖고 협의를 한다는 것이 북한의 고도의 대남전술에 말려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자체가 위법적인 활동일 뿐 아니라 국가의 대북정책이나 대공활동에 혼란을 조성할 수 있고 국익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저처럼 명문대를 나온 인텔리이자 사회운동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사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무책임하고 분별없는 행동이었으며 그 어떠한 논리로도 합리화되기 어려운 잘못된 일들이었습니다.
셋째, 북한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알리고 친북 분위기가 확산되도록 함으로써 극단적인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남한 사회 및 국제사회의 관심이 늦어지도록 하는데 한 몫 했습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한편으로는 극한 상황의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최악의 인권상황에서 개,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북한주민은 국제적인 관심과 지원, 특히 남한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며 이를 못 본 체하는 것은, 더 나아가 이를 방해하는 것은 역사와 인류앞에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제가 이런 큰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젓가락처럼 앙상해진 팔다리를 힘없이 늘어놓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북한 어린이를 보면, 사소한 잘못에도 몽둥이로 사정없이 얻어맞는 북한 주민들을 부면 사실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말조차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가닥 용기를 내어 잘못을 용서해주길 빌며 북한 동포 앞에 무릎꿇고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저는 지난 시기 많은 오류를 범했던 사람이지만 만약 앞으로 제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한의 비참한 인권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며 좀 더 나아가서 김정일체제를 무너뜨리고 북한을 민주화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다 바치고 싶습니다. 또한 제 글에 영향을 받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여전히 친북적인 사상을 가지고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을 설득하기 위해 글을 쓰고 대화를 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금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도 과거의 낡은 사상이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나 본인에게나 큰 손해입니다. 이러한 청년들이 바른 방향에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이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과거 저를 믿고 따르며 함께 활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잘못된 길로 인도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생각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도 하루빨리 생각을 바꿔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동참할 것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국가와 국민 앞에, 그리고 사회적 갈등과정에서 숨져간 모든 분들 앞에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죄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1999. 10. 4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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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서신 저자 김영환 반성문 (사상전향서)
강철서신 조회수 : 882
작성일 : 2012-05-18 03: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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