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이런 혼잣말을 했더랬죠.
"나라도 애 하나 더 낳을 걸 그랬어"
올해 결혼 20년에 재수생 고3 아이 둘을 둔, 갱년기 증세로 괴로운 아줌마의 혼잣말이었습니다.
전라도 30석 경상도 60석
역대 대선 때 전라도에서 "애들 많이 낳아야겠다"고 한탄했다던 말들이 실감이 되더군요.
6월 항쟁 때 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직선제 대선이 있어서 대학 마지막 기말 시험을 1월 초에 봤었지요.
그 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IMF가 왔죠, 사재기를 해야하나, 일말의 양심으로 그럴 순 없지 ... 불안과 초조의 날들...
분노가 들끓었고
버뜨 그 때 선거에서도 신한국당 - 맞을 듯??- 은 건재함을 과시합니다.
IMF를 극복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세계를 누비던 대통령은 아직도 여전히 빨갱이의 프레임에 갇혀 있고
대선 날 새벽을 기다리며 혹 조선일보가 뭔 장난이라도 칠까 베란다에서 아파트 마당을 내려다 보며 지키다
투표소 문이 열리기 무섭게 가서 두근거리며 노무현에게 한 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통을 그렇게 보냈고
권여사의 손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울던 디제이 -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군요 - 를 그렇게 보냈죠...
서글프고 또 서글퍼서 그렇게 가버린 노통이 원망스럽기까지 해서
아주 후에야 봉하에 갔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디제이 묘소는 위치도 그렇도 얼마나 우습게 되어있는지
거기에 나이값 못하는 노인들이 고인에게 욕을 보이기도 했지요..;..
우리는 모두 제정신인 걸까요???
경상도 울진 본적으로 대학 4학년 때 첨으로 전라도에 가봤습니다.
아버지가 근무 중이던 부산에 들렀다가 광주로 해서 전북 어딘가 답사에 가있는
과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그래도 좋아졌지만 그 때의 광주역에 내려 시외버스를 타고 전북으로 넘어갔는데
큰 길 빼곤 모두 비포장도로라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적어도 경상도의 몰표와 전라도의 몰표를 함께 묶어서 비난하는 몰상식, 몰염치는 가져선 안됩니다.
이런 말조차 넘치는 것 처럼 비상식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박정희 18년으로도 모자라 30년이 지나 그 공주까지 봐야하는 참담한 두려움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 돌파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디제이와 노통이 있었던 것처럼
그런 봄 날이 다시 와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