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 사람은 억울하다. 때린 사람은 모르쇠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일터 고위층이 먼저 움찔한 꼴이다. 확인사살이 따로 없다. 헌데 이를 어쩌나. 사건 관련 진술들은 속속 터져 나오고 있다. 게다가 팩트도 구닥다리다.
해명자료를 내놓은 다음날인 4일 국정원까지 움직이는 걸 보고, KBS 김인규 사장은 안도의 한숨이라도 내쉬었을까? KBS가 어제(3일) '연예인사찰'과 관련 발 빠른 해명을 내놨다. "공영방송 MC는 제작진이 결정, 정치적 측면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에 이어 '연예인 사찰'이라는 급박한 국면에 대처하는 공영방송의 자세치고는 변명이 꽤나 궁색하다. 아니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재탕 수준이다.
MBC 노동조합의 <제대로 뉴스데스크>가 3일 오후 KBS와 연루됐던 방송인 김미화·김제동씨와 인터뷰를 가졌다는 소식을 접한 뒤, 급하게 내놓은 자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다.
김미화, 김제동에 대한 해명, 왜 이리 궁색해?
먼저 KBS는 김미화씨의 경우 "2010년 5월, 김씨의 내레이션에 대해 호흡과 발음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문장의 띄워 읽기의 정확도가 떨어져 인지도는 있지만 본 프로그램에는 크게 도움 되지 않는다는 KBS심의실의 심의평가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헌데 2010년 5월 당시 KBS 임원회의가 김미화 씨의 <다큐멘터리 3일> 나레이션 진행에 대해 딴죽을 걸었을 때의 해명을 그대로 '붙여넣기'한 수준이다. 여기다 KBS는 김미화씨를 "예의 주시하다고 있다"고 겁박을 하기까지 했다. 최근 KBS 교향악단과 관련한 트위터 글 논란까지 덧씌운 것이다.
"김미화씨가 KBS의 명예를 훼손해 피소된 뒤 사과와 용서를 구한 적이 있는데 최근 다시 KBS 교향악단이 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적인 칠순잔치에 동원됐다며 트위터에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사과하는 등 근거 없이 공영방송의 명예를 함부로 훼손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반복하고 있어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연예인사찰'의 중심에 선 김제동씨의 <스타골든벨> 하차에 대한 해명은 한술 더 뜬다.
"KBS는 김제동씨 교체는 전임 사장시절인 2009년 10월의 가을개편 과정에서 4년간 진행해 온 <스타골든벨>이 시청률 부진으로 쇄신이 불가피해 진행자를 교체한 것이며, 이후 김제동씨는 재능이 인정돼 <해피투게더>와 <승승장구> 등에 정상적으로 출연했다"
시청률 부진에 따른 교체라는 케케묵은 이유는 변함이 없다. 여기에 '진행자'가 아닌 '게스트'로 <해피투게더>와 <승승장구>에 출연한 것을 마치 통 큰 '배려'를 한 것 마냥 '외압'이 없었단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마치 무능하고 인지도도 없는 무명 연예인에게 출연 기회를 제공한 듯한 선심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신경민 "리스트에 서 살아남은 사람은 손석희 정도"
"시사프로를 몇 년 째 진행을 한 개그우먼 출신 방송인인데, 지금 정권이 여러 번 김미화 씨를 제거하려는 여러 가지 공작을 통해서 사실은 해직 언론인 수준으로 김미화 씨의 신분을 바꿔놨다고 볼 수 있고, 저도 김미화씨한테 이제 당신은 해직 언론인이라는 타이틀을 받게 된 거다, 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오늘(4일) 오전 PBC FM <열린세상, 오늘! 이상도입니다>에 출연한 MBC 출신 신경민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방송인 김미화씨에게 "해직언론인" 타이틀을 수여했다. 그는 3일 "나도 사찰을 당한 것으로 안다. 관선기자들로부터 '당신도 애 키우고 가족 있는 사람인데 조심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방송사에서 돌아다녔다는, 2010년 7월 터졌던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금 확인해줬다.
"그 당시에 방송가에 돌아다니던 찍어내야 될 대상자들 리스트가 있었거든요. 분명히 입에서 입으로, 또 상부층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은 분명히 있었고요. 그 분들이 항상 그런 구전 속에서 이름이 오르내렸던 그런 분들인 건 분명합니다. 저도 들었고 방송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던 공개된 비밀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중에 지금까지 방송을 하는 분은 사실 손석희 교수 정도가 남았다고 볼 수 있죠."
신경민 대변인은 3일 김미화가 "2010년 중반쯤 국정원 직원이 2번 찾아왔다. 청와대 윗분에 대해 VIP라고 지칭하며 직접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거론했다. VIP가 나를 못마땅해 한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말한 정황의 배경을 다시금 확인해 준 셈이다.
도둑이 제발 저렸던 KBS, 다음엔 어떤 해명을?
방송인 김제동 또한 KBS가 해명을 내놓은 뒤인 3일 오후 MBC 노조와의 인터뷰를 통해 "신문 1면에 내 이름이 나가게 돼서 (정권에) 감사하다"며 "옛날 같았으면 국정원 직원, 경찰청 정보과라 하면 바짝 얼었을 것인데 그 정도 사람들은 별로 겁도 안 난다"며 사찰과 관련된 정황을 털어 놓기도 했다.
그러니까 현재적 사안은 '사찰'이다. 김미화·김제동씨 본인들은 물론 국민들도 '공영방송 KBS'의 예전 대응보다는 연예인 사찰의 구체적인 정황이 더 궁금하고 또 중요한 사안이란 뜻이다. 마치 도둑이 제발이라도 저린 듯 KBS가 발빠른, 그러나 새로울 것 없는 해명자료를 내놓은 것은 사찰이 명백한 사실로 드러날 경우를 대비한 면피용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연예인들까지 (사찰을) 했다는 점에 있어선 다른 정권과 경우와 질을 달리 하거든요. 아무리 민주 정권이라고 하지만 이건 독재 정권보다 더 심한 정권이거든요. 그러니까 제2의 MB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제2의 정연주, 김제동, 신경민은 나와서 안 된다는 것이 제 지론이고요. 정리하기를 위해서는 청문회가 반드시 필요해 보입니다."
신경민 대변인은 물론 김제동·김미화씨 모두 KBS를 겨냥할 틈이 없다. 민간인을 넘어 연예인까지 사찰한 정권 차원의 전무후무한 인권유린과 불법 앞에, 현재스코어로 봤을 때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KBS 임원들의 행위는 부차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얘기다.
"사찰피해자에게 '당신이 얌전히 안 살아서 그런 일 당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스토킹을 당한 여성에게 '네가 스토커에게 무슨 사인을 보냈으니 그러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토커는 자신이 아름다운 '구애'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사찰요원은 자신이 숭고한 '애국'을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사생활을 파괴하고 강력한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줍니다."
서울대 조국 교수는 이번 '민간인·연예인 사찰' 건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그리고 국정원은 4일 오전 "국정원 직원이 찾아간 적이 없다며 법적대응에 착수할 것"이라 밝혔다. 과연 '스토킹'을 도와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고 '오해'(?)를 받고 있는 KBS와 KBS 김인규 사장은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또 어떤 '해명'을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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