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2학년까지 외국 학교를 다녔어요.
그 전에는 알파벳도 몰랐고요.
그리고 중고등학교 대학교 다 한국에서 다녔고 외대 통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영어소설만 좀 봤지 테이프 하나 안 들었어요.
저희때는 외국에서 왔다고 선생님이 교과서 읽어보라고 했을때 발음 너무 좋으면(?) 좀 야유하는 분위기였거든요.
저도 사실 통번역을 하고 싶지 않고 예를 들면 엔지니어인데 영어를 잘하는 사람, 디자이너인데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더 멋있다고 생각했고요.
제 동생은 유치원-초3, 중1-고1까지 외국학교를 다녔어요. 말하자면 영유를 나온거죠. 그런데 제 동생은 저보다 영어, 한국어 다 떨어져요.
남자애라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보면 제가 확실히 말/글을 이해하는 능력이 좋아요.
저는 어쩌면 과독서증 (hyperlexia)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두돌에 글을 읽었고 선후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친구가 없으니 책을 읽었고 책만 읽다보니 친구가 더 없고... 했어요. 고무줄놀이도 못하고 공기도 못해요.
하지만 그러다보니 속독을 잘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텍스트가 현실세계보다 좋으니까 텍스트에 집착하게 되었어요. 청소년기에는 중2병에 걸려서 어머, 논노? 난 논어 읽어. 너 자본론 모름? 영어로 읽어보려고 해. 하면서 학교에 하나씩 있는 좀 이상한 아이가 되었고요.
그래서 사실, 수능 체제가 유리했어요.
언어랑 외국어는 그냥 풀어도 거의 틀린적이 없어요. 나머지 사회, 과학탐구는 대략 왔다갔다 하면서 얻어들은 걸로 추측해서 풀면 80% 정도는 정답... 자세히 아는건 하나도 없는데도요.
그래서 "공부 안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처럼 보였던 거 같아요.
최상위권은 아니었어요. 수학이 50% 수준이었거든요. 80점 만점에 좀 잘 찍으면 5-60점, 못보면 40점대.
저한테 있는건 속독과 문맥 파악 능력, 추리능력이었던 거죠.
없는건 확실한 과목별 지식, 심층적인 내용 이해, 앉아서 진득하게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푸는 능력.
그런데 속독하고, 때려맞추는걸 잘하는건 거기까지라고 생각해요. 말/글을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지만,
그건 베이스고 사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해요.
통번역사가 될거면 말/글을 이해하는 능력만 탁월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저도 저희 딸이 통역사가 되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다면, 통역사를 고용하는 전문가가 되었으면 하거든요.
오히려 언어능력이 저보다 떨어졌지만 이해력, 문제해결능력이 좋았던 제 동생이 나중에는 저보다 학업성적이 좋았어요.
걔는 공부를 하고 그걸 바탕으로 문제를 풀었고 간혹 서술형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서 겪었던 어려움은 몇번 유사한 경험을 하면서 쉽게 해결될수 있었거든요.
언어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분야의 유일무이한 전문가라면, 영어쯤 못해도 모셔갈 사람이 넘쳐나는 거고
솔직히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될 정도의 지능이면 외국어는 필요할때 필요한 만큼 습득하는게 전혀 어렵지 않을거라 봐요.
그리고 이건 제가 요새 주변 아기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인데, 언어든 공간지각이든 모든 능력이 어느정도는 태생적이지 않나 해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우리 아이가 어떤 성향으로 태어났는지 이 아이의 소질이 뭔지 빨리 파악하고 계발하도록 조력하는 정도? 없는 소질을 만들기도 힘들거니와 있는 소질을 사장시키기도 힘들지 않나, 부모의 역할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