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wishut3281?Redirect=Log&logNo=10133238121
육체적 고문보다 끔찍한 北수용소의 '표창결혼'
먹고 살려고 어머니 죄 고발… 형은 내 눈앞에서 공개 총살
정치범수용소서 태어나 24년 살다 탈북한 신동혁씨
남녀의 사랑, 아이의 출생조차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선 ‘계획관리’에 포함된다. 남녀 모범수를 골라 합방시켜 애를 낳게 하는 ‘표창결혼’이 그것이다 . 이런 식으로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 탈북에 성공한 신동혁(30)씨가 28일 탈북자 인권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가운데 정치범수용소의 ‘표창결혼’으로 출생한 이는 그가 유일하다.
그는 완전통제구역인 평안남도 개천시의 ‘개천 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났다. 출발부터 정치범으로 낙인찍힌 채 24년을 살다가 2006년 탈출했다.
이날 중국대사관 앞의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시위에 참석한 신씨는 정치범수용소의 육체적 고문보다 더 끔찍한 인권유린은 ‘감정 고문’이라고 했다 . 신씨는 ‘표창결혼’을 그 사례로 들었다. 노동사역을 잘하고 일에 지각하지 않고, ‘생활총화(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자아비판의 장)’에 열심히 임한 모범수 남녀를 김일성이나 김정일 생일 때 골라 5일 정도 같은 방에서 동거시켜 아이를 낳게 하는 제도다. 2명의 간수가 한 수용소 안에 2500명 정도의 수감자들을 감독하는데 합방할 짝은 오로지 간수에게 간택된다. 신씨는 “정치범수용소 10대 원칙에 남녀 접촉 금지가 있는데 표창결혼은 이를 유일하게 허용하는 창구”라며 “그런 환경에서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가족, 사랑, 우정 같은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 고백했다.
그는 14살 때인 1996년 어머니와 7살 위의 형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공개처형(총살)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생활총화에서 어머니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며 “그 죄책감으로 평생을 시달릴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이 사건으로 지하감옥에 끌려가 불고문을 받아 아직도 등에 흉측한 화상 흉터를 갖고 있다. 아버지도 고문으로 움직일 수 없는 불구가 됐다. 주머니에 밀알 다섯 알을 숨기다 들킨 여자 아이가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도 봤다.
수용소 내 피복공장 수리작업반에서 일했던 신씨는 2005년 40대 후반의 평양 출신 태권도 사범을 만나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를 통해 수용소 밖의 생활에 대해 난생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종종 제게 찐 닭을 결을 따라 뜯어먹거나 콩비지에 밥을 비벼 먹던 시절을 흘려가듯 얘기했어요. 매일 강냉이죽만 먹던 저는 꿈을 꿔도 계속 닭다리가 나타나더라고요.” 6개월간 먹을 것을 상상하며 몽환에 휩싸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전기철조망을 넘었다.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했다. 같이 탈출하려던 태권도 사범은 감전돼 죽었다.
그는 “매 맞는 공포, 굶주림의 공포, 고문의 공포, 죽음의 공포를 제외하면 다른 감정을 아예 알지 못했다”며 “한국에 와서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탈북 이후 신씨는 미국 LA의 탈북자 지원단체인 ‘링크(LiNK)’에서 2년간 일하며 60명가량을 중국에서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29일 오후 2시부터 아프리카TV(www.afreeca.com)에서 북한의 수용소 생활과 인권유린 실태를 전할 계획이다. 다음 달 29일엔 미국에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정치범수용소에서의 탈출(Escape from Camp 14·사진)』을 출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