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나혜석 조카가 쓴 회고록을 봤는데요-물론 나혜석 얘기만 있는 건 아니고
일제 시대 가족 얘기인데, 거기 고모인 나혜석의 얘기가 중간중간 나왔어요.
저는 이름만 걍 들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몰랐는데
- 참 너무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난 여인인 듯....
예술가로서 글도 잘 쓰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이 여인은
같은 예술가의 멋과 재기, 유머감각까지 있던 일본 유학생 최승구와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핵으로 요절해 버리고....사랑을 잃어버린 상처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남편이 될 김우영(이미 딸 하나 있던 상처한 몸)이 끈질기게 열성적으로 구애를 합니다.
몇 년간의 구애 끝에 나혜석은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 대신 조건을 내세웁니다.
1. 지금처럼 나를 평생 사랑해 주시오
2.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오
3.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별거하게 해 주시오
그 당시로는 참으로 바다와 같은 남편이었네요. 1920년대에 저 조건을 받아주고,
신혼여행가서 나혜석이 죽은 최승구의 묘에 가서
-나는 이제 이 남자를 잊어버리고 당신과 새출발하니, 이 남자 묘에 비석을 세워 주시오-
라는 요청까지 들어 주었으니....요즘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네요. 헐~
예술가의 기질이 통하는 남편은 아니었지만, 나혜석은 남편 그늘 아래서 나름 행복하게
그림 그리고, 고위직에 있던 남편의 지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 숨겨 주는 등 ....잘 살았습니다.
유럽 여행을 가서 자유로운 파리에서 남편과 떨어져 지낸 게 화근이었습니다.
거기서 최 린을 만나게 되고, 원래 파리에서는 무덤덤한 사람도 기분이 심숭생숭해지는데,
감성과 끼가 넘쳐흐르던 그녀가 아는 한국사람까지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워요.
거기다 최린은 예술가로서의 멋과 재기가 있어 요절한 애인 최승구를 연상시켰고,
평소 예술에 문외한인 남편과 통하지 않던 대화가 너무나 잘 통해 그만 불륜까지 가고 말았네요.
하지만 나혜석은 파격적인 유럽 여성들의 가치관을 보여 줍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도 사랑이고, 최린에 대한 사랑도 사랑이며 최린을 사랑함으로써 남편에 대한 사랑도
더 깊어졌다는....
유부녀도 다른 남자를 사랑을 하는 게 가능하다는...
김우영은 충격에 휩싸이지만, 한 번만이라고 다짐받고 용서해 줍니다.
그러나 갑자기 살림이 어려워지면서 나혜석이 또 최린에게 도움받고자 편지쓴 게 김우영의 귀에 들어가
이혼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비난받으면서 매장당해서 비참한 말년을 보내네요.
김우영은 김우영대로 다른 여자와 혼인하긴 했지만-
이 남자 인생도 참 평탄치 않네요. 혼인을 3번이나 하고...
나혜석에게서 받은 충격으로 불행했다네요....
백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한국사회가 크게 변한 것 같진 않아서
-나혜석같은 여성이 또 나타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그게 서글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