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댓글을 보니 오해의 여지가 있어 나꼼수빠를 나꼼수팬으로 수정했습니다.
‘김어준의 관점’이란 초반 2회를 제외한 모든 나꼼수 방송, 대부분의 뉴욕타임즈, 김어준이 MBC라디오에서 진행한 색다른상담소 그리고 김어준의 글과 강연을 본 결과 제 나름으로 판단한 김어준의 관점입니다.
여기서 비판하는 ‘나꼼수팬’이란 나꼼수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분들과 나꼼수 논란에서 싫으면 듣지마 논리로 방어하고 나꼼수를 비판하면 알바로 몰거나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분들로 한정합니다.
김어준의 관점은 두 키워드로 풀어 말하겠습니다.
‘자기성찰’과 ‘잠정적 권력의지’입니다.
김어준이 자기성찰을 잘 하는 사람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기성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김어준은 정봉주와 만난 인연을 소개할 때 늘 하는 말이 자기성찰을 하는 국회의원이어서 좋다고 말합니다. 경박하고 실수도 잘 하지만 금세 자기성찰을 해서 제자리를 잘 찾아온다며 그런 점이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어준은 정치를 세상의 개혁이나 진보를 통한 발전 등과 같이 우리 또는 타인으로 확장하는 개념이 아닌 자신의 생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으로 그 개념의 중심을 잡습니다. 일반적으로 거대담론을 동반하는 정치를 자신의 욕망을 스트레스 없이 실현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도구로 환원시킵니다. 수많은 고민상담에 대해 김어준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으로 출발점으로 삼아 해답을 풉니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 세상의 학습된 세뇌효과 등으로부터 해방되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귀결이 자기성찰입니다. 그러면 자기성찰은 어떤 과정으로 어떤 결과를 낼까요? 과정은 소통과 내면성찰이며, 결과는 자각과 포용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과 결과는 계속 순환되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일단 나꼼수팬분들께 묻습니다. 김어준의 근원적 관심사항인 자기성찰에 관심이 있습니까? 김어준은 김어준이고 나는 나기 때문에 왜 그딴 거에 관심을 가지냐고 답한다면 나꼼수팬의 자격까지 논하기는 뭐 하지만 김어준이 그리는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나꼼수와 김어준을 이용할 뿐이지 그의 가치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분들에게도 자기성찰은 필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을 실현하여 행복을 실현하는데 자기성찰 없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성찰의 관점에서 나꼼수팬을 비판하자면 이렇습니다.
자기성찰은 끊임없는 외부와의 소통 행위와 자기내면의 성찰을 동시에 수반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해 틀리다고 단정짖고 귀를 막는 것이 자기성찰에 도움이 될까요?
물론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항상 대립시키는 국면으로 몰고 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거듭되다보면 정치를 생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라는 김어준의 말에 동의하며 나꼼수에 열광하고 정치에 몰입했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성찰의 결과물로 얻어지는 자각이란 것은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십시오. 소통에 관심을 가져 자기성찰을 하십시오. 자신의 이중성을 인정하고 철저히 깨부십시오. 그리고 권위에 대한 절대화, 자신 신념의 절대화도 의심하십시오. 빠가 되면 절대적 신념에 사로잡힐 위험이 있습니다. 신념을 객관화하는 자기성찰을 하십시오. 그것이 자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며 나꼼수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촛불집회때부터 등장한 집단지성의 힘에 대해 저는 회의적으로 생각했습니다. 2008년 촛불집회때 두 달간 몰입하며 그들과 함께 했는데 사회개혁은 강조하지만 자기성찰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사상적으로 진보라 말하지만 자기 생활속에서 진보와 반하는 이중성을 잘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내편과 적을 나누고 알바와 스파이를 찾아내려 고심하는 모습속에서 이것이 집단지성이란 말인가 회의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소통을 위한 토론문화 수준이 너무 낮은 것도 한 이유입니다. 발언과 경청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심하게 쏠리고 있습니다. 자기성찰없는 개혁은 정권교체를 이룰 수는 있을지언정 좌파와 수구의 대립과 각각의 콘크리트층 형성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입니다.
김어준 관점의 두 번째 키워드인 잠정적 권력의지에 대해 풀어보겠습니다.
‘싫으면 듣지마’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김어준의 권력의지입니다. 권력의지라 함은 문재인에게 없어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고성국이 비판한 바로 그 권력의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김어준이 감투를 쓰고싶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군소언론인 조중동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갖추고 야권이 총선승리하고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는 잠정적 권력의지를 의미합니다. 정권교체 되면 다시 김어준은 야인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싫으면 듣지마’는 골방에서 매니아들을 대상으로 방송하는 나꼼수 초기시절일 때만 어울리는 대꾸입니다. 지금은 어젠다 형성과 주요 정치이벤트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내는 수준으로 올라섰기 때문에 오히려 나꼼수의 영향력에 해가 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김어준이 직접 ‘싫으면 듣지마’라고 언급한 것은 B급정서와 방송횟수에 대한 나꼼수팬들의 비판과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선을 그어야 하지 나꼼수 영향력 확대에 선을 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꼼수에서 김어준의 권력의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뉴욕타임즈에서 고성국과 공방을 버릴 때 여실히 드러납니다. 야권이 총선과 대선승리를 생각처럼 쉽게 이룰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고성국 비판에 김어준은 일정부분 동감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능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몇차례 나옵니다.
나꼼수의 영향력이 조중동을 넘어선다하여 나꼼수를 정론으로 격상(?)시켜 편파성과 B급정서를 파괴하려는 조중동과 수구진영에 대한 방어논리로도 ‘싫으면 듣지마’를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어준은 편파성과 B급정서를 유지한 채 골방에 머물지 않고 큰물에서 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요 정치이벤트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나요?
가카헌정방송으로만 머문다면 싫으면 듣지마가 통합니다. 그러나 총선과 대선이란 목표가 있는한 이런 대꾸는 안됩니다. 선거의 싸움은 변함없는 콘크리트 지지층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그들을 투표소로 얼마나 이끄냐도 중요한 관건이지만 더욱 중요한 대상인 침묵하는 다수 또는 부동층을 얼마나 흡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들은 굳건한 정치적 신념이 없고 정치를 이미지로 수용해 쉽게 정치적 선택을 바꿉니다. 이들이 나꼼수를 알음알음 전해 들어 나꼼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나꼼수의 B급정서에 딴지를 건다고 이해시키는 노력을 등한시하고 싫으면 듣지마로 쉽게 내쳐 버리면 그들 마음에 잠시 일었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고 다시 냉소주의자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렇게 소통을 거부하다보면 선거에서 부동층을 잡지 못해 실패할 수 있습니다. 소통하며 이해시키십시오. 나꼼수 멤버들이 앞장서 목숨걸고 힘들게 싸워 왔던 것에 나꼼수팬으로서 감동했다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더욱 가열찬 응원도 필요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를 향한 소통의 노력도 꼭 필요합니다. 침묵하는 다수는 말하지 않을 뿐이지 언제나 당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첫 번째 키워드인 ‘자기성찰’은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환기시키는 기회정도로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김어준의 ‘잠정적 권력의지’에 부응하고자 한다면 나꼼수의 영향력에 해가 되는 소통단절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습관화된 ‘틀리다’의 인식을 ‘다르다’로 변환시키는 자각을 나꼼수팬분들께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