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씨는 과거 공안사건에 연루된 전력이 많다. 韓씨는 19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 朴聖焌(박성준)씨와 함께 실형을 선고받았었다. 당시 박성준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韓씨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형을 받았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金瓆洛(김질락)·申榮福(신영복) 주도의 ‘민족해방애국전선’과 李文奎(이문규)·李在學(이재학) 주도의 ‘조국해방전선’ 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非(비)합법, 폭력·非(비)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共産政權(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통혁당 관련 판결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入北(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
<“北지령받는 지하당이 분명” 주범 김질락의 自認”>
통혁당의 기본성격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地下黨(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미화) 7만 달러, 韓貨(한화) 3천만 원, 日貨(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지령형식인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띄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武裝工作船(무장공작선)은 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승탁·김일룡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김질락은 옥중遺稿(유고) ‘주암산’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地下黨(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월북 당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게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지하당)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강인덕 前 통일부장관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로동당과 통혁당은 지령을 내리고 받는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지하당) 관계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中央黨(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로동당이 계획한 것이다...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대남사업 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韓씨의 남편 박성준씨(당시 서울대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申榮福(신영복)에게 포섭된 ‘黨(당) 小組責(소조책)’으로서 妻한명숙 및 朴○○, 金○○ 등을 小組(소조)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는 것이다.
공안전문가 A씨는 黨 小組責(소조책)과 小組(소조)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黨員(당원) 중 최소 조직을 細胞(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黨員(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소조)를 이룬다. 小組(소조)와 細胞(세포)는 지하당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小組(소조)와 細胞(세포),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黨 小組責(소조책)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地下黨(지하당)에 입당한 黨員(당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韓씨 등 小組(소조)를 “통혁당 당원”으로, 박성준씨와 같은 黨 小組責(소조책)을 ‘통혁당 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박성준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당시 韓씨의 통혁당 사건 관련 판결문은 이러했다.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地下黨(지하당) 통혁당은 당연히 共産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앞의 수기 中 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김종태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반제)·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走狗(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中央黨(중앙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던 것으로 같은 수기는 기록하고 있다.
김질락은 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도 “그 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다.
<평양에 김종태 거리, 北통혁당 연루자들 영웅화>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당했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화에 나섰다. 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구)분대·區(구)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정권에게 변절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로 출감했다.
韓씨는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 한 것뿐,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밝혀왔다.
박성준씨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3일 동아)”,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조선)”,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25일 문화)”고 밝혔었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金瓆洛(김질락)·申榮福(신영복) 주도의 ‘민족해방애국전선’과 李文奎(이문규)·李在學(이재학) 주도의 ‘조국해방전선’ 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非(비)합법, 폭력·非(비)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共産政權(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통혁당 관련 판결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入北(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
<“北지령받는 지하당이 분명” 주범 김질락의 自認”>
통혁당의 기본성격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地下黨(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22일 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미화) 7만 달러, 韓貨(한화) 3천만 원, 日貨(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지령형식인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띄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武裝工作船(무장공작선)은 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승탁·김일룡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김질락은 옥중遺稿(유고) ‘주암산’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地下黨(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월북 당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게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지하당)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강인덕 前 통일부장관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로동당과 통혁당은 지령을 내리고 받는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지하당) 관계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中央黨(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로동당이 계획한 것이다...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대남사업 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韓씨의 남편 박성준씨(당시 서울대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申榮福(신영복)에게 포섭된 ‘黨(당) 小組責(소조책)’으로서 妻한명숙 및 朴○○, 金○○ 등을 小組(소조)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는 것이다.
공안전문가 A씨는 黨 小組責(소조책)과 小組(소조)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黨員(당원) 중 최소 조직을 細胞(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黨員(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소조)를 이룬다. 小組(소조)와 細胞(세포)는 지하당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小組(소조)와 細胞(세포),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黨 小組責(소조책)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地下黨(지하당)에 입당한 黨員(당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韓씨 등 小組(소조)를 “통혁당 당원”으로, 박성준씨와 같은 黨 小組責(소조책)을 ‘통혁당 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박성준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당시 韓씨의 통혁당 사건 관련 판결문은 이러했다.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地下黨(지하당) 통혁당은 당연히 共産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앞의 수기 中 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김종태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반제)·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走狗(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中央黨(중앙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던 것으로 같은 수기는 기록하고 있다.
김질락은 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도 “그 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다.
<평양에 김종태 거리, 北통혁당 연루자들 영웅화>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당했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화에 나섰다. 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구)분대·區(구)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정권에게 변절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로 출감했다.
韓씨는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 한 것뿐,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밝혀왔다.
박성준씨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3일 동아)”,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조선)”,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25일 문화)”고 밝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