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삿짐 정리가 끝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며칠간 시어머니께서 머물려 살림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그중 눈에 띈 것이 바로. 들기름 병.
몇번을 "이게 참기름 이고, 이게 들기름이야. 혼돈하지 말고 나물 무칠 땐 참기름 넣고,
생선 구울땐 식용유 넣지 말고, 들기름 넣어 구워, 그러면 비린내가 안나"
"알았어요" 저는 퉁명스럽게 대답해요.
그래도 시어머니는 저의 대답이 못 미더우셨는지.
종이로 또박 또박 써 구분해 놓으셨어요.
그런데 이게 뭐야?
'들기름을 뜰기름이라고 써놨잖아'
뜰기름^_^
삐뚤삐뚤, 소리나는대로 써 놓으신 시어머니의 글씨가 냉장고 안에서 절 바라보고 있어요.
나이가 먹으면 어린아이 같아진다던데..
요즘 시어머니의 글씨는 옷차림을 보면 정말 아이 같으세요.
약속이 있어 시어머님을 본가 집까지 모셔다 드리지 못 하고 큰 길가에 세워 드렸는데
비오는 날 시어머님이 펴든 우산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색깔이 선명한 무지개 우산이었요.
자식들과 며느리는 유치하다고,아무도 가지고 다니지 않으려는 우산을 시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지개 우산을 펴시고 횡단보도를 건너세요.
얼마나 귀여우시든지 차안에서 한참을 웃다가.
이내 서글품이 밀려왔어요.
우리가 버린것 ,우리가 하지 않는것, 우리가 유치하다고 사용하지 않는것,
그것은 모두 시어머니 차지에요.
자식들 며느리에게 좋은 것은 다주고,
뜰기름, 들기름 보다 더 맛있어 보이는 시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뜰기름.
그사랑스런 글씨가 주방에서 절 보고 웃고있어요.
절 미소짓게 해요.
2.
오랫동안 기침이 떨어지지 않는 못된 며느리를 위해 저희 어머님께서 배즙을 내려오시더니,
며칠 전엔 콩나물 머리와 꼬랑지 떼내 꿀 넣고 즙내린 민간처방약을 만들어 오셨어요.
" 나 죽고 나면 이런 거 가르쳐 주는 사람 없으니 비상으로 꼭 기억해 둬"
"병원 감기약이 전부가 아냐, 이런 민간요법도 알아둬야 해" 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외출 후 현관문을 여니, 탕약 달이는 냄새가 자욱하더군요.
시어머님의 향기에요.
녹용넣은 탕약 한첩 지어 손잡이 달린 옛 탕약기까지 들고 오신 시어머니.
약탕기 위에 사기 그릇 올려 그릇 데피시고 약한 불에 시엄마의 마음을 달이시고,아프지 말라고, 어서 아픈 것 나으라고.
며느리 위해 약을 데우시는 우리 시어머니.
3.
남편이 지방 출장 간 어느날 저녁, 혼자 저녁상을 차릴 제가 외로울까봐, 귀찮다고 저녁을 거를까봐
시어머니께서는 이른 저녁을 드신 후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저희집에 오셨어요.
멸치로 육수를 내고 된장을 풀어 쑥으로 맛을 낸 시원한 쑥국.
참기름에 무친 나물과 김을 잘라 금방 지은 밥에 비벼 시손으로 꾹꾹 눌러 만든 주먹밥.
오이김치.
이렇게 차려 놓은 저녁상을 보면 눈물이 나요.
뜨근한 밥,
시어머니 , 시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이런 저녁상을 대하는 날이면
기쁨도, 행복함도, 하염없이 쓸쓸해져요.
삶이 무거워져요.
4.
시어머니께 김치 얻어먹고
간장 된장 고추장에 밑반찬까지 얻어먹고
하다하다 이젠 기도까지 시어머니신세에요.
나를 위한 기도까지 시어머니께 떠 넘겨요.
시어머님이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하고 싶은 기도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다음 생에서는 죽음과 삶의 구분이 없는, 생사의 번뇌.윤회의 번뇌를 끊고 싶다고
편안하게, 자는 듯이 죽은 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시어머니께서 그런 기도를 소원하는 줄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시어머니의 기도방.
가끔 오셔서 성경을 읽으시고 묵주기도를 하는 시어머니의 성지.
그러나 시어머니의 기도는 자식들 며느리 때문에 늘 뒷전이에요.
오늘
내일
미루다,70평생이 가고 있어요.
오늘은 그방에서 나의 기도서를 폅니다.
시어머니께 떠 넘긴 나의 기도.
시어머니의 등에 짐지워진 나의 욕망 가져오려고
낯선 기도문을 중얼거려 봅니다.
82쿡 어머님들 저희 시어머님 최고지요?
다음달에 칠순잔치를 하는데 정말 최고로 잘해 드리고 싶어요.
남편도 좋지만 시어머님이 너무 좋아서 시집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행복한 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