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교육감 최후 진술(12월 30일 결심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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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30일 곽노현 교육감 사건 결심공판, 곽노현 교육감의 최후진술을 정리했습니다.
참관기 마지막 회에 들어갈 내용이나 궁금해 하실 것 같아 먼저 올립니다.
법정은 녹음이나 녹화가 되지 않으므로 메모와 기억에 의한 정리로 실제와는 약간 다를 수 있습니만,
취지를 살리는 방향에서 작성하였습니다.
곽노현 피고인 (교육감) 최후진술
-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공판중심주의를 펼치고 경청해주신 재판장에게 감사드립니다.
나름 힘들었던 과정이었습니다. 100일이 넘게 구금되어 있었고 100번이 넘게 수갑과 포승줄에 묶였습니다.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기쁘고 빛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판의 두려움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공판중심주의, 재판부가 자유롭게 의견 개진을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재판과정이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될 수 있구나,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또 법정은 공소 사실 외에도 삶과 인격과 도덕이 같이 심판을 받는 자리와 같습니다. 마치 삶의 중간 심판과도 같습니다. 교육감직에 누가 될까 걱정하였고,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과정에서 혹 타인에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다 제가 아직 부족한 탓입니다.
다만 진실과 정직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내게 이로운 것이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 내게 이로운 것이라는 생각에 검찰에서는 물론이고 공판과정에서 최고도의 진실과 정직에 충성하고자 했습니다. 검찰 조서로 유례없이 230쪽의 조서를 남겼습니다. 절차법적으로 무죄를 원치 않고 판사도 확신하는 무죄를 받고 싶었습니다.
기억은 흐리고 말은 거짓을 담아낼 수 있지만 삶의 흔적은 정직합니다. 서울 교육을 위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뒷돈거래가 있었는지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상상한 적도, 욕망한 적도, 인지한 적도, 승인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사전에 후보매수나 뒷돈거래를 욕망하거나 인지·승인하지 않았다는 숱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물 댓가지의 증거를 기억에서 복원시켰습니다.
단적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5월 19일 날 저는 단일화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후보 매수 사전합의를 하는 사람이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그 자리에서 원로들에게 ‘박명기 교수가 어려움에 빠지면 진영에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진영에서 도와주실 거죠?’ 라고 위로한 말을 검찰은 포괄적 금전 지원에 대한 약속이라고 공소하는데 내가 만약 합의를 해주었다면 박명기 교수가 어려움에 빠지지도 않을 것인데 그런 걱정의 말을 원로들에게 하겠습니까? 검찰이 제시하는 그 포괄적 지원이라는 말이 오히려 사전합의를 하지 않았다는 정황이 되더라 말입니다.
그럼에도 (측근들 간)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억측은 깊고 오해는 무성했습니다. 검찰은 이 오해와 억측을 제시한 것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를 조사하고 녹취록도 보면서, 박 후보 쪽은 1백% 약속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반면 우리 쪽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면서도 최초의 시나리오를 지금까지 몰고 왔습니다. 유죄 증거로 내민 3편의 녹취록이 오히려 제가 몰랐다는 것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많은 증거와 증언이 오해와 억측을 이기는 정화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검찰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검찰의 최고 정예라는 공안부 검사들이 무능하고 직무를 유기했기 때문에 이를 몰랐다고 하면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지금 저하고 자리를 바꿔 앉아야 할지 모릅니다.
저는 사퇴에 대한 대가로 도움을 제공한 것이 아닙니다.
공소시효가 3개월이 지난 후에야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설령 어떤 사전 합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행 기대 가능성이 없는 시점에 왜 그런 지원을 하겠습니까? 저는 이권거래를 상상 조차 하지 못합니다. 뒷돈거래도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런 이권거래, 뒷돈거래 하는 사람이 자기 돈으로 부인에게 부탁해서 조금씩 현금을 마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이권 사업을 통해서 돈을 마련할 것입니다. 공판에서 제가 오히려 어떠한 이권 사업도 거부하는 사실이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준 돈은 다른 것입니다. 뭔가 다른 성격의 것이라도 왜 생각하지 못하나요? 딱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박명기 교수의 경제적 곤궁을 들었고, 극단적 선택에 대한 걱정을 공유하고 그것의 파장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사퇴 대가나 합의 이행과는 무관합니다. 물론 선의는 마음속의 것으로 입증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강경선 교수와 나는 여러 가지를 얘기하며 함께하고자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돈을 이기자’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돈이 되는 일을 쫓지 않았고 주로 돈을 쓰는 일을 쫓았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법정에서 말해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말합니다. 그동안 가계 소득의 15% 이상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1992년에 강경선 교수의 집을 사는데 돈을 보태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고 그가 믿는대로 하나님이 하신 것일 겁니다. 그 이후에도 세 번 정도 1억 정도 이상 기부한 일이 있습니다. 한번은 형제간 이었고 나머지는 전혀 다른 관계였습니다.
검찰은 이 공판에서 나타난 명백한 사실도 너무나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꽃놀이패를 언론과 주고받으며 수사하였고 기소했습니다.
그러나 강경선 교수가 함께 있었기에, 재판과정이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강경선 교수의 인격이 드러나는 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내가 멋있게 그를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강경선 교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저와의 오랜 우정으로 피고인석에 앉은 것 뿐 입니다.
반민주 선거사범이라고 하는데 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박명기 교수의 사퇴는 모든 사퇴가 그렇듯이 자의반 타의반이었고 명분과 합리성을 동시에 고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명분이 더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박 교수는 분명 단일화 대의의 명분으로 사퇴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허물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도 선의의 피해자가 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해를 회피하고자 했지만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우려했던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개인이, 서울교육행정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만약 검찰이 ‘대가성에 대한 판단’을 중심으로 하고 불구속했다면 덜 고통스럽고 개인적, 사회적으로나 안타깝고 통분할 일이 줄어들었을 겁니다. 검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직 속단은 이릅니다. 법원의 판단이 남아있습니다. 법원으로부터 강경선 교수의 선의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습니다. 또 선의가 국고로 회수되지 않고 박명기 교수의 곤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더욱 원숙해진 우리 세 사람이 교육과 사회 변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며 합니다.
진실이 오해를 이기고, 믿음이 걱정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법이 거짓과 억측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선의와 인정을 무시하는 법이 아니라 법도 이를 권장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습니다.
그래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일 겁니다.
시련과 고통도 극복하여 협력하면 선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2011.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