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뵐 수 있게 된다면
그곳은 천국이겠지요.
당신 같은 분들을 위해서라면
꼭 그런 곳이 있어야 창조주는 좋은 분이시겠지요.
불의하고 악한 이들이 이곳에 더 오래 많이 머무는 것을 보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분명 천국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을 모질게 고문한, 야수도 할 수 없는 짓을 한 이는
저렇게 기름진 모습으로 살아
“그 시대에 고문도 예술”이라고 여전히 살아 노래하며
목사 안수까지 받고는 자신은 “그 시대 안중근과 같은 역”을 했노라 설교하고 있으니
분명 천국은 이곳이 아닌 저곳에 있는 것이겠지요.
이 땅엔 종교라 할지라도
그 껍데기엔 천국이 담겨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인 제가 정말 오늘은 더욱 부끄럽습니다.
밥값도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나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누님” 조화순 목사님을 통해
타고난 그 견고하고 깊은 당신의 속을 퍽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대학시절 공순이들(그 시대엔 이렇게 불렀다)과 같이 지내던
조 목사님을 찾아와서 사람취급 받지 못하던 그 여공들을 돕겠다고 했지요.
그때 조 목사님은 학삐리들은 더 이상 받지 않겠다며 교묘히 거절하셨지요.
학삐리들은 젊은 여직공들을 꽤서 가슴만 달뜨게 해놓고 떠나버리는 일이
흔했기에 찾아온 남학생들을 내쫓으려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숙제를 주어서 기도회 성경공부에 못 오게 하였지요.
그때 당신은 일주일을 밤새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을 시켜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해냈지요. 성경을 열장 스무장 배껴 써오라면 써오고….
심지어 시험 기간에 그렇게 해도 그리하였다고 하지요.
때론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밥을 지으라 하면 하라는 대로
무슨 일이든 말 없이 해냈다 하지요.
새하얀 얼굴에 말도 없던 순수한 청년이었다지요.
조화순 목사님은 이렇게 그 당시를 한 방 날리셨습니다.
“김근태는 그때 그곳을 다녀간 신학생 성직자 열보다 났다!”
당신은 분단된 조국에서 이데올로기로 정신까지 분열되고
산업화의 미명 아래 군부독재 군홧발로 사람을 짓밟을 때에
고문실 칠성판 위에서 전깃줄로 사지와 성기까지 엮여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인간됨을 말살당하면서까지 이 시대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모든 가해자를 품는 여유와 신중함으로
여의도판에서 정적들에게서까지 존경 받던 휴먼이스트였습니다.
당신은 국회의원 금 빼지를 가슴에 달고도
마지막까지 양심을 지키느라
부당한 돈 받기를 거절하였기에
혼자 밥 먹을 때에는 라면집 김밥집에서 끼니를 때웠지요.
그 누가 찾아와도
당신은 일어나서 맞이하고
문밖까지 배웅하는 겸손하고 따뜻한 신사였지요.
그럼에도 이데올로기와 정쟁 속에서
당신은 여전히 곡해를 당하였습니다.
저 역시 때론 마음의 거리를 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고 역사가 제자리에 설 때에
당신의 양심과 진실은 이 땅에서 다시 꽃필 것입니다.
이곳이 여전히 천국이 아닐지라도.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이 추위가 몰아치는 깊은 밤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