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엄마

... 조회수 : 811
작성일 : 2011-12-29 19:18:45

엄마


글 : 김어준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총수)


고등학생이 돼서야 알았다. 다른 집에선 계란 프라이를 그렇게 해서 먹는다는 것을. 어느 날 친구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반찬으로 계란 프라이가 나왔다.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의 수만큼 계란도 딱 세 개만 프라이되어 나온 것이다. 순간 ‘장난하나?’ 생각했다. 속으로 어이없어 하며 옆 친구에게 한마디 따지려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놀리는 친구의 옆모습을 보고 깨닫고 말았다. 남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난 다른 집들도 계란 프라이를 했다 하면, 4인 가족 기준으로 한 판씩은 해서 먹는 줄 알았다. 우리 엄마는 손이 그렇게 컸다.

과자는 봉지가 아니라 박스 째로 사왔고, 콜라는 병콜라가 아니라 PET병 박스였으며, 삼계탕을 했다 하면 노란 찜통-그렇다,

냄비가 아니라 찜통이다-에 한꺼번에 닭을 열댓 마리는 삶아 식구들이 먹고, 친구들까지 불러 먹이고, 저녁에 동네 순찰을 도는 방범들까지 불러 먹이곤 했다.


엄마는 또 힘이 장사였다. 하룻밤 자고 나면 온 집안의 가구들이 완전 재배치되어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구 배치가 지겹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그 즉시 결정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잦으니 작은 책상이나 액자 따위를 살짝 옮겼나보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사할 때나 옮기는 장롱이나 침대 같은 가구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려 다녔으니까. 오줌이 마려워 부스스 일어났다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목장갑을 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가구를 혼자 옮기고 있는

‘잠옷바람의 아줌마가 연출하는 어스름한 새벽녘 퍼포먼스’의 기괴함은 목격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새벽 세 시 느닷없이 깨어진 후 팬티만 입은 채 장롱 한 면을 보듬어 안고 한 달 전 떠나왔던 바로 그 자리로 장롱을 네 번째 원상복귀 시킬 때 겪는 반수면 상태에서의 황당함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재수를 하고도 대학에 떨어진 후 난생 처음 화장실에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화장실 문짝을 아예 뜯어내고 들어온 것도 우리 엄마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낼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대학에 두 번씩이나 낙방하고 인생에 실패한 것처럼 좌절하여 화장실로 도피한 아들, 그 아들에게 할 말이 있자 엄마는 문짝을 부순 것이다.

문짝 부수는 아버지는 봤어도 엄마가 그랬다는 말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듣지 못했다.


물리적 힘만이 아니었다. 한쪽 집안이 기운다며 결혼을 반대하는 친척 어른들을 향해 돈 때문에 사람 가슴에 못을 박으면 천벌을 받는다며 가족회의를 박차며 일어나던 엄마, 그렇게 언제나 당차고 씩씩하고 강철 같던 엄마가, 보육원에서 다섯 살짜리 소란이를 데려와 결혼까지 시킬 거라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담당 의사는 깨어나도 식물인간이 될 거라 했지만 엄마는 그나마 반신마비에 언어장애자가 됐다.


아들은 이제 삼십 중반을 넘어섰고 마주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만큼 철도 들었는데, 정작 엄마는 말을 못한다.

단 한 번도 성적표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뭘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문짝을 뜯고 들어와서는 다음 번에 잘하면 된다는 위로 대신에,

그깟 대학이 뭔데 여기서 울고 있냐고, 내가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내 가슴을 후려쳤던 엄마,

사실은 바로 그런 엄마 덕분에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롭게 사는 오늘의 내가 있음을 문득 문득 깨닫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엄마는 말을 못한다.


우리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엄마의 휠체어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고 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사신 거냐' 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이 글은 월간 <샘터>와 아름다운 재단이 함께하는 '나눔의 글잇기' 연작으로 월간 <샘터 2003년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글쓴이 김어준 님은 아름다운 재단이 벌이고 있는 '아름다운 1% 나눔' 캠페인에 참여해 이 글의 원고료 전액을 아름다운재단 공익출판기금에 기부했습니다

IP : 218.237.xxx.195
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66818 자칭 무선 매니아 2 jjing 2012/02/07 394
    66817 노대통령 살아계실때 한겨례에서 11 .... 2012/02/07 1,073
    66816 팟캐스트 '벤처야설'도 괜찮아요 ㅎㅎ 2012/02/07 462
    66815 어제 52세 여자분 보셨어요? 62 긴장하고 살.. 2012/02/07 16,785
    66814 뺑소니차 잡으려면 어찌해야 하나요?? 3 뺑소니 나빠.. 2012/02/07 960
    66813 젤 간단하게 원두커피 마시는 방법이 뭘까요? 18 단순하게 살.. 2012/02/07 3,611
    66812 독일로 이민을 가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5 친구야 2012/02/07 2,057
    66811 아우디 A6 오래타보신분 14 낼모레오십 2012/02/07 4,710
    66810 수돗물에서 찌꺼기 같은게 나와요. ㅠ.ㅠ 6 알려주세요 2012/02/07 1,682
    66809 생명과학, 생명공학, 식품공학 - 장래 진로 문의드립니다 3 걱정 2012/02/07 2,116
    66808 임산부 요가 정말 좋네요 5 평온 2012/02/07 1,430
    66807 월세 계약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3 재계약 2012/02/07 934
    66806 미샤 보라색병 써보신분~ 6 피부미인 2012/02/07 4,748
    66805 식당에서 일할 사람 구하려면 어디서 하나요? 2 로즈마리 2012/02/07 861
    66804 6살 아이들 발달수준 어떤가요? 9 6살 2012/02/07 2,409
    66803 어떠한 경우에도 이미 계약금이 넘어가면 계약체결이 끝난 건가요?.. 2 사기? 2012/02/07 1,030
    66802 둘째낳으란 말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둘째 낳으신분들 부럽기도 하.. 12 .. 둘째 2012/02/07 1,901
    66801 실비보험 비갱신형으로 갈아탈까요?ㅠ 12 실비보험 2012/02/07 6,057
    66800 내과개업의입니다, 당뇨,고혈압등 만성질환자에게 묻습니다, 38 절실 2012/02/07 6,300
    66799 컴에 글씨가 잘 안써져요.. 1 .. 2012/02/07 545
    66798 나꼼수들으면서 팔이쿡접속 어랏 2012/02/07 1,372
    66797 거의 매주말마다 시댁에... 10 힘들어요 2012/02/07 2,725
    66796 2월 7일 [손석희의 시선집중] "말과 말" 1 세우실 2012/02/07 870
    66795 미국 대학에 대해 잘 아시는 분께 여쭙니다. 7 미국 2012/02/07 1,181
    66794 50이면 인생의 황혼기 소리듣나요? 19 여자나이 2012/02/07 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