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어렸을 때에 공부를 좀 잘했더랬죠.
반장도 하고 선생님들도 좀 예뻐라 하고.
그런데 뚱뚱하고 못생겼고 우물쭈물하고 몰려다니면서 여자애들이랑 꺄르르 이런걸 잘 못하는 성품이었었는데.
덕분에 크게 왕따를 당했었습니다. 좀 어둡고 재미없는 느낌의 사람이었나봐요. 답답하기도 하고.
어릴적부터 왠지 애어른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건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죠. 반장이었는데 왕따였습니다.
2.
매일매일 재잘재잘 잘도 얘기하던 애들이 제가 앞에 가면 딱, 말이 없어집니다.
투명인간 취급입니다.
누구 욕을 한참 하다가, 저게 누구 얘긴가 하면 제 얘깁니다.
체육시간 미술시간 이렇게 이동해야 되는 시간이 너무 싫습니다.
같이 갈 사람이 없는것 되게 싫었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참 쓰잘데기 없고 한심해 보이는데, 쟤들이 다 같이 그러니까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싶고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저한테 뭘 시키면 교실은 물을 뿌린듯 조용해집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제게 온갖 친한척은 다 합니다.
3.
참 한학기가 지옥같더군요.
집에가서 학교 잘 다녀왔냐고 묻는 엄마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
엄마가 걱정하실까봐 왕따당했던 거 얘기도 못합니다. 얘기하기 부끄럽기도 하고.
4.
그 충격이 생각보다 참 오래갔습니다.
중학교 가서 성격도 많이 밝아지고, 친구들도 많고, 누가 봐도 밝은 아인데
마음 깊숙히는 "버려지는 아픔" "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었더랬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생들은 보고 싶지도 않고.. 예전의 제 모습을 떠올릴까봐.
5.
그런데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때 또 크게 왕따 한번 당했습니다.
동아리에서였는데, 한달동안 거의 합숙하다시피 공연 준비를 하는 동아리였는데
말도 없고, 굼뜨고, 뚱뚱하고 뭐 이런것들이 합쳐지면서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다같이 하나, 둘, 셋, 해서 왕따가 되는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 둘 서로 가까이 하기 싫고, 그런 분위기가 퍼지면 왕따가 되는거지.
저 자신이 엄청나게 위축되어 있기도 했었고..
어쨌든 그런 일들이
어렸을 때 치유될까 말까 한 트라우마를 아주 후벼 팠달까요.
6.
완전히 혼자인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 친구들도 많았지만
극복하기 쉽지 않더라구요.
그땐 우울증인지도 모르고 늘 별로 살아있는 기분이 아니고
"내가 나 같지 않다"라는 기분으로 매일매일을 살았는데 그게 전형적인 우울장 증상
"이인증 depersonalization"이더라구요.내가 나같지 않은 기분.
우울증 치료를 받아서 조금 더 의욕이 생겼으면 자살했을지도 모르죠.
7.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 까지의 이야기들도 각각이 책 한권이지만
어쨌든 극복해 냈습니다.
극복한 지금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 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돌렸던 그 사람들이 밉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하나도 없고
내가 잘 사는걸 보여줘서 복수하겠어, 심지어 이런 마음까지도 없어졌습니다.
모든 단계를 거쳐서 진짜로 제가 왕따였던 시절을 잊어버렸습니다.
8.
왕따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교사에게 돌을 던지는 것도 가해 학생에게 돌을 던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평범"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라는 책을 아시나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책입니다.
홀로코스트때의 전범이었던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에 대한 책입니다.
그 재판과정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됩니다.
그 사람이 유태인에게 엄청난 증오가 있다거나, 그 사람 자체가 싸이코패스여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아이히만에게 주어진 임무가 단지 유태인을 분류해서 가스실로 보내는 일이었고
그는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둔감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양면성을 지닙니다.
제가 왕따의 피해자였을 때 나를 미치게 했던 것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 저들은 너무나 평범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왜 나를 미워하고 못살게 굴까요?
9.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왕따의 피해자 이거나 왕따의 피해자의 보호자라면
첫번째는 , 담대해지십시오.
이 일은 반드시 지나가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나를 강하게 합니다.
내가 이 일을 극복해낸다면 성장하게 되리라는 것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두번째는 강해지십시오.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세요.
내게 힘이없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세요.
당신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회복할 힘도 있으며 그들과 싸워 승리할 힘도 있습니다.
그들을 무시할 힘도 있습니다. 분노할 힘도 있습니다.
세번째는, 객관적이어 지십시오.
왕따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최대한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과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객관적인 팩트와 "그들"의 가치판단을.
내가 뚱뚱하다면, 살을 빼는 것이 좋습니다.
지저분 하다면, 깨끗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성실하지 못하다면, 성실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어야 합니다.
나는 원래 뚱뚱하고 지저분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며 그것 때문에 그들로부터 핍박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나를 재단하고 괴롭히는 그들이 잘못된 행위를 하고있는것이라는 걸.
나는 그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
이 작은 집단의 사람들이 내가 속한 세계의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니다.
이 순간과 이 장소에서의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
꼭 잊지 말아주세요.
10.
만약 당신이 왕따의 가해자 이거나, 왕따를 방조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도 악이 될 수 있으며.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돌아서 피해자가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며,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지만
악은, 적극적이고 의도를 가질 때가 아니라, 방조할 때에도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왕따를 당하는 상황이라면,
약간의 도움, 따뜻한 말로도 당신은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피해자가 당신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거리를 두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약간만, 조금만이라도 따뜻한 말/행위를 해 주십시오.
극복하는 것은 피해자 본인의 몫이지만, 약간의 따뜻함이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11.
어떤 방지책이나 처벌로도 왕따가 없어지지 않을 것을 압니다.
저는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제가 모르는 사이에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 있겠지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이 사회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 문화. 개인의 특징을 인정하지 않음.
배금주의, 모든 것들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쉽게 해결되지 않을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얘기를 거쳐 해결책을 만들어가야 하겠지만
일단 피해자들에게 다시한번 당부드리고싶은 것은
이게 끝은 아니며, 나를 죽이지 못하는 어떤 것도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저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온 것은 그런 극단적인 경험들이었습니다.
꼭 이겨내십시오.